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화 (2/250)

2화

나는 어느 한 드라마의 대사를 떠올렸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네 번의 생을 살아간다는 이야기.

씨를 뿌리는 생, 뿌린 씨에 물을 주는 생, 자란 씨를 수확하는 생, 수확한 것을 쓰는 생.

그중 나는 몇 번째 생일까.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전생의 기억은 몇 번째 생일까.

“너도 집안의 영광을 이어야지.”

다섯 살배기 아이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큰아버지의 말씀이었다.

한국 최고 오케스트라, 대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이자 수장인 큰아버지, 박현철.

그의 동생이자 나의 아버지, 아시아의 바흐라고 불리는 피아니스트 박수철.

거기에 나의 어머니는 세계에 명성을 떨친 플루티스트 전은희.

그 아래에서 돌연변이가 되지 않기 위해.

내 본능은 나를 향해 음악을 하라고 재촉했다.

어머니의 추천으로 바이올린을 처음 잡았던 날.

가족 친지들은 모두 나에게 신동이라고 박수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또래들이 겨우 장난감 바이올린을 깅깅거릴 나이에 나는 진짜 바이올린으로 기초를 다지고 있었으니까.

역시 그 아버지, 그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다른 악기를 잡아도 음악을 다루는 천재성 하나는 유전됐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안이는 대단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구나!”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쏟아지는 기대감.

어린 나는 그런 기대감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그 사실이 나에게는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부모님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음악계 스타이고, 조부모들 또한 한때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졌으니.

나에게 꽂히는 기대감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저 집안의 아들이면 음악을 잘해야지.’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인 줄 알고 떠들어댔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기에, 나도 그것이 진리인 줄 알았다.

실제로 남들보다 빼어난 바이올린 실력을 가졌고, 사람들의 칭찬에 힘입어 더욱 연습에 몰두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열정에 불씨가 좀처럼 붙지 않았다.

‘나는 왜 바이올린을 시작했지?’

오랫동안 그 생각에 잠겼다.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를 걸쳐서 대부분의 콩쿨에서 1위를 거머쥐었다.

상장과 트로피를 가져오는 나를 향해 부모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단하다고. 수고했다고.

나를 꼬옥 껴안아 주고 토닥여주셨다.

콩쿨들을 제패한 자격으로 음악을 전공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한국대 기악과까지 수석으로 입학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으니까.

내가 가는 길이 자연스러운 것인 줄 알았고, 잘하고 재미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경쟁을 하니 깨달았다.

내 연주에는 내가 없다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음악이 나에게 선사하는 만족감은 없었다.

상장과 트로피마저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한 것 같아 허무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바이올린 활을 잡기 싫었던 때가.

그런데 왜일까.

전생이 떠오른 이후 자꾸 다른 곳으로 눈이 돌아간다.

피아노.

전생이 그렇게 목말라 했던 피아노였다.

나의 고개는 피아노로 향해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열정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바이올린을 연주해도 모자랄… 잠깐.

나 지금 뭐 하다가…

“박이안!”

교수님의 지휘봉이 악보 스탠드를 연신 쳤다.

금속의 떨림에 윽박이 더욱 커져 내 귀로 꽂힌다.

그제야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은 실기 수업 시간이고,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로 인해 정지된 연주 때문에 모두의 시선이 한데 꽂혔다.

“너 뭐야! 왜 가만히 있어!”

분노 섞인 호통이 연이어 떨어졌다.

어서 죄송하다고 하고 다시 바이올린을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멍하게 있는 나를 향해 교수님의 성화가 계속되었지만, 그 소리는 까마득하게 흐려져 있었다.

떠오른 전생에 나는 진정한 연주자의 삶에 대해 곱씹었다.

죽음이 가까워졌음에도 음악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들뜨던 전생에 반해, 바이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는 그 어떠한 박동도 느낄 수 없었다.

오로지 피아노를 바라봤을 때, 뭔가에 끌리듯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마치 이 떨림을 느끼지 못하면 연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듯.

기묘하게 감돌던 생각에 나는 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은 엄숙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사뭇 진지한 표정의 아버지.

아무래도 교수님의 연락을 받으신 듯했다.

영 요즘 강의에서 집중도 하지 못하고, 매번 합주 시간을 망쳐놓는다고.

으레 대학 교수가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 일이 없겠지만, 아버지와 기악 교수님과 가까운 친구라 가능한 일이었다.

“차 교수가 합주할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던데. 무슨 일 있니?”

“그냥 연습이 잘 안돼서요.”

아버지는 알 것이다.

내가 그저 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교수님이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면 내 말을 더욱더 믿지 못하겠지.

짙은 아버지의 눈썹이 오늘따라 더 침울해 보였다.

나는 그 감정이 어떻게 흘러들어오는지 알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세상은 나에게 참 관심이 많았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와 플루티스트의 만남,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갓난쟁이 때부터 바이올린을 잡았다더라.

