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하 키치웨딩-80화 (80/132)

80화

저를 비정상인으로 취급하는 이들은 지긋지긋하게 만나 왔다. 수없이 반복된 일이었으나, 래화는 미묘한 낯섦을 느꼈다. 슈미트를 가만히 쳐다보다 되물었다.

“그날을 기억하는지 묻고 싶으신 건가요?”

류설연이 자살했던 날에 대한 기억은 당시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 받아 온 질문이었다.

그에 관해선 래화가 답해 줄 만한 게 없었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탓에, 그날의 기억은 제대로 된 게 없었다. 토막 난 것처럼 드문드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슈미트가 원하는 것은 그날이 아니었다. 그는 이때껏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던 기억을 요구했다.

“아니요. 저는 래화 님이 미성년자일 때의 기억이 온전한지.”

슈미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내 또렷하게 말했다.

“류설연이 사망하기 전까지의 기억이 완벽하게 존재하는가를 알고 싶습니다.”

당연히 모든 기억이 존재했다. 성실하게 학교 다니고 그림을 그리던 일상은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했다.

그런데 왜 질문을 받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일까.

“…….”

래화는 입술을 벌렸다. 가라앉았던 흙탕물이 뿌옇게 일어나듯, 던져진 질문 하나에 머리가 온통 혼란스러워졌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옅은 숨결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현기증 때문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시야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화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뒷걸음질 쳤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던 몸이 강하게 붙들렸다.

“이래화.”

꿈꾸듯 흐릿한 눈으로 권이태를 보았다. 그는 래화의 등을 쓸어 주었다.

“숨 쉬어. 그래, 천천히…….”

길게 쓰다듬어 주는 너른 손길을 따라 조금씩 호흡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래화는 제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음을 깨달았다.

잠시 정신 못 차리고 멍하니 기댄 사이, 권이태가 차갑게 말했다.

“변명해 봐.”

냉랭한 명령이 향한 곳은 슈미트였다. 래화는 고개를 살짝 돌려 슈미트를 확인했다. 그는 래화의 이상 반응을 보고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궁금한 것을 질문했을 뿐입니다.”

“아, 그러세요? 나도 대표님 처맞는 꼴 궁금하면 한 대 갈겨도 되나?”

비아냥거림이 심상치 않았다. 여기서 한 끗만 틀어지면 정말 주먹질할 기세였다. 래화는 권이태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하지 마.”

머리가 지끈거려서 제대로 말하기가 힘들었다. 뭉그러진 발음으로 겨우 말을 뱉었다.

“밖으로 나갈래…….”

권이태는 곧장 래화를 안고 거실로 나갔다. 층고가 높은 탁 트인 공간으로 나오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류설연이나 이정환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도 아닌데,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침실 갈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래화를 옮겨 주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래화의 침실 대신 굳이 2층으로 올라가서, 제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까지 폭 덮어 주었다.

래화는 한참 침실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권이태는 옆에 걸터앉아서 얌전하게 기다려 주었다. 긴 침묵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

아까부터 저만을 바라보던 이에게 눈을 맞추고 물었다.

“기억 이상한 거야?”

슈미트가 의미 없이 무례한 질문을 던질 이는 아니었다. 그는 래화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너 멀쩡해.”

하지만 권이태는 래화의 질문에 부정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이마 위를 꾹 눌렀다. 하얀 피부 위에 손자국이 찍힐 만큼 꾹 눌러 놓고서 말했다.

“존나 정상이십니다, 이래화 님.”

래화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확신을 품은 뒤였다.

뭔가 있긴 있구나.

굳이 권이태에게 캐묻진 않았다. 그에게 물어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뻔히 보였다. 말해 줄 수 있다면 진즉 말했으리라. 대신 래화는 제가 덮은 이불을 손으로 살짝 들췄다.

“잠깐 누워 봐.”

“자기야, 아직 해가 훤한데…….”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그는 히죽 웃으면서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길게 눕더니, 남는 팔 하나는 당연하다는 듯 래화의 허리 위에 턱 얹어 놓았다.

래화는 그의 팔을 밀어 내지 않았다. 대신 서로 마주 보게 꾸물꾸물 움직여 몸을 돌렸다.

워낙 덩치가 커서 그런지, 옆에 놔두기만 해도 뭔가 듬직한 기분이 들었다. 든든한 안정감을 느끼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권이태가 내리깐 눈으로 래화를 보며 웃었다.

“갈비찜 맛있던데.”

“너도 싫어한다더니 엄청 잘 먹더라.”

“네가 만들어 준 거니까.”

당연하다는 대꾸에 래화의 귓불이 붉어졌다. 하여간 가만 보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진짜 선수였다.

