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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9화 (9/250)

9화

“너는 좋겠다. 바이올린도, 피아노도 잘 쳐서.”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진동벨만 보는 듯 아래로 향한 고개 때문에 내 시야에서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탁자 위에 올린 지현의 손.

그녀의 손가락 끝은 긁고 뜯은 듯 생채기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손톱은 물어뜯은 듯 가장자리가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손이 생명인 피아니스트면서 손 관리를 저렇게 하다니.

전생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 격분했지만, 나는 그녀가 저렇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지현.

재벌가 아버지와 플루티스트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아이.

어릴 땐 지금과 달랐다.

아이들과의 소꿉장난에도 잘 꺄륵거렸고, 피아노 수업을 들으며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을 때 해사하게 웃는 아이였다.

그러나 중학생 무렵인가.

점차 변해갔다.

“이번에도 2등이야. 매번 그러기도 힘들 텐데. 이안이랑 같이 악기를 잡아놓고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나 몰라. 레슨 선생님도 일류로 알아봤는데.”

가족 모임에서, 그것도 지현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차마 아무 말 못 하고 접시만 바라보며 음식을 깨작거리던 지현의 표정이 생생했다.

선미 아줌마는 마치 지현이 자신의 장신구 중 하나인 듯 굴었으니까.

열심히 빛내려고 갖은 돈을 쏟아붓는데도 잘 안된다는 듯.

제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현에 대한 모친의 평가는 잔혹했다.

밖에서 그리할 정도인데 집 안에서는 오죽할까.

‘매번 비교당하기 일쑤겠지.’

방금도 보지 않았던가.

나의 자퇴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면전에 대고 곧바로 얘기하는 모습.

집안, 그리고 그녀가 속한 재벌가에서는 얼마나 더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지현은 만년 2등이라는 어머니의 타이틀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고 놀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선미의 태도는 안 봐도 뻔하지.

“너무 기죽지 마.”

“어?”

“너 피아노 잘 쳐. 내가 잘 감상할 테니까 너는 연주에만 집중해.”

진심 어린 조언.

이제 피아노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할 말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할까.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 듯 지현의 고개가 조금씩 올라왔다.

“정말?”

“그래. 너 어렸을 때도 꽤 잘쳐서 선생님께 칭찬도 받았었잖아.”

“맞아! 근데… 그건 옛날이지. 지금은…”

내 말에 자신감을 조금 회복한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궜다.

아직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듯, 칭찬에 좋아하여 피아노를 쳤던 자신은 과거의 잔재라는 듯, 침울한 표정이 이어졌다.

“엄마가 이번에도 2등 할 거면 피아노 그만두고 유학이나 가래.”

지현의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떨림.

아마도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중압감이겠지.

마음 한 켠이 안쓰러움과 분노로 꿈틀댔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서지현은 그런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험담이나 할 줄 아는 선미 아줌마의 뱃속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착했으니까.

그런 친구가 타의로 인해 하고 싶은 것을 그만두는 것은 싫었다.

“2등도 잘한 거지.”

“... 위로하는 거야?”

“아니.”

지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내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의문에 대답하듯, 내 짧은 한마디가 이어졌다.

“진심이야.”

그녀는 놀란 듯 움찔거렸다.

“어릴 때부터 가져왔던 꿈이잖아. 남들이 쥐락펴락하게 두지 마.”

담담하면서도 진지하게.

이건 내 진심이기도 했지만, 전생이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소중한 꿈을 가졌음에도 남들에게 휘둘리며 살았던 남자.

전생이 나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지현을 향해 외치고 싶어 했던 말.

“이따가 보여줘.”

지현의 실력을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니고, 당장 평가할 정도로 내 위치가 빼어난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듣는 것.

잘 듣고 있을 테니 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뽐내면 된다고.

내 말에 지현은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나는 몸을 일으켜 지현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굴을 가리다시피 한 머리카락을 치우자 선명한 이목구비가 그대로 드러났다.

가리고 다니기에 아까울 정도로 청초한 이미지의 지현.

나름 오랜 친구 사이인데도 그녀의 눈 아래에 점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다.

