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77화 (77/132)

77화

“한 달쯤 납치범들한테 잡혀 있었는데 도대체 구해 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그래서 혼자 탈출했지.”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끔찍한 과거를 되짚는 목소리는 한가로웠다.

“그때 여름이라서……. 처맞는 거는 그냥저냥 버틸 만했는데, 더워서 죽는 줄.”

으 하고 진저리 치는 시늉을 해 보인 권이태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또 뭐가 있나 생각하며 하나씩 늘어놓았다.

“뭐어, 그거 말고는 그냥 무난했던 것 같은데. 밥 안 주고, 때리고, 욕하고? 이런 건 클래식이잖아.”

꽃잎이 다 떨어져 홀쭉해진 장미를 건들건들 흔들다가 말했다.

“아, 저택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이라서 벌레 새끼라고 불렸는데, 완전 웃기지? 딱 순진한 도련님이 할 만한 소리잖아.”

권현이 병원이랑 집, 학교만 왔다 갔다 해서 순진했다며 킥킥 웃어 댔다. 마치 재밌는 무용담을 말하듯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듣던 래화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권이태가 재깍 말을 멈추곤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래화를 살폈다. 그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재미없어? 이제 다른 얘기 할까.”

속에서 불이 치솟았다. 입을 열면 불꽃을 뿜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래화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원래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하는 법이었다.

다행히 호흡이 효과가 있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아냐. 흥미로웠어. 다음에 또 말해 줘. 네가 형 죽인 이야기도 궁금해.”

마음 같아선 오늘 죄다 털어놓으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할 일이 생겼다. 래화는 손을 뻗어 권이태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총 가져왔어?”

“만날 들고 다니지.”

“나 줘 봐.”

“왜?”

눈썹을 치켜세우는 그에게 더없이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차민영 쏴 버리게.”

나름 계획이 있었다. 일단 차민영부터 쏘고, 그다음엔 권익문을 쏠 것이었다. 실제로 총을 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쏘면 괜찮을 터였다.

권현은 죽었으니까 어쩔 수 없고……. 아쉬운 대로 무덤이라도 찾아갈까 진지하게 고민되긴 했다.

“빨리 총 내놔.”

래화는 손을 쭉 펼쳐서 그의 앞에 디밀었다. 권이태는 래화의 손을 쳐다보았다. 햇빛을 받아 새하얀 손을 얼마간 보다가, 밝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가 갑자기 래화가 내민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쪼그리고 앉았던지라, 몸의 중심이 쉽게 기울어졌다. 엇 하는 사이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권이태는 래화를 가볍게 받아 안고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래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살갗에 입술이 닿았다. 피부 위를 누르는 입술이 짓궂게 속삭였다.

“나 지금 존나 설레, 누나.”

래화는 그의 이마를 밀어 냈다. 권이태가 우는 시늉을 하며 밀려났다. 자꾸 장난치는 그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나 지금 엄청 진지해.”

헛소리 그만하고 총이나 내놓으라고 하자, 권이태가 연상의 화끈함에 정신 못 차리겠다며 낄낄거렸다.

“누나가 화내 주니까 기분 꽤 괜찮은데…….”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래화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한참 얌전하게 래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던 그가 불쑥 말했다.

“키스하자.”

“……갑자기?”

“야외에서 섹스하자고 할 순 없잖아.”

훤한 대낮부터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1절로 끝낼 권이태가 아니었다. 그는 연이어 2절, 3절까지 던져 댔다.

“누나는 섹스하고 싶어?”

“뭐?”

“난 야외 취향 아닌데, 원하면 내가 맞춰 볼게.”

순식간에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되어 버린 래화는 그의 뒷머리를 붙잡았다. 결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권이태를 노려보았다.

“키스나 해, 또라이야.”

웃느라 정신없는 이에게 입술을 들이박았다. 이가 부딪힐 뻔했으나, 그가 고개를 틀어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권이태는 웃음 섞인 신음을 흘리며 능숙하게 혀를 얽어 왔다. 침입자는 입 안을 헤집으며 말했다.

“자기가 나보다 더 또라이라니까.”

