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5화 (5/250)

5화

‘악기를 바꾸는 사람 중 제대로 하는 사람을 못 봤다.’

현철의 철학은 확고했다.

그는 음악을 하는 것은 항해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마에스트로로서 느낀 것도 있지만, 그동안 숱한 연주자들을 보면서 알게 된 깨달음이었다.

마에스트로는 선장처럼 모든 단원들을 통솔해야 한다.

자신이 잘났다며 튀어 나가는 단원을 붙잡아 가라앉혀야 하고, 적응하지 못해 소극적인 단원은 끌어올려야 했다.

날뛰는 자신의 욕구와 심리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단원들은 어떠한가.

그것들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배가 산으로 간다.

현철은 살아오면서 그렇게 난파된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랬기에 이안도 그렇게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로베르트 슈만. 심포닉 에튀드 13번.’

피아노의 기본.

여러 유명 연습곡 중 하나였다.

기본적이지만, 그렇기에 피아노곡의 정수가 가득한 곡이었다.

콩쿨에서 심사곡으로 지정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이 곡이 ‘교향적 연습곡’인 이유는 슈만이 오케스트라적 측면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수많은 악기들.

바이올린, 첼로를 비롯한 현악기들과 바순, 클라리넷을 비롯한 목관악기까지.

슈만은 피아노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오케스트라 사운드 효과에 주목했다.

현악기의 미묘한 보잉과 비브라토, 목관악기가 가진 가벼우면서도 중후한 공기의 무게.

그런 수많은 소리의 향연을 혼합하여 만든 것이 바로 슈만의 에튀드였다.

‘이건!’

얼핏 다른 곡을 연달아서 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는데도 이안의 연주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단원들이 가만히 있음에도, 그들의 앞에 놓인 악기들이 스스로 소리를 내듯 풍성한 소리가 오페라하우스를 가득 메웠다.

은은하면서도 튀는 음색으로 날뛰는 바이올린의 음색.

그것을 받쳐주면서도 과도하게 날뛰지 않도록 감싸는 첼로의 선율.

활기찬 바람에 높고 낮은 소리를 입힌 목관 악기들의 향연이 곳곳에서 터져 나와 피아노라는 오선지 아래에 정렬했다.

정렬한 음표들은 이안의 손에 맞춰 높은 오페라하우스의 천장 사이에서 맘껏 유영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날뛰지 않도록.

강약을 조절하는 이안의 손길 아래에서 음표들이 직선으로 솟구치는가 하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흩날리기도 했다.

소리를 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미 이곳은 거미줄처럼 빽빽하게 채워져 있으리라.

그 줄에 매달린 듯, 단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이안의 연주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거나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때,

단원들을 스쳐보던 현철의 시선이 수석 피아니스트에게로 향했다.

주은미.

자신과 대한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이끌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

칭찬 대신 비평이 익숙한 현철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나이가 들면서 능글맞음만 늘고 자주 농담을 던지는 은미였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칭찬은 할지언정 인정의 턱이 무척이나 높은 그녀였으니까.

만약 은미가 인정한다면 상대의 실력을 보지 않아도 잘할 것이라고 자부할 정도로 현철은 그녀를 신뢰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은미가 한 명의 관객이 된 것처럼 눈을 감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요즘 모든 음악이 비평의 수단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던 그녀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오로지 연주에 집중하고 있다.

어서 연주를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채 내딛는 손가락이 아니었다.

나비처럼 사뿐히.

조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감에서 기인한 여유로움인데.’

마치 다음 쳐야 할 건반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듯.

물체를 향해 손을 뻗듯,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나아간다.

간질이듯이 톡, 쓰다듬듯 부드럽게, 활기찬 걸음걸이를 보듯 대범하게.

그동안 바이올린만 켰다면 오른손이 굳을 법도 한데, 이안의 오른손은 다섯 모두가 유연하게 건반을 훑었다.

조금의 실수도 없었던 연주.

베테랑도 실수하기 마련이라는 템포 조절도 정확하게 해냈다.

심장 박동을 메트로놈 삼아 판단하는 현철의 통찰에서도 빗겨나가는 부분은 없었다.

이안은 클라이막스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내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오케스트라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이미 피아니스트가 된 양.

평소 같았으면 건방 떨지 말라고 경고했을 현철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안을 피아니스트라고 인정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썹을 꿈틀거리며 이렇게 질문할 뿐.

“너 뭐냐?”

“기본기를 좋아하셔서 연습곡으로 준비했습니다.”

낮고 묵직한 음성에도 이안은 기죽지 않았다.

도리어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듯.

이안의 눈에 총기가 어려 있었다.

“주 수석. 박수철.”

현철의 호명에 두 사람이 차례로 현철에게로 향했다.

수철은 자신도 이 상황이 다소 이해가 가질 않은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은미는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의견 말해봐.”

한 명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다른 하나는 현철이 인정한 피아노 수석.

본인과 같은 것을 봤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에 수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내가 왜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하다고 봐. 기술적인 것들은 연습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저 감성과 표현력은 의식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애써 담담하게 얘기하는 수철이었지만, 그 또한 당황한 듯 이안을 연신 쳐다봤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다른 피아니스트를 보는 양.

“주 수석 자네는.”

현철의 질문에 은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물어보냐는 듯한 태도에 이어진 답은 뻔했다.

