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75화 (75/132)

75화

심장이 빠르게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제 심장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래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이 등 뒤의 남자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무엇이 그리도 놀랍고 두려웠는지,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는 래화마저 뒤흔들어 놓았다.

래화는 저를 끌어안은 손을 느릿하게 붙잡았다. 권이태가 낮게 숨을 뱉었다. 머리가 산발이 된 차민영이 마구 몸부림치며 고함질렀다.

“놔! 저 새끼 죽일 거야! 내 아들 잡아먹은 놈!!”

슈미트가 인상을 쓰며 그녀를 좀 더 단단히 붙들었다. 응접실에서 이 난리가 났는데도 고용인들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소란을 알면서도 일부러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

눈을 까뒤집고 권이태를 잡아먹을 듯 구는 차민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모습이었으나, 제정신 아닌 사람을 많이 만나 본 래화는 침착할 수 있었다.

탁자 위를 살피니, 얼음을 담아 놓은 물병이 보였다. 날이 더워지는 터라 고용인이 혹시 누가 냉수라도 찾을까 싶어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래화는 물병을 집어다 차민영에게 뿌렸다. 난데없는 얼음물 세례에 차민영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말고 얼어붙었다. 그녀를 붙잡고 있다가 함께 물벼락을 맞은 슈미트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진정하세요, 사모님.”

빈 물병을 내려놓고, 차민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쫄딱 젖은 채로 입술을 바들바들 떠는 그녀에게 래화는 차근차근 말했다.

“이런 상태로는 서로 대화가 힘들겠네요. 일단 병원 치료부터 받으시는 게 좋겠어요.”

차민영이 멍청한 얼굴로 래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래화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를 설득하고 싶으시면, 제 남편이 아들 분을 살해했다는 객관적인 근거를 가져오세요.”

증거가 있었다면 차민영이 권이태를 가만 놔두지 않았을 터였다. 역시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짧은 정적이 흐르는 찰나, 권이태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감탄했다.

“와……. 살인자 편드네?”

하여간 편들어 줘도 난리였다. 래화는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가, 차민영에게 고개만 까닥여 인사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권이태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 앞에 모여 있는 고용인들에게 사모님을 모시라고 말하고, 슈미트까지 챙겨서 저택을 탈출했다.

래화가 진두지휘하는 일련의 과정 동안, 두 남자는 얼떨떨한 눈치였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리라곤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정원으로 나온 래화는 바깥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권이태를 쳐다보았다.

“…….”

서로 말없이 바라보는 정적이 길어졌다. 래화는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떤 말도 섣불리 내뱉을 수가 없었다. 오묘하게 굳어지던 분위기를 깨트린 이는 슈미트였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군요.”

래화는 뒤늦게 화들짝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닙니다. 오히려 덕분에 금방 끝났어요. 평소라면 꽤 오랫동안 날뛰었을 텐데 말입니다.”

일부러 그에게도 물을 뿌렸다고 오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슈미트의 목소리에는 유쾌함마저 묻어났다. 그가 안경을 벗어 재킷 앞주머니에 넣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고용인들에게 갈아입을 옷을 얻어 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길.”

말은 저렇게 하지만, 일부러 자리를 비켜 주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슈미트가 사라지고, 정원에는 권이태와 래화 둘만이 남았다.

권이태가 검지로 제 뺨을 긁적였다. 재킷은 어디다 던져 버리고 왔는지, 셔츠 차림인 그는 넥타이를 셔츠 앞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뱃갑을 꺼낸 권이태가 고개를 까닥였다.

“한 대 피울래?”

“나 담배 안 피운다니까.”

“으응.”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며 옆으로 슬슬 걸어갔다. 졸졸 뒤따라가자, 권이태의 눈 위로 웃음기가 스쳤다.

“냄새날 텐데. 잠깐만 떨어져 있자.”

“괜찮으니까 그냥 피워.”

래화가 떨어질 생각을 않자, 픽 웃더니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설렁설렁 걸어간 그가 멈춰 선 곳은 정원 구석의 담벼락 앞이었다.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은 권이태가 래화를 올려보았다. 무릎 위에 팔을 걸친 자세가 딱 뒷골목 양아치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돈 내놔, 하면 다들 얌전하게 지갑을 바칠 듯했다.

“너 불량배 같아.”

“돈 내놔, 자기야.”

“…….”

머릿속을 읽은 듯한 발언에 깜짝 놀랐다. 래화는 놀라지 않은 척하며 얌전히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란히 담벼락 앞에 앉아 있으니, 아름답게 가꿔진 장미 관목에서 향긋한 꽃 내음이 솔솔 풍겨 왔다. 오월에 만발했을 장미는 유월의 마지막으로 접어들며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정원 바닥에 흐트러진 꽃잎에 하릴없이 시선을 두는데, 권이태가 제 옆의 장미 관목을 유심하게 살폈다.

