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73화 (73/132)

73화

입을 쩍 벌리던 이세연은 후다닥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방송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난리가 났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기사를 읽다가, 회원 수가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 여러 군데를 돌아보았다. 온갖 사람들이 수십 개씩 게시글을 올리며 바글바글 떠들어 대는 중이었다.

[혹시 착장 정보 아시는 분ㅠ

└(사진)

└왛ㅎㅎ감샇ㅎㅎㅎ

└헐 원피스 80만 원? 생각보다 저렴하네??? 당연 몇백만 원은 할 줄

└집 나와서 돈 없나봄ㅋㅋㅋㅋㅋ

└와 나도 당연히 초고가 명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패완얼]

[ㅁㅊ 개뻔뻔…… 역겨운 거 나뿐?ㅋ

└222ㅋㅋㅋ개역겹ㅋㅋㅋ토나옴 우우웩ㅋㅋㅋㅋㅋ

└33333 주어 없음^^ 할말하않 돈 없어서 참는당^^^^

└444444 ㄹㅇㅋㅋ

└55 저런 것도 딸이라고ㅠ류설연만 불쌍ㅠ]

[오늘 방송 보고 확신했습니다. 이래화가 범인입니다. 제 생각엔 쏘패, 혹은 싸패 계열인 듯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신병원 들어간 것도 알리바이 만들려는 의도적인 행동이죠.

└이정환 회장님이 이런 사실들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시발 방구석 좆문가들 납셨구욬ㅋㅋㅋㅋㅋㅋ 이래화가 류설연 죽였으면 이정환이 가만 있었겟음? 제발 대가리에 생각 좀 넣어 다니세요ㅠㅠㅋㅋㅋㅋㅋ]

[뭐 하시는 분인데 이렇게 난리인가요? 신인 여배? 이뿌긴 하네요ㄷㄷ

└님 사진만 보지 마시고 글도 좀 읽으세요. 기사에 다 써 있잖아요.]

[그 와중에 딕션 쩐다; 목소리도 좋고;;

└엌ㅋㅋㅋ나도 그 생각함ㅋㅋㅋㅋ

└완전 카메라 체질 아님? 떨지도 않고 시선 처리도 조왓음!! 웬만한 배우들보다 훨 나음

└ㅁㅈㅁㅈ]

[전에 다큐에서 사진 봤을 때 느꼈던 이미지하고는 많이 다르네요. 그새 야금야금 고친 것 같기도 해요.

└저도 그 생각 했어요!!

└일단 코는 손댄 거 확실해 보이죠?

└네네 병원 궁금하네요ㅎㅎ

└ㅋㅋㅋㅋ확실ㅈㄹㅋㅋ 딱 봐도 똑같은데ㅋㅋ

└그냥 제 생각을 말하는 건데 왜 시비세요?]

부지런히 게시글이며 댓글들을 확인하다 갑자기 성질이 돋았다. 이세연은 소리를 지르면서 핸드폰을 던졌다. 상기된 얼굴로 씩씩거리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이래화는 화제의 중심이었다. 만약 인별그램 계정이 있었다면, 저와는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게 팔로워가 붙었을 터였다.

댓글을 확인하는 사이 어느새 방송이 끝났다. 익숙한 CM송이 들려와 이세연은 또 혼자서 성질을 냈다. OTT에 방송이 뜨는 대로 챙겨 봐야 할 듯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뜨는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이세연은 냅다 전화를 받아다 우는 소리를 냈다.

“오빠아……!”

-세연아.

“인터뷰 봤어? 걔 진짜 제정신 아니야! 엄마는 또 어쩌자고 그런 걸 한다고 덥석 받아선.”

-세연아, 일단 진정하고. 전에 우리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지.

“응응.”

-할 수 있겠어?

임신…….

이세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권이태와 결혼한 사실을 밝히지 않은 걸 보면, 역시나 일원 그룹에서 이래화를 반대하는 모양이었다.

일원 그룹의 안주인 자리를 꿰차려면, 아직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이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지금이 적기였다.

물론 권이태는 여전히 별로였다. 그때 클럽에서 난동 부리는 꼴을 보고 나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래화는 점점 위로 치고 올라가는 중이고, 이제는 대중의 관심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넋 놓고 구경만 하다간 정말로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방송 시작 전부터 답답하던 속이 터질 듯이 꽉 막혔다. 이세연은 독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당장도 할 수 있어.”

***

전시회를 열겠다고 질러 놨으나, 막상 그려 놓은 그림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다 나름대로 계산하고 벌인 일이었다. 그때 후원하겠다며 관심을 표했던 마카오 재벌이 래화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

그걸 잠깐 빌려 와서 이번에 새롭게 그릴 그림들과 함께 전시할까 싶었다. 마카오 재벌한테는 대여하는 값으로 새 작품을 그려 주겠다고 할 생각이었다.

싫다고 하면 그냥 신작들만 전시해 버리고 말이다. 화제 몰이만 되면 충분하니, 그림 개수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전시회 장소로 DS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과거 류설연이 그곳에서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이정환과 강미옥의 관계를 조금 흔들어 놔야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강미옥은 심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래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익히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녀로선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기 때문이었다.

