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화 (1/250)

1화

아무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았다.

옅은 금발에 푸른 눈. 하인 신분에서 보기 드문 외모였다.

하지만, 제대로 씻지 못해 떡지고 부스스한 머리에 화려함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눈은 귀족을 쳐다볼 여력이 없었다.

나는 하인들의 불장난 사이에서 태어난 참사 같은 아이였다.

부모가 그러했으니 나 또한 자연스레 그들의 신분을 따라 하인이 되었다.

낮은 신분 탓에 내 어리숙한 행동은 모두 죄가 되었다.

귀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서는 안 됐고, 등을 보여서도 안 됐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몸을 말아 급소를 막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나의 재능이 하인의 신분으로 남겨두기엔 너무나도 출중하다는 것을.

가꾸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만개하려고 발악하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5살.

처음으로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작게 열린 창틈 사이로 백작 어르신이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선지는커녕 음표의 개념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머릿속에 들어온 소리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새로운 감각에 완전히 몸을 맡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한 소리들이었다.

10살.

고사리손이 단풍잎 정도 되었을 즘.

나는 집 안 청소를 맡아 음악실 문을 열게 됐다.

피아노.

나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사했던 존재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피아노에 손을 댔다.

뚜껑을 열어 상아로 만든 하얀 건반을 치자 그 자리에서 무언가 자라나 나를 덮치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런 소리의 습격.

신기함과 함께 공포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움직였다.

마치 꽃꽂이를 하듯 알맞게.

본능이 다음 건반을 알려주듯 시선과 손가락이 자연스레 이동했다.

다음에는 이것이, 그다음에는 저것이… 하나둘씩 모인 소리가 그때 들었던 것처럼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해보면 지난번에 들었던 소리를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번 피아노를 퉁탕거리자 은은한 선율이 음악실을 감쌌다.

행복에 겨워 스스로 박수를 치려던 찰나.

“감히 더러운 손으로 집안의 물건을 만지다니!”

소리를 듣고 들어온 백작님의 호통이 방 전체를 울렸다.

그는 나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백작님의 매질은 그가 사용하던 마호가니 지팡이가 부러지고 나서야 끝났다.

나는 그저 피아노가 좋았던 건데.

그 아름다운 선율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서글피 우는 나를 향해 도련님이 다가왔다.

내 재능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도련님은 몰래 나를 음악실에 초대하곤 했다.

“너 배우는 속도가 엄청나구나?”

도련님이 하나를 알려주면, 나는 열을 깨우쳤다.

그분을 통해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다.

오선지와 음표, 마디의 개념을 깨치자 나는 악보만 주어지면 그것을 피아노로 재현해낼 수 있었다.

도리어 이후에는 내가 도련님께 연주의 방향을 알려주는 꼴이 됐다.

언젠가 도련님께서 어떻게 연주를 그리 잘하느냐고 묻자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냥 이렇게 쳐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음악을 느끼고 있었다.

음표와 오선지를 알게 된 후부터는 추상적이었던 머릿속의 이미지가 음표로 정리되어 펼쳐졌다.

잔잔하게 흐르는 오선지의 물결에 음표들이 자유롭게 유영했다.

나는 그저 그 유영하는 음표들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는 것뿐이었다.

그 울림이 모여 마디를 이뤘고, 마디는 모여서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귀족들이 음악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 열 배로 부풀려 되돌려주고, 도리어 귀족이 내 가르침을 받아 화려한 피아노 연주를 선보였음에도.

미천한 신분이란 꼬리표는 무겁게 따라다녔다.

도련님과 달리 다른 귀족들은 무대 위는커녕, 무대 뒤에 남아 있는 것조차 거부했으니까.

주변 하인들은 도련님의 총애를 받는 나를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일부는 질투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나를 향해 묘한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귀족들을 너무 믿지 말게.”

하지만 나는 그 행복감을 함부로 놓치기 싫었다.

비록 나만의 피아노 연주를 보여줄 순 없었지만, 누군가와 음악에 대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환희에 가득 찼으니까.

