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78화 (78/132)

78화

식칼이 도마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채소를 써는 손길은 차분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요리 시간이었다.

래화의 머릿속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치는 중이었다. 아마 래화가 조금이라도 요리에 서툴렀다면, 진즉 손이 베이거나 뭘 엎지르거나 했을 터였다.

내가 권이태를 좋아한다고?

진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래화는 당근을 썰며 새로운 가설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했다. 그러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파드득 놀랐다.

“와, 맛있는 냄새.”

트레이닝 반바지만 입은 권이태가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들어섰다. 간단하게 운동을 하고 온 모양인지, 근육들이 평소보다 화가 나 있었다.

“갈비찜 만드는 중이야.”

고랑이 패인 복근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태연한 척 물었다.

“갈비찜 좋아해?”

“으음.”

권이태는 잠시 고민하듯 짧은 소리를 흘리다가 이내 씩 웃었다.

“네가 해 주면 좋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약간 달짝지근하게 만들어 주면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잘못된 메뉴 선정을 아쉬워하며 물었다.

“싫으면 다른 거 해 줄까?”

아직 재료 손질 중이니, 얼마든지 메뉴를 바꿀 수 있었다. 래화는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를 떠올렸다.

빠르게 만들 수 있으면서, 아주 맛이 좋고, 보기에도 훌륭한 음식이 뭐가 있나 고민하는데, 권이태가 눈썹을 찌푸렸다.

“귀찮게 왜. 그냥 갈비찜 해 줘. 나도 오랜만에 먹고 싶어.”

“알았어.”

래화는 순순히 답하곤 다시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말에 금방 당근 썰기를 멈추게 되었다.

“오늘 왜 이렇게 친절해?”

“뭐가?”

“평소 같으면 칼 들고 주는 대로 먹으라고 했을 거 아냐.”

“…….”

확실히 제가 할 법한 대사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라서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그는 래화가 옆에 놓아둔 알밤 그릇을 턱짓했다.

“이거 내가 껍질 깔까?”

“응? 어어.”

나사 빠진 로봇처럼 삐꺽거리며 대답하자, 권이태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래화, 너…….”

그가 래화에게 성큼 다가섰다. 키가 큰 탓에 주방의 조명을 다 가려 버려서 어둑하게 그림자가 졌다. 불쑥 들이민 얼굴에 래화는 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이 래화를 스윽 훑었다. 머릿속에 감춘 생각들을 죄다 알아낼 듯한 눈빛이었다. 래화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턱을 붙들고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다시 시선을 마주하게끔 한 권이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취조하듯 말했다.

“나한테 뭐 잘못했지.”

거의 확신하는 목소리였다. 권이태는 자신이 생각하는 증거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이렇게 손 많이 가는 호화 고기반찬을 해 줄 리가 없는데. 반찬 투정해도 화 안 내고.”

“잘못한 거 없는데.”

래화는 곧바로 잡아뗐다. 권이태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보았으나, 끝까지 모른 체했다. 사실 잘못을 한 건 없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냥 제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혼란스러워서 그럴 뿐이었다. 래화가 도마로 시선을 돌리자, 권이태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접어 웃더니 알밤을 한가득 들고 식탁에 앉았다. 상체 탈의를 한 근육질 남자가 작은 칼을 들고 밤껍질을 까는 모습은 무척 자극적이었다.

래화는 억지로 눈을 떼어 냈다. 아까는 온갖 생각에 번잡스러워 요리에 집중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등 뒤의 남자에게 신경이 쓰여서 죽을 맛이었다.

양념장을 만들다가 간장 통을 들이부을 뻔하기도 하고, 무를 둥글둥글하게 깎다가 너무 깎아서 조그만 동그라미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어찌저찌 용케 요리를 이어 가는 동안, 래화는 틈틈이 권이태를 살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는 평소와 같았다. 달라진 것은 래화뿐이었다. 래화는 냄비에 핏물 뺀 고기를 담고 양념장을 부으며 생각했다.

진짜 내가 쟤를 좋아한다고?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안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와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 볼수록,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권이태는 항상 다정했다.

남들한테야 안 그런 것 같지만, 래화에게는 언제나 다정하게 굴었다. 짓궂게 굴면서도 세심히 래화를 살피고 챙겨 주었다.

맑은 하늘에 쏟아지는 여우비처럼 예상치 못하게 찾아든 이는 래화의 인생을 흠뻑 적셔 놓았다.

