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일원 그룹의 차민영.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떠올린 래화는 눈매를 찡그렸다.
일원에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리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괜한 주목을 피하고 싶어 하는 재벌가에서 래화처럼 소란스러운 존재를 달갑게 여길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권이태 몰래 찾아와서 한바탕하겠거니 하던 차였다. 생각보다 조금 빠르게 찾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래화는 물끄러미 차민영을 바라보며 답했다.
“싫습니다.”
차민영이 입술을 벙긋 벌렸다가 느리게 다물었다. 그녀는 제가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옆에 서 있던 슈미트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래화를 쳐다보았다. 굳어 있던 차민영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싫다고요?”
“네.”
“왜, 어째서……?”
차민영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제 말 한마디면 죽는 시늉도 마다 않는 사람들만 대하다가, 처음으로 뻣뻣한 상대를 만나서 놀란 눈치였다. 래화는 그녀에게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 줬다.
“이런 식으로 연락도 없이 찾아오셔서 명령하듯이 말씀하시는 거, 상당히 무례하게 느껴져서요.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차민영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제게 반대하는 의견을 듣는 일 자체에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는 듯했다.
“방송 나간 거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래화 양 상당히 겁 없는 성격이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칭찬으로 받아 버리니, 차민영이 뒷목 잡고 넘어가고픈 표정을 지었다. 래화는 그녀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어디서 하실 생각인가요? 오늘은 제가 시간 내드릴게요.”
차민영이 래화를 쏘아보았다. 뺨이 씰룩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적잖이 열받은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분노를 누르고 뒤편을 고갯짓했다.
“차량 준비했으니 타도록 해요. 본가에서 대화 나누도록 하죠.”
“네. 제 경호원도 동석하겠습니다.”
차민영은 그제야 슈미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도도히 말했다.
“경호원 노릇도 하시는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슈미트는 짧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차리며 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요.”
“대표님이시니 특별히 허락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차민영은 다시 창문을 닫았다. 그녀의 차가 출발하고, 뒤이어 다른 차가 멈춰 섰다.
차민영이 탄 차와 똑같은, 창문에 짙게 선팅이 된 차였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는 차단막이 내려져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래화는 슈미트와 함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슈미트가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
“래화 님이 우리 편일 때는 편하고 좋군요.”
차민영과 나눈 대화가 인상적인 모양이었다. 래화는 시트에 몸을 기댔다.
“슈미트 님은 저랑 계속 같은 편이에요.”
그가 의외로운 눈을 해 보였다. 차민영도 그렇고, 다들 아까부터 자꾸 당연한 얘기에 놀라고 있었다. 그에게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해 주었다.
“제 경호원이시잖아요.”
“…….”
바쁘게 메시지를 입력하던 손이 멈칫했다. 슈미트가 느릿하게 래화를 쳐다보았다.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에 묘한 눈빛이 감돌았다. 래화는 잠시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그런데 원래 아시던 사이인가요?”
대화 내용이나 태도로 보건대, 초면은 아니었다. 차민영과 슈미트는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낸 듯했다. 슈미트는 핸드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과거 일원에서 데저트에 의뢰를 넣었습니다. 태이를 감시하라는 의뢰였어요.”
“……!”
“이미 과거에 정리한 의뢰이고, 지금은 일원과 어떤 관계도 없습니다. 다만 가끔 태이의 안부나 연락을 전하긴 하지요.”
어차피 데저트가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이 감시를 부탁할 터였다. 하여 적당한 선에서 받아 줬다는 것이었다.
“태이한테는 지금 연락 넣었습니다. 곧바로 이쪽으로 온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본가에서 사모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실진 모르겠지만…….”
슈미트는 잠깐 망설이더니, 답지 않게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다.
“태이를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
일원 그룹의 차민영은 본래 아나운서였다. 9시 뉴스를 맡은 방송국 간판 아나운서로서 미래가 창창했으나, 그녀는 재벌가 안주인의 자리를 택했다.
차민영은 결혼식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 남부러울 게 없는 인생이었으나 신은 공평했다.
소중한 아들이 일원의 유전병을 강하게 물려받은 것이다. 그녀의 아이는 어릴 때부터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고, 결국 젊은 나이에 사망해 버렸다.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사생아가 얽혔다는 건, 가장 최근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차창 너머로 거리 풍경을 내다보던 래화는 문득 바깥을 유심히 살폈다. 눈에 익은 거리였다. 래화의 본가 또한 이곳에 위치했다.
