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지극히 뻔뻔스러운 발언이었다. 남들은 부끄러워서 입에 올리지도 못할 말인데, 권이태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발언하는 이가 당당하니 래화도 순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잠깐 휘말렸던 래화는 뒤늦게 정신 차리고 말했다.
“너 말고도 신경 쓰이는 게 있을 수도 있지.”
말하면서도 너무 당연한 소리라서 이걸 말로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꼬투리를 잡은 권이태는 래화를 열심히 괴롭혀 댔다.
“아하. 그래서 나는 신경도 안 쓰인다?”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이상하게 꼬지 마.”
래화가 끝까지 모른 체하자, 권이태는 턱을 뒤로 젖혔다.
“무슨 일인지나 말해 봐.”
“넌 모르는 일이야.”
“내가?”
짧게 헛웃음 친 그가 눈매를 가늘게 접어 웃었다.
“뭔지만 말해 주면 오늘 안에 자기가 모르는 것까지 다 알아낼 수 있어.”
허세를 부리지 않은 담백한 진실이라 더 무서웠다. 래화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섣부르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권이태가 갑자기 목소리를 착 내리깔았다.
“고객님.”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들겼다.
“제가 고객님 경호 제대로 하려면 기본적인 신변 정보는 알아야죠.”
“그러니까, 그게.”
“집안일은 아닐 테고. 방송국?”
대산 건설은 최근 권이태가 예의 주시하는 중인지라, 그와 관련된 일들은 모를 수가 없었다.
행동반경이 넓지 않은 래화였다. 그나마 권이태의 시야에서 떨어진 곳이 방송국이라 저리 말하는 듯한데…….
완전히 헛짚었다는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어서, 괜히 식탁에서 일어나 냄비 뚜껑을 열고 갈비찜을 뒤적거렸다. 등 뒤에 끈질긴 시선이 달라붙었으나 계속 모른 척했다.
이거 어떡하지.
벗어날 방법을 열심히 고민하는데, 권이태가 재차 물어 왔다.
“사람은 아니지?”
“……어.”
한 박자 늦은 대답은 부자연스러웠다. 등 뒤가 조용해졌다. 서늘한 침묵에 래화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곤 살며시 돌아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래화를 빤히 응시하는 중이었다. 표정이 지워진 얼굴이 싸늘했다. 그러나 래화와 눈이 마주치자, 권이태는 금세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자기야, 우리 불륜 금지잖아.”
가벼운 어조로 농담하듯 던지는 말속에서 뼈가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권이태는 짐짓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계약 기간 중에는 서로 성실하게 신의 지켜 줬으면 좋겠는데.”
그 순간 래화는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계약 끝나고 나서는?”
의식을 거치지 않고 나온 말이었다. 툭 떨어진 질문에 권이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갈비찜 끓는 소리만이 고요한 부엌을 메웠다.
래화는 대답하지 않는 그를 보며 기분이 이상해졌다. 질척한 감정이 마음을 덮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몰랐으나 금방 알 수 있었다.
실망스러움이었다. 무엇에 대한 실망인지 생각해 보려는 찰나, 핸드폰이 진동했다. 다소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전화를 받은 권이태가 얼굴을 찌푸렸다.
“슈미트가 그림 가져왔대.”
뤼진에게 대여하기로 한 래화의 그림이었다. 슈미트가 직접 공항까지 나가서 받아 오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지금 오시는 거지? 같이 식사하자고 하면 되겠다.”
곤란한 화제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래화가 슈미트를 반기자, 권이태는 픽 웃었다. 네가 뭔 생각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래. 같이 밥 먹으면 좋지.”
의미심장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취조는 일단락되었다.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기분은 여전히 얼룩덜룩했다. 지워지지 않는 기묘한 감정이 마음에 거뭇하게 달라붙었다.
여태껏 인지하지 못했던 문제가 선명한 모양새로 떠올랐다. 래화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계약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
마카오 재벌, 뤼진은 유일하게 남겨진 래화의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대여해 달라는 요청에 뤼진은 무척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여료로 그림을 하나 그려 주겠다는 조건도 흔쾌히 수락했다. 심지어 대여료로는 너무 넘치는 조건이니, 그림값도 추가로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뤼진은 한국에서 래화의 전시회가 열리면 반드시 참석하고 싶다고 넌지시 전해오기도 했다.