대산 호텔에서 DS 호텔로 리뉴얼하며 이미지를 탈바꿈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류설연의 전시회였다.

류설연의 전시회 덕분에 DS 호텔은 낡은 이미지를 버리고, 트렌디한 호텔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약발이 다 떨어진 현재, 래화의 전시회라는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떨어졌다.

류설연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기 있는 화가였다. 그녀의 사후 10주년 특집 다큐에 래화가 출연한 것만으로도 이미 여러 외신에서 주요하게 기사를 다뤘다.

그런데 류설연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래화가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전시회 한 번으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게 될 텐데, 강미옥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

래화는 팔짱을 낀 채로 서서 새 캔버스를 가만히 보았다. 아직 어떤 물감도 묻히지 않은 백지의 캔버스가 두려웠다.

전시회를 개최하면 온갖 평가가 쏟아질 터였다. 비슷하다는 말이야 무조건 나올 거고, 그 외에도 온갖 트집으로 물어뜯어 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각오한 바였다. 어차피 세상에 제 존재가 드러났으니, 이제는 정면 승부로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잘할 수 있을까.

끝 모를 불안감이 래화를 감쌌다. 류설연과 똑같다는 말을 듣는 것까진 상관없지만, 형편없이 뒤떨어진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잠깐 부정적인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다. 래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이제 카페 일도 못 나가게 되었다. 할 일도 없으니 전시회 전까지 죽어라 그려 볼 생각이었다.

래화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곤, 스케치부터 시작했다. 불안하게 요동치던 마음은 캔버스 위를 채워 나갈수록 조금씩 차분해졌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아니었다. 그냥 제 속에 들어찬 무언가를 쏟아 내고 싶었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의 황홀한 순간을 캔버스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래서 류설연을 흉내 낸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여태껏 붓을 놓지 못했다.

세심하게 색과 농도를 조절한 물감을 캔버스 위에 넓게 펴 발랐다. 새로이 배합한 물감은 말라붙은 피처럼 오묘하게 검붉은 색이었다.

하늘이 그저 푸르지만은 않듯, 래화의 모델도 복잡한 색을 품고 있었다. 그를 떠올리며 몇 번이고 색을 고쳐 가며 붓질했다.

한참 몰입하다가 문득 손이 멈칫거렸다. 화실에서 있었던 일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었다. 눈매를 찡그리는데, 때 맞춰 알람 소리가 울렸다.

삐빅, 삐빅, 삐빅.

래화는 칼같이 붓을 내려놓고 물감 묻은 앞치마를 벗었다. 산책하러 갈 시간이었다.

집에만 틀어박히면 정신 건강에 좋지 못한 법이었다. 그런데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외출할 일이 아예 없어져 버린지라, 산책을 일과에 새롭게 추가했다.

인적이 드문 집 근처 공원을 가볍게 걷고 돌아오는 정기적인 외출이었다. 물론 나갈 때마다 마스크와 모자, 선글라스까지 단단히 착용하고, 경호해 줄 이와 함께 다녔다.

권이태가 최근 일원 그룹으로 출근 중이라 데저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래화를 경호했는데, 오늘의 경호원은…….

“오늘 날씨가 좋군요.”

“네, 그러게요. 잘 부탁드려요.”

슈미트였다.

래화의 대답을 끝으로, 곧바로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로 껄끄러운 관계였다. 저번 방송국 방문 때 래화가 대놓고 저 싫어하시잖아요, 하면서 속내를 까발린 후로 사이가 더욱 멀어졌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던 슈미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제이나 메이가 경호를 맡게끔 하겠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의아히 그를 바라보았다. 슈미트는 정중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보다는 제가 눈에 띄기도 하고, 래화 님이 저를 불편해하시는 듯해서요.”

배려하는 척하는 그에게 래화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불편하신 건 그쪽이신 것 같은데요.”

슈미트도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답했다.

“티가 났나 봅니다.”

“뭐, 괜찮아요. 물론 절 싫어하는 사람이랑 다니려니 불편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

“그래도 데저트의 세 사람 중에 둘한테는 호감을 얻었으니, 이만하면 훌륭하다고 생각 중이기도 하고요.”

혹시 더 할 말 있냐는 표정으로 슈미트를 쳐다보았다. 그가 고상한 어투로 에두르듯 말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독특하시군요.”

“또라이 같다구요?”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습니다.”

“하시는 말뜻은 똑같지 않나요.”

슈미트의 입꼬리가 더욱 위로 올라갔다. 래화와 슈미트는 서로 살벌하게 웃으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화사한 미소와 달리 주변에는 찬바람이 몰아치던 때였다.

슈미트가 눈동자만 움직여 옆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곧바로 래화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그는 래화를 제 뒤로 보내어 가로막듯이 섰다.

뒤이어 검은 대형 세단이 미끄러지듯 다가와 바로 옆에서 멈췄다. 짙게 선팅 처리된 창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래화는 챙겨 온 가방에 조용히 손을 집어넣었다. 전기 충격기를 움켜쥐고 있는데, 차창 너머로 나타난 이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이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하죠.”

우아한 분위기의 중년 여성이 선글라스를 내리며 톡 쏘듯이 말했다.

“그쪽 남편 어머니 되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권이태의 계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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