헤드라인으로 써먹기 좋은 상황에 기자들은 기사를 뽑아댔고,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젖먹이 꼬마에게 쏟았다.

사랑과 관심만 줘도 충분한 아이에게, 세상은 어린 나에게 가혹했다.

일부는 내 재능을 질투라도 하듯, 내가 어떤 결과를 내보이든 비난하기 바빴다.

잘해도 부모 잘 만난 재능충이라 조롱하고, 못하면 부모님 이름에 먹칠한다고 욕하는 사람들.

수없이 기사와 댓글에 난도질당하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였다.

아버지 또한 피아니스트, 음악가로 살아오셨기에.

유명세가 올라가며 언론에서 주무르는 힘을 아실 테지.

아버지는 잠시간 말없이 앞을 응시하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시아의 바흐’.

그 명성을 쌓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슬럼프가 있었는지.

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었는지.

친절하게 아버지는 자신의 일대기를 읊으며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아는 부분은 충분히 도울 수 있다고 맹렬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아버지.

그의 골자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껏 연주했던 악기가 네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괜찮아.”

아버지는 슬럼프를 겪었던 얘기까지 꺼냈다.

그러나 자신은 차근히 나아가자 빛이 보였다고, 그것을 위해 조금 돌아갔지만 포기하진 않았다고 답했다.

마치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내가 똑같은 경험을 겪고 있으리라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지금 나의 처지는 아버지의 예상과 많이 다를 테지.

불가사의한 힘으로 닿은 나의 전생이 피아노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

피아노를 향한 전생의 기억은 찬란한 데 반해,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내 바이올린 실력은 조금의 열정도 들어가지 않은 껍데기 같다고.

모두 진실인데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차근차근 해볼게요.”

차에서 내리기 직전.

힘없이 내뱉은 말에 아버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넓은 잔디 마당을 지나면 있는 하얀색 목조 주택.

2층에 테라스까지 있는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취향이었다.

1층 현관을 지나 2층 내 방으로 향하는 길.

막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무언의 압박감이 복도 끝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마치 지금 당장 들어오라는 듯.

문틈 사이로 햇볕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음악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곳을 향한다.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문을 연 음악실.

음악가 집안의 명성과 걸맞게 완벽한 관리가 되고 있는 수많은 악기들이 있다는 것을 동기들은 부러워했었다.

그리고 방의 중심에는 피아노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나는 피아노를 스윽 매만졌다.

어릴 때 이론을 배우기 위해서 피아노를 여러 번 쳤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완벽함을 추구한 나머지 피아노와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나 또한 반가웠지만, 나보다 다른 누군가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피아노 건반이 드러나자 그 심장은 더욱 빠르고 뜨겁게 박동했다.

전생의 의지가 나를 강하게 눌렀다.

마치 어서 의자에 앉아달라고 요구하듯.

오묘한 기분에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어렸을 때는 너무 넓다고 생각했었는데.

천천히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도미솔.

가장 기본이 되는 계이름들을 누르자 기본적이면서도 경쾌한 화음이 펼쳐나간다.

앉는 것만으로도 들뜨던 전생의 기억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듯 화음 한 번에 환희로 가득 찼다.

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가면이 없으면 앉을 수도 없고, 건반을 몇 번 만졌다는 이유로 심한 매질을 당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은 누구 하나 건반을 만졌다고 나무랄 사람이 없었고, 가면 따위는 필요 없었다.

원한다면 의자에 앉아서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감격한 듯 전생의 기억이 흘러들어와 내 손까지 근질근질했다.

‘어떤 곡을 쳐보지?’

나는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최근 듣거나 연습했던 곡들은 죄다 바이올린 곡이었기에 피아노로 칠 수 있는 곡이 없었다.

머뭇거리던 손이 이내 건반에서 멀어지자 전생의 기억은 안타까움과 함께 보란 듯이 기억을 흘려보냈다.

하인이라는 천한 신분임에도 귀족에게 들킬 것이라는 염려 없이 오로지 자신의 피아노 선율에만 집중했던 기억.

다른 걱정을 떨치고 자신의 피아노 연주에 귀를 기울였기에,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표현법으로 오선지와 음표를 해석했다.

전생의 기억이 나에게 말해주는 듯했다.

‘해봐. 괜찮아.’

묘한 감각에 나는 다시금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건반의 차가운 느낌이 손끝을 타고 신경을 건드렸다.

뒤이어 머릿속에 이름 모를 곡의 악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곡인지 모르겠으나, 머릿속에 빛무리가 일듯 악보가 떠올랐다.

환희와 걱정, 셀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이 한데 섞인 것 같은 특이한 곡이었다.

전생의 의지가 깃들 듯, 열 개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수년간 놓았던 피아노를 치고 있다니.

이것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만큼이나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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