그녀의 호감 표시가 어찌나 열렬한지, 마치 모방 화가가 아닌 류설연을 대하는 듯했다. 래화로서는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래화는 화실에서 뤼진에게 받아 온 그림을 확인했다. 이중, 삼중으로 꼼꼼하게 보호된 포장지를 걷어 내자, 큼직한 20호 캔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이정환이 래화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이었다.
하얀 캔버스에는 채도를 달리한 수백 개의 각기 다른 녹색이 빼곡하게 불규칙적으로 붓질되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표현한 그림은 어딘가 기괴한 분위기가 감돌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기묘한 숲속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부잣집 아가씨가 그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음침한 그림이었다. 래화는 캔버스 오른쪽 아래에 자그맣게 적어 넣은 제 서명을 가만히 보았다.
류설연도, 래화도, 겉보기와는 다르게 보는 이들이 깜짝 놀랄 만큼 뒤틀린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곤 했다.
특히 류설연은 평소에 밝고 화려한 걸 좋아하는지라, 그녀의 화풍이 의외롭다며 여러 번 화제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시종일관 음침한 그림만 그려 왔던 래화와 다르게, 류설연의 작품 중에서는 몇몇 밝은 분위기를 가진 그림이 있기는 했다.
그녀의 대표작 <여름 햇빛 아래> 같은 그림이 그 예시였다. 래화도 한때는 밝은 그림을 그려 볼까 했지만,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래화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언제나 어둡고 기이했다.
새로운 그림 모델로 권이태가 마음에 쏙 들어찬 이유도 단순했다. 그에게서 래화가 좋아하는 어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사람에게서 영감을 얻은 일은 권이태가 처음이었다. 어두운 밤바다 같은 눈동자에 숨겨진 것을 죄다 끄집어내 샅샅이 파헤치고픈 욕구를 느낀 적도…….
그래서 처음에는 뮤즈로서 좋아하는 마음을 이성적인 호감으로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되냐는 물음에 권이태는 답하지 않았다. 래화가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몇 개월 후면 관계가 자동으로 끝나게 생긴 것이다. 래화는 자신이 그와의 미래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권이태를 붙잡아 둘 수 있을까.그가 가난했다면 거액을 주고 종신 계약 같은 걸 제안해 봤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상 부족할 게 없을 일원 그룹 후계자님을 붙잡아 둘 방도가 없었다.
난제를 놓고 혼자 이리저리 고민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당연히 권이태겠거니 했건만, 의외의 인물이 화실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슈미트가 정중하게 화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래화가 포장을 뜯어 이젤 위에 얹어 놓은 그림을 보고 나직이 감탄했다.
“이게 래화 님이 그리셨던 그림이군요. 그리고 이쪽이 새로이 그리는 작품인 거지요?”
“네, 맞아요.”
슈미트는 미술관에 온 사람처럼 진지하게 래화의 그림을 감상했다. 유화로 얼기설기 칠해 놓은 미완성의 그림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그리고 슈미트가 감상 시간을 가지는 동안, 래화는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살폈다. 오늘 슈미트의 태도가 이상한 탓이었다.
일단 래화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은은하게 적의가 깔린 시선이 아닌, 약간의 신뢰와 호감이 담긴 눈으로 저를 보는데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오늘 식사 초대에 순순하게 응한 것도 수상했다. 과거였다면 빠르게 용건만 끝내고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화실에 찾아오기까지. 마치 래화와 친분을 쌓아 보고 싶다는 행동 같지 않은가.
과장 조금 보태서 껍데기만 슈미트고, 속 알맹이는 다른 사람으로 갈아 끼운 느낌이었다.
“예술 쪽에는 문외한이지만, 정말 훌륭한 그림입니다.”
그가 정중한 칭찬을 건넸을 때, 래화는 그만 얼떨결에 물어 버렸다.
“왜 이러세요……?”
당신 원래 안 이랬지 않느냐, 뭐 잘못 먹었냐, 아까 먹은 갈비찜이 상한 건 아닐 텐데 등등의 말을 한마디로 함축한 질문이었다.
당혹스러움이 그득 배어나는 질문에 슈미트는 모호한 미소만 지었다. 그는 잠시 핸드폰을 체크하더니, 문을 흘긋 돌아보았다. 단단히 닫혀있는 문을 확인한 그가 래화를 응시했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래화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되레 이상한 소리를 물어보았다.
“래화 님은 본인의 기억이 온전하다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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