그렇게 끈질기게 버티고 있어서였을까.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도련님 또래의 귀족 자제분 하나가 나를 향해 부탁을 한 것이다.

“자네. 나 대신에 연주를 해주겠나?”

펄쩍 뛰었다.

제가 어떻게 그리하겠습니까.

귀족 사칭은 곧바로 처형이었다.

드높은 귀족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의 목숨이 순식간에 달아날 수 있었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단두대도 아깝다며 산채로 파묻히리라.

하지만, 미천한 신분에 귀족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죄목이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도련님이 묘책을 선보였다.

“자네임을 들키지 않게 하면 되지 않겠나.”

결국 나는 무대에 올랐다.

나는 연주를 할 때마다 얼굴 전체를 감싸는 가면을 썼고, 피아노를 중심으로 짙은 베일을 둘렀다. 거기에 하얀 가발까지.

가문의 명예를 예술로써 드높이려는 귀족의 대역을 한 것이었다.

베일을 넘어 사람들의 숨소리와 헛기침, 재잘대는 잡담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되는 순간, 나는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내 손이 건반을 훑고 지나가자 베일 너머 소리들이 일제히 멎었다.

느슨하게 감상하던 이들에게 휘몰아치듯 선율을 쏟아냈다.

더욱 화려한 기교를 갈망할 즘이면 낮고 고요한 가락으로 애를 태웠다.

그렇게 끝난 공연의 함성과 축하는 모두 도련님의 친구에게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나는 만족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나의 무대는 순식간에 사교계의 입담을 거쳐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갑작스레 만들어진 트렌드를 포장하는 것에 귀족들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갔다.

인간의 재능을 시기한 신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자 함이라고.

가면을 쓰고, 베일을 두르는 것은 신에게서 연주자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라고 했다.

귀족들은 이를 참 좋은 생각이라고 평했다.

너도나도 사교장 피아노 무대 주변에 베일을 둘렀고, 연주자는 가면에 가발까지 썼다.

연주자는 오로지 음악으로만 봐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니 당연한 일이라고.

하인을 무대로 올리기 위한 거짓은 수많은 귀족들의 말로 인해 살이 붙어 진실처럼 바뀌었다.

현실은 가증스러운 거짓이었지만.

저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하인의 연주에 감탄했다는 것을 알면 귀를 파냈을 테지.

하지만 그들의 허례허식 덕분에 나는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도련님 또래의 귀족들은 빠르게 소문을 접하고 자신의 음악적 소양을 위장하고 싶어 연락을 취했다.

“‘하데스’를 찾네.”

그것은 은어였다.

사신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숨 막히는 피아노 선율을 보여준다는 찬사이자.

퀴네에를 쓰고 모습을 감춰버린 하데스처럼 ‘보이지 않는 자’라는 의미.

정체를 숨겨야 했던 나에게 걸맞은 별명이었다.

나보다 작은 사람을 대신할 때는 먹는 것을 극단적으로 줄여 옷을 끼워 맞췄고, 나보다 큰 사람을 대신할 때는 온몸에 솜을 넣어 몸을 부풀렸다.

나를 향해 직접적으로 찬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 나는 가장 나다움을 느꼈으니까.

언젠가는 유명세에 가면을 벗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만의 피아노 연주를 뽐내며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꿈을 상상하며 매일을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하지만, 미천한 신분으로 꾸는 꿈은 환상에 불과했다.

“미천한 신분으로 유명해지려고 하다니. 분수를 알아야지.”

잊고 있었다.

귀족이란 존재들이 가진 이중성을.

애완동물은 이쁘다며 쓰다듬을지언정, 천한 신분의 손은 옷깃조차 스치는 것에 대노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그날은 독주회라며 마차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프릴이 달린 연미복을 입었다.

평소 맞지 않는 타인의 옷을 입다가 딱 맞는 내 옷을 입었을 때의 쾌감이란.

번들거리는 옷깃이 신기하여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마부라던 사내가 마차 안으로 들어와 칼을 휘둘렀다.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좁은 마차 안에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무슨 짓이오! 나는 연주회를 가야 하오!”

