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전날 밤에 피아노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악기실에 있던 모든 악보를 한 번 이상씩 쳐봤다.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현에 손을 꾹꾹 누르느라 왼손이 매일 지끈지끈했었는데, 이번에는 온 손가락에 근육통이 조금씩 있었다.
‘그래도 훨씬 나아졌어.’
전생의 기억과 더불어, 연주가로서 새롭게 떠오른 능력.
곡을 떠올리고 연주 방법을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악보가 형형했다.
처음부터 완벽한 악보가 떠오른 것은 아니다.
마치 모자이크 처리를 한 것처럼 희미하게 떠오르는 악보들.
그 악보들을 분명하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이젠 훨씬 분명하게 느껴진다.’
손의 근육들이 옅은 경련을 일으킬 즈음.
가상의 오선지가 훨씬 뚜렷해졌다.
번진 듯 퍼져 보이던 음표는 타원형의 머리를 되찾았고, 흐릿하게 보여 알아볼 수 없었던 지시문도 또렷해졌다.
마치 그대로 연주를 하면 된다고 알려주는 듯.
연주를 이어갈수록 풍성함과 정확성은 높아지고, 곡의 분위기도 더욱 활발하게 일렁인다.
덕분에 뭉친 손을 풀 수 있었지만, 전생의 실력을 그대로 선보이기엔 아직 부족한 게 많았다.
새롭게 약동하는 꿈을 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
연주가에게 악보를 해석하는 것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연주란 악보로 적힌 오선지를 읽어내는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 것을 고려하면, 머릿속에 나만의 오선지가 떠오르고 그에 대한 해석까지 느끼게 해주는 이 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능력이리라.
정확히는 오선지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감이 아닌 또 다른 감각이 열린 것 같은 느낌.
얕게 연주해야 하는 음표와 진하게 연주해야 하는 음표를 알게끔 표시된 가상의 악보를 느낀다.
그곳에는 곡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디테일들이 담겨 있었다.
가상의 악보를 제대로 이해하고, 악보에 맺힌 표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색다른 음색이 터져 나오리라.
하지만, 손가락은 그러한 유려한 선율을 따라가지 못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느라 피아노에는 아직 익숙지 않은 탓이겠지.
그럼에도 머릿속에 떠오르고 느껴지는 악보를 완전히 재현시킬 수 있다면, 누구 듣기에도 좋은 선율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차오른다.
연주하는 것만으로, 그리고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법 같은 일.
그 때문에 지금의 부족함은 새로운 욕망으로 변해갔다.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무엇일까.
물론 내력이 튼튼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피아니스트이겠지.
하지만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연주라면 의미가 없다.
전생과 다르게 이제는 실력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연주를 들려줄 수 있다.
‘더 노력해야 한다.’
이제는 내 힘으로 빛나야 할 때.
머릿속에 여러 계획들이 스쳐 지나가자 심장이 열렬하게 뛰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려는 야생마처럼.
그러나 나는 애써 흥분한 녀석을 가라앉혔다.
첫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
아버지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 오랜 연습과 노력을 보였듯이.
또, 내가 바이올린으로 한국대에 입학했듯이.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전생의 재능이 도와준다 하더라도, 몸을 가꾸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전날 톡톡히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바이올린만 잡아서 굳어버린 손을.
머릿속에서 떠오른 악보가 완벽해도 오른손은 상상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했다.
그래도 잠을 아껴가며 연습에 매진한 덕에 좀처럼 굴러가지 않던 오른손이 조금이나마 잘 움직였다.
완벽까진 닿지 못했지만, 전날 했던 어이없는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오늘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봐야지.
“앵글 괜찮네.”
휴대폰 카메라 안에 피아노 건반이 담겼다.
삼각대에 휴대폰을 고정하자 유튜브에서 봤던 피아노 연주자들의 구도가 얼핏 나타났다.
영상 촬영.
