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72화 (72/132)

72화

손을 멈춘 채 권이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간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다가,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같이 나가자고?”

“누나 무서울까 봐. 겁 없는 연하가 같이 가 주려고.”

“…….”

래화는 다시 드로잉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랑 같이 나가면 일 더 커져. 그냥 적당한 수준으로만 인터뷰할 거니까.”

“나보고 사고 치지 말라더니, 너는 대형 사고 치는 거 아냐?”

권이태의 말에 양심이 찔렸지만, 모르는 척 바지런히 그림만 그렸다. 가만히 있으려니 심심한지, 그는 계속 말을 붙여 왔다.

“몸은 괜찮아?”

“아니. 삭신이 쑤셔.”

너 같으면 그걸 안에 넣고도 멀쩡할 수 있겠냐며 흘겨보자, 킥킥하는 웃음소리가 되돌아왔다.

“예쁘다, 래화야. 너도 네가 예쁜 거 알지?”

“응.”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방해하니까 조금 귀찮았다.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면 입을 다물 테지만, 이상하게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내심 그의 방해를 즐기는지도 몰랐다.

“너 은근히 아는 거 많더라. 눈덧신토끼 같은 건 어떻게 알았어.”

래화는 볼펜을 바지런히 움직이며 무심하게 답했다.

“병원에서 할 일 없어서 TV만 봤거든.”

TV 채널이 고정되어 있어서, 보여 주는 대로 시청해야 했다. 자극적인 오락 프로그램은 당연히 허락되지 않았고, 제일 많이 틀어 주는 게 다큐멘터리였다.

초원을 뛰어다니는 동물들이나 DNA의 이중 나선 구조 따위를 멍하니 보는 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손이 낫고 나서는 TV 대신 책을 많이 읽긴 했지만, 어쨌든 정말 할 일 없는 곳이었다.

병원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해 주니, 권이태는 눈매를 조금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병원 이야기 같은 건 지루하니까 그런 듯했다.

자기가 물어 놓고선…….

래화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티 내지 않고 의연하게 그림을 그려 나갔다. 대신 작은 심술로 실제보다 조금, 아주 조금 못생기게 그렸다.

그래 봤자 티도 안 나긴 했지만 말이다. 확 눈매를 찌그러트릴까 생각했지만, 그건 또 너무 양심에 찔렸다.

이미 지금도 그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권이태를 담아내기에 밋밋한 단색의 볼펜은 한참 부족한 도구였다. 아쉬운 대로 음영 표현에 공을 들이던 때였다.

“병원은 이정환 때문에 들어간 거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와 이런 얘기를 할 때가 되었다. 래화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회장님이 입원하지 않으면 손가락 치료 안 해 주겠다고 하셔서.”

치료를 받는 대가로 자신이 손가락을 부러뜨렸다고 거짓말했고, 자발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지루하고 잔인한 2년이었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야.”

권이태에게 위장 결혼까지 의뢰한 이유도 병원 문제가 가장 컸다. 이정환은 래화의 유일한 법적 보호자였다.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권력과 재력까지 갖췄으니, 그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래화는 꼼짝없이 병원에 다시 처박혀야 했다.

혼인 신고를 통해 법적인 방패를 만들어야겠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강구할 정도로, 래화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나도 묻고 싶은 거 있어.”

“자기야, 나 떨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너 회장님하고 내기했다며.”

일원 그룹 말고 이정환 회장님, 하고 덧붙였다. 이제 회장이 둘이라 구분을 해야 했다. 래화의 덧붙임에 권이태는 잠시 웃었다.

“빨리도 물어본다.”

“진작 물어보려고 했는데……. 조금 무서웠어.”

“아하. 무슨 내기였냐면.”

“설명해 줄 필요 없어.”

“그럼 왜 물어봤는데.”

“이겼어?”

권이태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허물어지듯 웃었다.

“아직은. 근데 내가 이길 거야.”

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긴 팔을 뻗어 래화의 드로잉북을 뒤로 젖혔다. 이미 한참 전에 완성된 그림을 보며, 권이태는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 믿지?”

“……응.”

래화는 드로잉북에서 그림을 찢어 권이태에게 건네며 속삭였다.

“너 믿어. 그러니까 너도 나 믿어 줘.”

“항상 존나게 믿고 있어요, 자기야.”