회장님들이 많이 거주하는 전통 있는 부촌이니, 일원 그룹의 회장도 이곳에 거주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래화는 과거 권이태와 나누었던 짤막한 대화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까진 한국에서 살았어.”
“서울에서?”
“어. 자기 집 옆에서.”
농담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던 것이다. 그와 래화의 본가는 바로 옆집까진 아니지만, 꽤 가까운 거리였다. 과장은 있어도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권이태의 말을 새삼 곱씹으며, 래화는 익숙한 거리를 구석구석 살폈다.
따로 독립한 뒤에는 제 발로 찾아온 적 없던 곳인데…….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차가 멈춰 섰다.
권이태의 본가는 재벌가의 저택치고는 소박한 규모였다. 차민영을 따라 세심하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섰다.
“회장님께선 잠시 외출하셨어요. 대화 끝날 때까지는 오실 일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그녀는 응접실에 앉아 고용인이 미리 준비해 둔 차를 손수 따라 주었다. 투명한 연두색 찻물이 정갈한 다기에 담겼다.
“봉투 주면서 이혼해 달라고 말하기에는 우리 래화 양, 급이 좀 많이 높고.”
차민영이 가만히 찻물을 삼켰다. 래화는 잠시 찻잔을 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긴 손가락에는 반지가 여러 개 끼워져 있었다.
차민영을 따라 천천히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다가 멈칫했다. 금방 끓여서 내놓은 듯, 찻물이 너무 뜨거웠다. 입이 델 듯해서 그냥 다시 내려놓았다.
“우리 집안에서 래화 양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거 알고 있죠?”
“네.”
“나는 개인적인 이유로 반대하고 싶어요. 래화 양처럼 꽃 같은 아가씨가 왜 이런 결혼을 하는지.”
꽃 같다는 말에 래화는 잠시 손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드는 따끔한 통증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살짝 옆을 곁눈질하니, 슈미트는 없는 사람처럼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정자세로 앉아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권이태 그 아이, 어릴 적부터 정말 이상했거든. 래화 양도 진실을 알게 되면 소름 끼칠 거예요.”
차민영이 숨을 내쉬었다. 손에 든 찻잔의 찻물이 잘게 일렁였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일어나는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속삭였다.
“그놈이 내 아들을 죽였어요.”
여태껏 차분하고 우아하던 목소리가 삐끗 튀어 올랐다. 기이하게 높아진 목소리로 차민영은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내 아들은, 우리 현이는, 평생을 병원만 오가다 불행하게 죽었는데! 그런데 그놈은 행복하게 산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살인자 새끼가 일원 그룹 가지고, 사랑하는 여자랑 결혼도 하고. 현이가 가졌어야 하는 걸 죄다 뺏어서……. 그 꼴을 내가 어떻게 봐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차민영이 번뜩 고개를 치들었다. 그녀가 래화를 노려보며 뾰족하게 물었다.
“래화 양은 나 이해하죠?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는 거죠?”
광기가 뚝뚝 떨어지는 질문에 래화는 답하지 못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차민영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다. 과거 권이태는 자신이 가족을 죽였다고 고백한 적 있으니, 그녀의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권이태가 무슨 짓을 저질렀더라도, 래화는 그를 편 들고 싶었다. 낱낱이 죄를 가리고 심판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해 줄 테니까, 래화만은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가 저에게 그러했듯이…….
“왜 대답을 안 해요.”
새파랗게 날 선 목소리가 래화를 쑤셨다. 입술을 다물고 있자, 차민영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불안함을 느낀 래화와 슈미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왜 대답을 안 하냐고!!”
차민영이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이 확 쏟아졌다. 슈미트가 곧바로 래화를 잡아당긴 덕에 아슬아슬하게 물세례를 피해 냈으나, 차민영은 악을 쓰며 재차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래화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슈미트가 차민영을 제압하는 동시에, 단단한 품이 래화를 끌어안았다.
“왜 애먼 사람 건드립니까. 화풀이할 상대 놔두고.”
권이태가 나직하게 말했다.
“살인자 새끼 왔습니다, 사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