연주가가 자신의 연주 모습을 모니터링하는 것은 어떤 악기를 다루든 필수적이다.
연주를 할 때에는 오롯이 연주에만 집중하고, 연주가 끝난 뒤에 제 3자의 입장에서 평가를 하는 것이다.
또, 당장 보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이 영상을 업로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내 연주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면, 내 연주에 피드백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일 테니까.
아니, 내 전생의 실력이라면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될 것이라 묘한 기대감도 있었다.
혼자서 하는 연주는 의미가 없다. 그저 연습일 뿐.
전생처럼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연주를 선보일 곳, 그 연주를 바라볼 사람이 없다면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오를 순 없다.
아무도 모르는 피아니스트를 보고 위대하다고 할 순 없겠지.
위대하다는 것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식이 필요할 테니까.
다행히 현대에는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모아둔 곳이 있다.
유튜브.
실제 ‘피아노’라고만 검색해도 유명 피아니스트 무대는 물론이고, 소소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커버한 영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커버 영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거기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았다.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고 했던가.
당장 유명 유튜버들처럼 수천, 수백, 수만 조회 수를 달성할 순 없겠지만, 누군가의 입소문을 탄다면 크게 성장할 수 있으리라.
전생의 기억은 이러한 모습에 불규칙적인 심장 박동을 내게 보냈다.
조금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은 듯한 약동.
기대감이 어린 듯했다.
막 연주를 시작하려던 찰나.
밖에서 차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주회 일정도 없으신 아버지가 어디론가 향하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없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어디로 가는지 알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일찍 출발하시네.”
그럼 나도 준비를 해야지.
***
“대한 오케스트라에는 염라대왕이 있다.”
박현철.
수철의 형이자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에 대한 소문이었다.
한국 최대 규모의 오케스트라이자, 한국 최고 명성을 가진 대한 오케스트라.
대한민국에서 기악과를 졸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워너비였다.
그러나 전국에서 탑을 달리던 학생들도 대한 오케스트라에 와서 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현철의 지도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바이올린! 정신 똑바로 차려! 한 박자씩 빠르다! 트럼펫은 숨을 더 강하게! 첼로! 내 지휘를 봐야지 어딜 보나!”
극장에 천둥이 친 듯 옅은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악기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들을 뚫고 튀어나갔다.
쉰이 넘어 꺾일 법도 한데, 현철의 목소리와 기상은 지금이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nsemble!(앙상블!)”
콰르릉!
대한 오케스트라의 위용을 자랑하듯, 악기들의 화음이 내리친다.
화음들의 파도를 직격으로 부딪치며 그 사이에 잘못된 부분을 정확히 짚어내는 지휘자.
그의 모습은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배를 모는 선장 같았다.
배가 침몰하지 않게 관리하면서 선원 하나하나의 컨디션까지 신경 쓰는.
그것이 마에스트로의 위치였다.
그런 형이기에 수철은 가장 먼저 현철을 찾아왔다.
이안의 전공 변화에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을 사람은 다름 아닌 대한 오케스트라의 수장이자 형인 박현철이었으니까.
현철이 이끄는 대한 오케스트라는 공식적으로 이안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 후원에 힘입어 이안은 여러 바이올린 콩쿨에서도 우승을 하고, 현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는 사람들에게 좋은 미끼를 던져주는 셈이었다.
가뜩이나 항간에 제 식구 돌보기라는 찌라시가 돌곤 하니까.
그렇다고 수철이 아들을 회유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선택이 그러하듯, 그 책임 또한 자신이 져야겠지.
연주가 끝나자 현철이 수철에게 다가왔다.
온몸으로 지휘를 한 듯 땀범벅인 모습.
그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현철은 자리에 앉자마자 수철에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이안이가 바이올린을 포기한다고? ”
수철은 형의 말에 끄덕이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예상했던 현철의 반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곧바로 호통이 날아들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현철의 태도는 담담했다.