“뭘 어떻게 생각해요? 이미 다 봤잖아요? 타고났네, 타고났어.”

능글맞게 굴린 발음과 함께 은미가 좋은 구경을 했다는 듯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더니 현철과 수철을 한 번씩 돌아보고 말을 덧붙였다.

“흠. 안 타고나는 게 이상한 건가?”

***

기본(基本).

매번 근본과 뿌리를 이야기하시는 큰아버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몇 번 큰아버지께 교습을 받아왔던 터라 잘 알고 있다.

아버지가 피아니스트였지만, 교육에 대해서는 큰아버지가 한 수 위니까.

내가 전공을 바꾸는 것이 오케스트라에 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설득이 필요했다.

그래서 콩쿨에서도, 연습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연습곡, 에튀드를 택했다.

‘기본적이자 다채로운 에튀드.’

본래 에튀드는 연습곡이다.

손가락을 푸는 데 제격인 곡.

그러나 슈반의 13번 에튀드를 들은 나는 전생의 이안이 들뜬 것이 느껴졌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연습곡임에도 ‘교향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슈만의 의지는 단순히 피아노를 표현하는 데 국한되지 않았다.

교향곡.

관현악을 위해 작곡한 곡.

관악기, 타악기, 현악기 등 다채로운 향연이 들어가야 하는 교향곡이 피아노 연습곡이라는 것에서부터 어폐였다.

그러나 슈만의 곡은 그런 관념을 보기 좋게 깨부쉈다.

현악기의 보잉, 비브라토, 타악기의 완력과 뚝심을, 관악기의 울림과 호흡의 하모니를 한 악기에 녹여냈다.

마치 앞으로 더욱 큰 연주를 해내 보이겠다는 의지처럼.

심장 한 켠이 자꾸 두근댄다.

큰아버지, 아버지, 수석님까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거장에 가까운 사람 셋이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연주에 대한 이야기일 테지.

큰아버지가 두 피아니스트를 부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 진지한 표정을 한 채 의견을 내는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밤에 봤던 얼굴보다 더욱 확신에 차 있었다.

반대로 수석님의 얼굴은 밝은 편이었다.

그저 한 곡조 잘 들었다는 듯한 반응.

수석님의 얼굴에선 만족감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공통된 눈빛으로 나를 흘겼다.

연주를 인정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것이 있는 듯.

‘갑자기 변한 내 모습에 의문이 들 수밖에.’

전생의 기억 속에서 그런 모습이 익숙했다.

대신 연주를 한 전생의 이안 덕에 명망을 얻은 귀족들.

그들에게 사교장 사람들이 의문을 쏟아냈다.

언제 그렇게 피아노 연주를 잘했느냐고.

또는 어떻게 그리 단기간에 실력이 향상되었느냐고.

오죽하면 혹자는 그들을 향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냐고 물었을 정도니까.

그들의 의심을 일축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진실을 얘기해도 믿어주시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정답은 단 하나.

‘나는 내 길을 간다.’

건반 위에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남들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쥐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가 원하는 길로 나아갈 뿐.

전생의 이안은 신분의 문턱 때문에 원하는 길을 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으니까.

심지어 전생과 달리 나를 지켜보고 응원할 수 있는 가족까지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꾸준히 나아가서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

그저 내 실력을 보여줄 것뿐이다.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어렸을 때는 그렇게 들었는데. 사실 피아노에도 천재성이 있었네요?”

수석님이 천천히 다가왔다.

옅은 회색 머리가 자연스럽다 못해 아름답게 느껴지는 외모.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눈에는 생기가 넘친다.

어투는 능글맞고 사뭇 가벼워 보이지만, 직접 마주한 모습은 그렇지 않다.

능글맞음에도 그 속에는 깊은 정중함이 묻어나왔다.

가벼운 복장임에도 가벼워 보이지 않는 중후한 느낌.

마치 전생의 기억에서 봤던 귀부인을 보는 것 같다.

은은하게 피어난 미소는 옅은 주름과 함께 세월에 대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기품있다.

그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이안 군? 아니, 이제 이안 씨라 불러야 하려나요?”

존중 어린 말투.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도 기품이 느껴진다.

어렸을 적 큰아버지를 찾아뵈면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큰아버지와 함께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

이제 곧 은퇴를 앞뒀다고 들었다.

소탈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시기에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계시다고.

“혹시 내 유튜브 채널 알아요?”

“네. 저도 구독 중이거든요”

당연히 알다마다.

곧 100만 구독자를 앞둔 분의 채널을 모를 리가.

게다가 ‘클래식은 어렵다’는 불문율을 깨주신 분이기도 했다.

기본적인 피아노 연주는 물론 소탈한 브이로그, 다른 연주자들과의 합방을 가볍고 재미있게 풀어내어 여러 음악 지망생의 관심을 받았다.

게다가 음악은 만국공통이랬던가.

수석님의 연주에 매료된 외국인은 물론,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만들어진 인연까지 합세하여 수석님의 채널은 단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알고 보니 천재 피아니스트였다.’ 썸네일에 딱인 제목 같은데. 어째서 아버지, 큰아버지도 모를 실력을 가지고 있으셨어요?”

그녀의 입가 미소가 깊게 패였다.

마치 신비로운 환상을 앞에 마주했다는 듯.

흥미로움과 함께 기대감이 수석님 표정에 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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