“이런 꽃은 괜찮아?”

“응.”

류설연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꽃만 봐도 발작이 올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많이 나아졌다. 이제 정원에 핀 꽃 정도는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잘 관리되고 정성껏 꾸며진 꽃은 여전히 거북했다. 특히 꽃다발이나 꽃바구니, 화병에 담긴 꽃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언제쯤이면 마음 편하게 꽃을 좋아할 수 있을까.

남들이 건네는 꽃다발을 웃으며 받고 싶지만, 아직도 래화에겐 요원한 일이었다. 래화는 신선한 장미향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바닥에 떨어진 장미꽃 송이를 주운 권이태가 꽃으로 제 팔뚝을 두어 번 툭툭 때렸다. 뭘 하나 싶어서 봤더니, 그는 이내 래화의 팔뚝을 장미꽃 송이로 톡톡 때리며 장난쳤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 몰라?”

“알지. 그거 원래 영어 속담이잖아.”

알면서도 자꾸 꽃으로 사람을 두들겨 댔다. 래화가 인상을 쓰며 째려보자, 권이태는 래화를 따라서 저도 똑같이 째려보는 시늉을 했다.

장난스러운 표정에 래화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정원에 번져 나갔다.

래화가 한참 웃으니 권이태는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그가 제 손 안의 장미꽃 송이를 괜스레 움켜쥐며 괴롭혔다. 걷어붙인 셔츠 소매 아래 드러난 팔뚝의 근육이 움직임을 따라 꿈틀거렸다.

손목에 찬 시계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건강한 구릿빛 손등에 툭 불거진 푸른 핏줄과 뚜렷한 뼈대가 신기했다. 래화의 가느다란 손과는 완연하게 구별되는 남자의 손이었다.

장미 꽃잎을 하나씩 뜯어내 바닥으로 던지던 권이태는 평범한 일상 얘기를 꺼내듯 말문을 열었다.

“내가 사생아이긴 한데.”

“……응.”

“회장님이 바람 펴서 낳은 자식은 아니거든. 혹시 액막이라고 들어 봤어?”

무당집에서나 들어 볼 단어였다. 복잡한 가정사를 말하는 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단어였다. 앞으로 듣게 될 이야기의 괴이함을 예고하듯, 목덜미에 옅은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불안함을 느끼는 래화와 달리, 권이태는 태평했다. 그는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하품했다. 따분하고 지루한 이야기의 서두를 열 듯, 무심한 어조로 말할 뿐이었다.

“내가 그런 역할이었거든. 병약한 형님의 액막이.”

일원 그룹에 내려오는 유전병은 래화도 잘 알고 있었다. 사지에 서서히 마비가 오는 유전병 때문에, 일원 그룹의 사람들은 말년에는 무조건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유전병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경우도 많아서, 일원 그룹은 대대로 손이 귀했다. 재단을 설립하여 유전병에 대해 연구 중이지만, 희귀한 난치병인지라 수십 년을 연구해도 아직 치료법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리고 권이태의 형, 권현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바로 병증이 나타났다. 현대 의학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으나, 권현을 고칠 수는 없었다.

아들을 치료할 방도를 찾아 헤매던 부부는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고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대통령을 세 번이나 맞췄다는 영험한 무당은 굿판에서 닭 피를 뿌리며 말했다.

“용신께서 노하셨으니, 바깥에서 액막이를 얻어 와야겠구나!”

일원을 보살피던 용신이 노하여 유전병을 내린 것이며, 용이 내리는 재액을 막으려면 액막이 자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권익문은 차민영과 논의한 끝에, 소중한 아들을 살리고자 액막이 자식을 얻기로 했다. 그는 젊고 건강하며, 지성과 미모를 갖췄으면서도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여자들을 엄선해 인공 수정을 시켰다.

권익문의 유전병 또한 상당히 진행된지라, 인공 수정은 쉽지 않았다. 수많은 시도 끝에 간신히 한 번의 성공을 거뒀고, 그렇게 태어난 존재가 권이태였다.

뒤늦게 모성이 일었는지, 권이태의 친모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도망쳤다. 하지만 5년을 도망친 끝에 결국 붙잡혀 버렸다.

그 뒤로 친모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고, 권이태는 5살의 나이로 일원 일가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권이태를 데려온 뒤부터 권현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우연의 일치에 불과했으나, 미신에 빠진 이들에게는 한층 더 굳건한 믿음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권이태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아, 형 몸 상태가 좋아진 거 말고도 사건이 하나 더 있긴 했어.”

래화는 입을 열었다. 목이 메어서 곧바로 말하지 못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뒤늦게 물었다.

“……뭔데.”

“내가 형 대신 납치를 당했거든.”

진짜 액막이 같지, 하면서 권이태가 히죽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