“연주회는 얼어 죽을. 너무 무모했어. 귀족분들의 관심이 많아지면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어야지.”

여러 귀족들의 의뢰를 받아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셋이 알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고 했던가.

너무나 유명해진 나머지 사교장에서 소문처럼 하데스의 이름이 거론된 것이다.

도련님이 애써 만든 베일과 가면에 대한 이야기는 의심하던 자들의 기운에 꺾여버렸다.

그제야 하데스의 도움을 받았던 귀족들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귀족을 사칭한 죄는 나의 단독 범행으로 꾸미면 그만이었다.

자신들도 속았다고 하면 되니까.

하지만, 자신들이 연주했다고 한 것들이 허상으로 밝혀지는 것은 곤란했다.

조금의 오점도 남기기 싫었기에, 더군다나 하인 같은 천한 신분을 귀족들 앞에 세웠다는 큰 잘못을 덮기 위해.

그래서 뜻을 모았다.

서로의 입을 막고, 유일한 증거이자 증인을 없애기로.

푹.

짧은 파열음과 함께 차가운 무언가가 내 가슴을 뚫었다.

입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하지만, 앉아서 피아노만 쳤던 나에게 귀족의 더러운 일을 도맡던 도살자의 힘을 버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나는 그저… 피아노를… 치고 싶었을... 뿐이오…”

점차 흐릿해지는 정신이지만, 마지막으로 꼭 내뱉고 싶었던 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감히 하지 말아야 함에도 피아노에 손을 대고 매질을 당했던 기억, 그럼에도 다시 피아노를 찾았던 나, 기어코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구나.

사라질 듯 기억들이 흘러갔지만, 그것이 후회되진 않았다.

그때 느끼지 못했다면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고, 그 흐름을 즐기고 나눌 수 없었을 테니까.

요정처럼 찾아온 기회를 혼자 누리기 아까웠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그들이 귀족이 아니라 진정 친구인 줄 알았다.

내 재능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여 준 자들.

그랬기에 아까운 마음 없이 그들을 위해 힘을 썼고, 재능을 썼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길래 이런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도살자의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피아노는 무슨. 알량한 재주로 네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 싶었던 거겠지.”

도살자는 귀족처럼 이야기하는 내 말투를 비꼬며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귀족의 용안을 똑바로 봤다는 이유로 발길질을 당했던 과거.

내가 천한 신분임을 망각하고 귀족들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기에.

감히 드높은 천상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 설 생각을 했기에.

그래서 내가 벌을 받는 것이구나.

이제는 그런 알량한 짓 따위 안 할 테니 단지 피아노만 치게 해달라고.

하늘이 있다면 간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 대신 도살자의 서슬 퍼런 칼이 목을 꿰뚫었다.

“별명이 하데스라고 했던가? 저승의 왕은 개뿔. 저승의 문지기 정도면 어울리겠네.”

도살자가 표정 변화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자상에서 터져 나오는 핏줄기.

마차 내부가 내 피로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핏빛 향연이 점차 뿌옇게 흐려졌다.

눈이 제 기능을 잃어가는 것일 테지.

분노와 삶에 대한 욕구로 쿵쾅대던 심장도 이젠 힘을 다한 듯 느리게 뛰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발. 내가 왜…’

나는 아주 작게 남은 힘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무시당하듯, 정신은 끊어졌고 의지는 허무에서 흩어졌다.

무덤조차 남길 수 없었던 하찮은 하인의 죽음.

문득.

수백 년을 흘러 바스라진 누군가의 일대기가 어떤 청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청년의 몸속에 새로운 심장이 자라나듯, 또 다른 박동이 그의 몸을 울렸다.

흘러들어오는 일대기에 보이는 금발 남성의 모습.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청년은 일대기 속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의 검은 눈동자와 미묘하게 닮아있음을 깨달았다.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

신분을 극복할 수 없었던 시대에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던 천재 피아니스트.

이안 로크실트.

청년은 자신이 이안의 환생이라고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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