그게 무슨 대수라는 듯.
“바이올린 말고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대.”
아들이 음악에 열정이 없다는 것을 진즉에 느꼈었다.
음악이 아니더라도 괜찮으니, 다른 것을 찾아보길 권하려던 찰나, 아들이 다시 잡은 것은 피아노였고, 피아노라면 최선의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아버지인 본인이 피아니스트이자, 본인의 형은 마에스트로였으니.
“전공생이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전공을 바꾼다니.”
낮고 울림 있는 현철의 목소리가 깊게 깔렸다. 그는 수철의 말에 긍정하지 못했다.
그 또한 마에스트로 생활을 하면서 숱한 연주자들과 합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중에는 자신이 선택한 악기가 맞지 않는 것 같다며 다른 길로 선회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현철은 매번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릴 적부터 뿌리내린 악기를 놓고 어떻게 다른 악기를 만지겠냐고.
하지만, 현철의 당부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현철의 예상대로 무너졌다.
몇몇은 자신의 전공으로 돌아와 다시금 연주를 이어갔지만, 상당수가 영영 악기를 들지 못했다.
수철도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현철만큼은 아니지만, 수철 또한 음악계에 발을 들인 지 오래되었으니까.
그만큼 현철의 안목이 정확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들의 연주를 생각하면 그 정확한 안목을 꿰뚫을 수 있을 거란 묘한 자신감이 일었다.
“잠재력은 다른 피아노 전공의 학부생들만큼 있는 것 같아. 내가 보장해.”
“스물 나이 넘겨서 체르니부터 치는 게 아니라?”
수철의 담담한 변호에도 현철의 철학은 확고했다.
세월이 그의 철학을 대변해 주었으니까.
슬럼프를 겪고 새 악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
처음에는 새로운 악기를 배우는 희열과 기존의 음악적 감각으로 빠르게 배우는 자신의 모습에 전공을 바꾼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고난이도 곡을 마주했을 때.
그들은 금방 벽을 느끼고, 의지를 상실했다.
그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곤 한다.
새로운 시도라서 하지 못했다며 다시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다시금 벽을 마주했을 때 현실을 느낀다.
그냥 자신은 재능이 없었던 거라고.
무너져버린 근본에 끈기는 사라지고, 의미가 없어진 연주는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현철의 제자들도 음악에서 멀어졌다.
현철의 눈에는 이안도 그런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형, 열의가 다르던데.”
수철은 애써 현철의 철학에 반문했다.
전날 들었던 연주는 그동안 들었던 연주와는 차원이 달랐다고.
단순히 변심한 것이 아니라 마치 뮤즈를 만난 것처럼 선율의 깊이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번 들어보면 형도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했지만, 현철의 생각은 달랐다.
“박수철. 피아니스트인 너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분노가 섞이지 않은 진지한 목소리.
현철의 반응에 덩달아 수철도 진지하게 자세를 고쳤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해. 당장 내일부터 피아노에 매진한다 해도 언제 커리어를 쌓고, 언제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오를 거라 생각하냐.”
현실적인 그의 말에 수철의 눈빛이 다소 흔들렸다.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고, 그 노력을 쏟아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태웠던가.
분명 이안이 보여줬던 연주는 출중했다.
하지만, 그도 알다시피 부족한 부분은 현저하게 드러난 연주였다.
곡 해석과 감정으로 미묘하게 감췄을 뿐이지, 그가 기억하는 에뛰드에서 벗어난 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피아노의 장점은 두 손이 서로의 화음을 맞춘다는 것.
반대로 얘기하자면, 두 손의 화음이 맞지 않으면 어떤 악기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그 불협화음을 자신의 귀로 들었던 수철은 현철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로서 그를 바라봐야 했지만, 전문가로서 필요한 이야기도 해줄 수 있어야 했다.