래화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곤, 귓불에 올라온 열기가 번지지 않도록 숨을 골랐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일부러 일상적인 이야기를 꺼내어 래화에게 드리워진 음울한 먹구름을 흩어 주는 남자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곤 했다. 시뻘겋게 녹슨 쇳덩이처럼 래화를 짓누르는 과거조차도 사뿐한 깃털로 변해 흩어졌다.

기억에 공백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훨씬 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원래 같으면 방 안에 틀어박혀 명상 음악만 내리 세 시간쯤 들어 댔을 텐데 말이다.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어설프게 등허리를 토닥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래화는 고개만 빼꼼 들어 올렸다.

권이태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래화를 토닥대고 있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티가 여실히 느껴지는 어색한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자 권이태는 손가락으로 래화의 볼을 쿡 찔렀다.

“그만 웃고 한숨 자.”

아까 래화가 그러했듯, 그의 얼굴에도 붉은 기가 어른거렸다. 제 서투른 위로가 조금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웃음을 멈추지 못하니, 권이태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 래화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뒤이은 말에 래화는 곧장 웃음을 뚝 그쳤다.

“그만 웃으라니까. 계속 웃으면 꼴려. 자지 선다고.”

실제로 아랫배 쪽에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됐는지, 벌써 제법 단단해진 채였다. 권이태가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대낮부터 한판 뜰까, 자기야?”

“……미안.”

래화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사과했다. 그가 토닥대던 손을 눈 위에 덮었다. 안온한 어둠이 찾아오자 거짓말처럼 피곤이 밀려왔다. 안전한 둥지를 찾은 몸은 휴식을 요구했다.

이마 위에 떨어지는 작은 입맞춤을 느끼며, 래화는 스르륵 잠에 빠졌다.

***

정신적인 피로가 몸으로도 전해졌는지, 이래화는 금방 기절하듯 잠들었다.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화실로 내려갔다.

슈미트는 여전히 화실에서 혼자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뭇 진지한 눈빛이었다. 화를 내려다 말고, 권이태는 짧게 혀를 찼다.

제 본명을 감추고 전쟁 청부업을 하고 있지만, 슈미트는 본래 독일의 전통 있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고상한 취향을 가진지라 예술적인 안목도 높은 편이었다. 막눈인 권이태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을 그는 이래화의 그림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그림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꼴을 보니 사납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권이태는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에 대해선 물어보지 말라고 했잖아. 분명 트라우마랑 연결되었을 거라고.”

“태이.”

슈미트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권이태를 보았다.

“당신은 그녀에게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 정도 부담은 줘도 괜찮을 텐데요.”

“걔가 인생 걸라고 해서 걸었어? 아니잖아. 내 멋대로 저지른 짓인데 강요하지 말고 내버려 둬. 가만히 있어도 힘든 애를…….”

“감싸고 보호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죠. 나는 그녀가 충분히 버텨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택에서 봤던 바에 따르면 말이에요, 하고 슈미트가 덧붙였다. 이래화가 저질렀던 예또 짓을 떠올린 권이태는 할 말이 없어졌다.

누가 일원 그룹의 사모한테 냅다 얼음물을 부어 버릴 생각을 하겠는가. 그건 이래화만이 할 수 있는 또라이 짓이었다.

말문이 막힌 사이, 슈미트가 화실 구석에 놓인 찢어진 캔버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도 래화 님의 작품이죠?”

“어. 캔버스 찢어졌다고 버린다는데 내가 놔두자고 했어.”

유명해지면 <미완성>, <무제>, 뭐 이런 제목을 붙여서 현대 미술 작품으로 팔아먹자고 이래화를 살살 꼬드겨 남겨 둔 것이었다.

“뤼진이 왜 래화 님을 극진하게 대우하는지 알 듯합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감정 표현에 인색한 슈미트의 진심 어린 감탄에 권이태는 제가 그린 양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슈미트는 희미하게 미소하며 본론을 꺼냈다.

“제이가 최근 이정환의 집에서 근무하다 은퇴한 이를 만나고 왔습니다. 메이가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약간의 수고로움을 들여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 냈는데.”

여기서 약간의 수고로움이란 적당한 회유와 협박이 어우러진 행위를 뜻했다. 슈미트는 화실의 천장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가 류설연의 생전 모든 것을 기록해 두었다고 하더군요. 류설연 본인도 모르게, 감시 카메라로 집안 전체를 찍어서.”

“그러니까 지금…….”

권이태는 눈을 가느스름히 좁히며 슈미트가 하려는 말을 대신 했다.

“이래화의 기억을 대신할 기록이 존재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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