마치 정해진 순서처럼, 그가 짧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했다. 내리깔린 검은 눈동자가 래화를 직시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뒤에서 밀어줄 테니까.”

래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심장이 빨리 뛰다 못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세연은 방 안을 빙글빙글 서성였다.

“미쳤어……. 미쳤다고…….”

저도 미쳤지만, 이래화도 단단히 미쳤다. 류설연 사후 10주년 특집 다큐로 이래화가 재기 불능으로 꺾이리라 생각했다.

다시 정신병원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어디 시골 깡촌에 박혀서 앞으로 최소 5년 동안은 바깥에 얼굴 내비치는 일이 없게 되리라 여겼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이래화 이 또라이 같은 년이 사고를 쳐도 제대로 쳤다.

얼굴 꽁꽁 가리고 숨어도 모자랄 판인데 인터뷰라니. 그것도 특집 다큐를 찍은 피디와 함께, 다큐를 방영했던 방송국에서…….

방송 예고를 확인한 이정환은 노발대발하다가 혈압이 너무 높아져 급히 주치의까지 불렀다고 했다.

이세연도 까무러칠 듯이 놀라서 당장 엄마에게 달려갔다. 강미옥도 당연히 깜짝 놀랐고, 두 모녀는 나란히 함께 이정환 회장의 병문안도 다녀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강미옥이 이상해진 것은 최근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놀랄 만큼 얼굴이 해쓱해졌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파리해진 채로 다니기에 무슨 일이냐고 한참 닦달했더니, 두루뭉술하게 한마디만 해 줄 뿐이었다.

“미끼고 함정인 거 아는데, 너무 먹음직스럽잖아.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죽어도 이건 먹고 죽어야지.”

그리고 이래화의 인터뷰가 방송하는 날.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본방송 시간에 맞춰서 TV 앞에 앉아 있었다. 이세연은 손톱을 질겅거리며 이래화의 인터뷰를 시청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인터뷰를 결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어의 말을 경청하는 TV 속의 이래화는 오늘따라 짜증 날 정도로 심하게 예뻤다.

일반인들은 TV에 출연하면 실물보다 못생기게 나온다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신경 써서 옷을 차려입고, 샵에서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받은 덕분인 듯했다.

웬만한 연예인들 못지않은 미모에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까지 더해지니, 정말로 무슨 신인 여배우가 나와서 인터뷰하는 느낌이었다.

류설연 특집 다큐에서 잠깐 나온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얻었던 이래화였다. 이번 인터뷰가 끝나면, SNS랑 각종 커뮤니티에서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뻔히 보였다.

이래화가 인터뷰할 때 입었던 의상, 이래화 메이크업, 이래화 머리 스타일 등등.

온갖 것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대서 결국 이래화가 이슈 메이커로 재탄생하는 꼴을 지켜볼 미래가 끔찍했다. 이세연은 자신의 인별그램 팔로워 숫자와 게시글에 찍히는 하트 수를 신경질적으로 확인했다.

“짜증 나…….”

그러나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자, 핸드폰을 소파 구석으로 던져 버리고 스피커 볼륨도 커다랗게 키웠다.

“이정환 회장님께선 제가 그림을 그리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편안한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되는 인터뷰 내내 이래화는 침착했다. 카메라 앞이라고 떨거나 긴장하는 일 없이, 평소처럼 차분히 말했다.

그녀의 침착함에 인터뷰어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되레 인터뷰어가 더 긴장해서 질문하는 듯 보였다.

인터뷰 내내, 이세연은 숨도 못 쉬고 방송을 시청했다. 제발 이래화가 말실수라도 한 번 해 주길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간의 질답 끝에, 마침내 인터뷰어가 가장 예민한 질문을 던졌다.

“이래화 씨께서 류설연 화백을 모방한다, 이런 말이 있었는데요.”

“제가 어머니에게 그림을 배웠기 때문에 화풍이 비슷한 건 사실이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른지…….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인터뷰어의 질문에 이래화가 웃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그녀의 냉랭하던 인상을 매혹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순간적으로 이세연마저 헉 하고 감탄할 정도로.

“그건 제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직접 보고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래화는 인터뷰어를 보던 시선을 돌려, 카메라 렌즈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세연은 엄마의 뜬구름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DS 호텔에서 제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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