행여 자신이 제대로 잡아주지 않아 이안이 바이올리니스트로도, 피아니스트로도 성장하지 못한다면 아들이 감당해야 할 업보는 아주 무거우리라.
그렇기에 지금은 이안을 아들 보듯이 아니라, 피아니스트 지망생 보듯 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지금 확인해보면 되겠네.”
난데없는 현철의 말에 수철은 발작하듯 몸을 일으켰다.
수철의 시선이 현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 끝에 훤칠한 청년이 오페라하우스의 문을 열고 다가오고 있었다.
***
“안녕하셨어요. 큰아버지.”
“오랜만이구나.”
단순한 인사인데도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미 아버지가 큰아버지께 말씀을 드린 듯, 큰아버지의 눈썹이 불타듯 꿈틀거렸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
“이유는 아버지께서 얘기하셨을 거예요.”
당당한 내 반응에 큰아버지가 일부 인정한다는 듯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옆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는 내 방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이셨다.
빠른 시일 내에 아버지가 큰아버지를 찾아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콩쿨 문제도 있겠지만, 나는 큰아버지의 후원이 더 걱정이었다.
이미 나를 향해 쏟아지는 화살은 알고 있으니까.
가족이라 후원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혹자는 대한 오케스트라의 후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초중고 콩쿨에서 상을 휩쓸었지만,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엔 선명한 성과를 내지 못한 탓에 여러 비판이 쏟아졌다.
대한 오케스트라의 수장이 객관적인 실력으로 평가하는 대신, 가족을 챙기고 있다고.
큰아버지가 내색하진 않으셨지만, 이미 그 내용들을 알고 계시리라.
여기서 내가 마음대로 전공을 바꾸고,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더 많은 뭇매를 맞으시겠지.
‘내 욕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칠 순 없지.’
마냥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거나, 큰아버지의 의도를 의심받게 할 순 없다.
그러기에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발생하는 것들이기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기 전에 내가 움직여야 한다.
적어도 내 선택의 지지를 받기 위해선 실력을 보여줘야했다.
그 지지자들이 대한민국 클래식에서 정통한 내 가족들이라면 더욱이.
“그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네.”
잠깐 나를 바라보던 큰아버지는 어깨동무를 한 채 스테이지로 향했다.
큰아버지의 팔이 마치 족쇄처럼 무거웠다.
나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온 큰아버지는 피아니스트에게 손짓했다.
피아니스트는 마에스트로의 뜻을 이미 알아챘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텅 빈 피아노.
큰아버지의 손이 피아노를 가리켰다.
“해봐라.”
도발적이지도, 그렇다고 떠보는 듯한 가벼운 목소리도 아니다.
아주 엄숙하고 진지한 말투.
이건 시험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뒤집어 보라는 엄포.
화려하던 무대가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했다.
아버지가 뭐라 반론하고 싶은 듯 다가왔지만, 큰아버지의 시선 한 번에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못했다.
큰아버지는 나를 피아노 의자에 앉히곤 몇 발자국 물러서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어떤 것이든 해보아라.’
움직이지도 않은 큰아버지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전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우려와 기대, 관심과 부정.
온갖 감정들이 나에게로 쏘아졌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그런 것들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로지 내 관심은 그랜드 피아노의 커다란 위용에만 쏠려있었다.
단순히 건반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울려 퍼지는 거대한 볼륨.
두근두근두근.
당장이라도 연주를 하고 싶다는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악보들이 스쳐 지나갔다.
밤새도록 치면서 각인된 악보들.
서가에서 악보를 뽑듯 곡 하나를 떠올렸다.
곡을 선택하자 머릿속에 오선지가 그려지고, 그 위에 음표들이 맺힌다.
그리고 느껴졌다.
그 음표들을 고스란히 펼쳐내기 위해.
나는 손가락을 건반에 가지런히 올렸다.
Cantabile.
내가 하고픈 이야기가 노래하듯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