여태 스스로를 지키느라 급급했던 래화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아볼 만큼…….

이게 좋아하는 감정이란 건가.

래화는 여태 자신이 미디어에서 보아 왔던 사랑의 정의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물론 권이태를 볼 때마다 조금 두근거리고, 보이지 않으면 약간 신경 쓰이고, 잠들기 전에는 잠깐 생각나긴 하지만, 이걸 ‘좋아함’이라고 땅땅 결론 내리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싶었다.

뭔가 좀 더 엄청난 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최소한 귓가에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거나, 아니면 후광이 샤아아 하고 내리쬔다거나,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자기야.”

“…….”

“래화야.”

“…….”

생각에 빠져 있던 래화는 권이태가 바로 옆에 다가오고 나서야 정신 차렸다. 냄비 뚜껑이 덜그럭거리며 양념 소스를 밖으로 토해 내고 있었다.

권이태는 말없이 불을 낮추고, 래화의 손에서 칼을 뺏었다. 그리고 래화를 답삭 들어다가 자신이 앉아 있던 식탁 의자에 앉혔다.

“이제 이것만 다듬으면 끝 아냐? 남은 건 내가 할 테니까 앉아 있어.”

어어 하는 사이 권이태는 자신이 껍질 까 놓은 밤을 동그랗게 다듬었다. 래화가 손톱만 하게 깎아 놓은 재료들을 구석에 밀어 놓고, 당근과 무도 정상적인 크기로 썰어 냈다.

“넌 작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전에도 나한테 고등어 미니 무조림 만들어 줬잖아.”

그건 권이태가 누드모델 운운한 탓에 열받아서 무를 너무 작게 썰어 버린 것이었다. 사실상 지금도 권이태 때문에 채소들이 미니가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긴 했다.

권이태가 바지런히 칼질하는 동안, 래화는 슬그머니 핸드폰을 들고 와 인터넷을 켰다. 메인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박힌 이래화 특집 기사를 무시하고, 검색창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다른 사람 좋아할 때 증상]

검색을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병도 아닌데 증상이라고 검색하는 건 틀린 듯했다. 적절한 단어를 고심하는데, 손질을 끝낸 권이태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래화는 얼른 핸드폰을 엎어 놓았다. 권이태는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엎어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래화에게 시선을 옮겼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메시지.”

“누구한테.”

“친구.”

“자기 친구 없잖아.”

“……있어.”

“뭐, 심심이?”

좋아하면 그 사람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다던데, 그건 아닌 듯했다. 래화는 권이태를 힘껏 째려보았다. 피식 웃은 그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오늘 왜 그래.”

“무슨 소리야.”

“너 오늘 이상하다고.”

쟤는 왜 저렇게 눈치가 빠르지?

래화는 자신이 누가 봐도 수상하게 행동했단 사실은 까맣게 잊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왜 이상하게 구는지 설명해 줘야 했다.

“안 이상하고 멀쩡한데.”

말하기 곤란한 이유를 언급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잡아뗐지만, 갈비찜이 다 익으려면 아직 최소 사십 분은 더 걸렸다. 그동안 꼼짝없이 취조당하게 생긴 래화는 속으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자기야, 지금 존나 수상하니까 그냥 말하지?”

심지어 권이태는 이제 래화가 사고 친 게 분명하다고 거의 확신하는 중이었다. 날카로운 질문이 연이었다. 전부 래화가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었다.

궁지에 몰려 허우적거리던 래화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반쯤 진실을 말해 버리고 말았다.

“요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그래.”

말하자마자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권이태는 턱에 손을 받치더니, 아주 뻔뻔스럽게 히죽 웃었다.

“나?”

그 모습을 보자마자 속에서 반발심이 치밀었다. 래화는 평생 쓸 연기력을 모두 끌어다가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너 아닌데.”

시선이 부닥쳤다. 진실을 가늠하는 듯한 검은 눈동자 앞에서 래화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권이태가 그으래, 하고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래화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솔직히 래화가 생각해도 방금 자신의 연기력은 영화제 대상감이었다. 무사히 넘어갔구나 싶어서 안심하던 차였다. 말없이 지긋하게 래화를 바라보던 그가 되물었다.

“왜?”

“……어?”

권이태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얄궂게 웃었다.

“나 말고 신경 쓰이는 게 왜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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