진짜 너무 심한 욕이었다. 래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키스했다. 가볍게 쪽쪽 소리 내어 입 맞춘 후에는, 둘이서 누가 더 또라이인가를 놓고 아웅다웅했다.

얼마간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침묵이 찾아왔다. 여태껏 인지하지 못했던 주변의 소음들이 스르륵 밀려왔다.

어디선가 때 이른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못 차리고 일찍 깨어난 매미의 구애 활동을 듣다가 말했다.

“이거 참매미야.”

“어떻게 알아.”

“울음소리가 다르거든. 말매미는 시끄러워.”

“그것도 TV에서 봤어?”

“응.”

흘금 권이태를 살폈다. 그는 래화가 육식을 한다는 눈덧신토끼를 알려 줬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놀려 먹고 싶은 걸 꾹 참는 표정이었다. 래화는 종에 따른 매미 울음소리의 차이를 설명하려다가 관두었다.

매미 소리를 들으며 둘이서 조용히 붙어 있었다. 살랑이며 불어오는 초여름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이 권이태의 머리카락 위에 올라앉았다. 래화는 나뭇잎을 살며시 털어 주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그를 위한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한 말들을 촘촘한 체로 곱게 걸러 내고 나니, 남은 게 없었다. 결국 입에서 나온 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단순한 말이었다.

“여름 싫겠다.”

이제 여름의 초입이었다. 곧 찾아올 무더위가 걱정되었다. 래화는 우물거리다 당연한 소리를 했다.

“집에 에어컨 많이 틀어 놓자.”

“그래.”

권이태가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여름……. 엄청 싫지는 않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래화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은 꽃만 보아도 벌벌 떨었다. 이정환이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움찔 쭈그러들었다.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권이태 또한 분명히 여름이나 더위에 트라우마가 생겼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러면 혐오스러운 기억도 버틸 만하지.”

나직하게 말하던 권이태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커다란 손이 래화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래화는 제가 이를 악물고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 괜찮은데, 자기야.”

래화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이 말했다.

“하나도 안 괜찮잖아.”

속이 자꾸 뜨거워지고 무언가 울컥울컥 치솟았다.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남자가 너무 바보 같아서 화가 났다.

하지만 권이태에게 화내 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건 누구보다 래화가 잘 알았다.

혼자 성질이 받쳐서 끙끙거리는 동안, 권이태는 남의 속도 모르고 웃기만 했다.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한 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래화는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주워다가 꽃송이로 열심히 권이태를 두들겨 팼다. 꽃송이에 얻어맞으며 숨넘어갈 듯이 웃던 그가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덥다, 자기야. 그만 집 가자.”

슈미트가 앞에 차 대 놓고 기다리고 있다며, 자연스럽게 래화의 손을 잡고 걸었다.

정원을 빠져나가는 동안, 권이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제 뒤의 저택에는 시선 한 점 주지 않고 앞만 보았다. 래화만이 저택을 잠깐 뒤돌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통유리창 너머의 주방을 보는 순간, 래화는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권이태의 인생에 나쁜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에게 좋은 일만이 가득하기를, 하여 항상 웃을 수 있기를 원했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권이태가 여태 저에게 베풀어 준 호의를 생각한다면, 그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래화의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심장을 파고드는 열감을 직감하는 순간, 피부에 물방울이 닿았다. 권이태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비 오네.”

햇빛이 화창한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기습하듯 쏟아진 여우비는 피할 새가 없었다. 깨달은 순간 이미 온몸을 흠뻑 적셔 버렸다. 속절없이 그대로 맞으며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권이태가 손을 쭉 펼쳐서 래화의 머리 위를 가려 주었다. 그는 멍한 눈을 한 래화를 보더니 의아히 물었다.

“왜 그래?”

설마 내가…….

“다리 저려? 안아 줘?”

래화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도 움직일 생각을 않자, 권이태는 래화를 훌쩍 안아 들었다.

“일단 차에 들어가서 얘기해. 더 젖기 전에.”

그는 빗방울을 맞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래화는 넋이 나간 채 그의 품에서 가만히 늘어졌다. 날벼락 같은 결론 하나가 머릿속에 번쩍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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