“머리카락 좀 올리고 다녀. 악보도 안 보이겠다.”

하지만 그녀는 말에 반문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에 가까웠지.

갑작스러운 내 돌진에 당황했는지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잔뜩 띠고 있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빨갛게 된 모습.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 말을 끝으로 지현은 황급히 어디론가 뛰어갔다.

화장실은 반대 방향인 것도 모른 채.

따라가려 하다가 이내 울린 진동벨을 보고 커피를 받아 위층으로 향했다.

혼자 올라오는 내 모습에 두 사람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봤다.

“지현이는?”

“화장실 다녀온대요.”

***

대기실 분위기가 사뭇 무거웠다.

그럴 수밖에.

이번 콩쿨 예선을 거치면 전국 콩쿨 본선에 나갈 자격이 주어지니까.

가장 빠르면서도 규모가 큰 대회를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초석.

이번 콩쿨에서 우승하면 더 큰 규모의 콩쿨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번 콩쿨은 그 시초이자 앞으로 피아니스트로서 내 이름을 알릴 시작점이 될 테니까.

어느새 돌아온 지현도 연습을 하는 듯 구석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차근히 눈을 감은 채 머릿속에 악보를 떠올렸다.

내가 준비한 곡의 선율이 맴돌았다.

귀여운 음표들이 통통 튀어나와 금방 제자리를 찾는다.

마치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참가번호 15번 서지현. 나와주세요.”

갑작스런 호명에 움찔거리던 지현이 조심스레 일어났다.

그녀 주변에 같이 있던 친구들이 작은 소리로 지현을 응원했다.

무대로 나가기 직전, 입구 쪽에 있던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감이 조금 더해진 듯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구두가 유독 높은 소리를 냈다.

나는 커튼 뒤에서 무대를 바라봤다.

무대 정중앙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관객석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콩쿨에 참여한 사람의 보호자들이겠지.

지현은 세 심사위원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피아노에 앉은 그녀는 곧바로 연주를 선보였다.

“쇼팽 에튀드 9번.”

일명 <나비>.

마치 왈츠의 선율처럼 튀는 음색들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시작이 좋다는 듯 지현은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어린아이의 뜀걸음처럼 가벼우면서도 연속적인 선율이 특징인 곡.

지현도 그 특징을 잘 안다는 듯 그것을 재현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뭘까.

이 어색함은.

‘기계 같아.’

지현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 가상의 오선지가 채워진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오선지에 담긴 이야기를 펼친다기보다는, 오선지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일정한 박자에 맞춰 스타카토로 움직이는 왼손과 연달아 아르페지오로 화음을 만들어 내는 연속.

반복적인 에튀드의 특성을 잘 살렸지만, 그것이 어떠한 장면을 연상케 하진 않았다.

마치 선율로 나비를 표현하기보단, 기계 프레스로 나비 모양 판화를 찍어내듯.

그녀의 곡조에서는 인위적인 느낌이 진했다.

에튀드를 비롯한 이어진 곡에서도 마찬가지.

악보를 정확히 재현하는 것은 성공이었지만, 선율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창피하군.’

과연 내가 평가할 자격이 있을까.

나의 바이올린도 지현과 처지가 다를 바가 없었다.

시험과 콩쿨 때문에 악보를 외우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는 실력.

이제야 새롭게 나아갈 길을 찾는 나로서는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나의 비판적 생각과 달리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 선미 아줌마가 엄마를 흘겨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간 칼이 어떠냐고 묻는 것 같았다.

“참가번호 16번 박이안. 나와주세요.”

공교롭게도 다음은 내 차례였다.

서로 스치듯 지나가던 사이, 지현은 아까보다 훨씬 밝은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크기의 그랜드 피아노.

심사위원석을 향해 묵례를 한 나는 곧바로 앉아 건반에 손을 올렸다.

손을 올림과 동시에 리듬게임을 하듯 머릿속에 오선지가 펼쳐진다.

오선지에 맺힌 음표들에 맞춰 건반을 누르자 음표들이 흐드러지듯 재현된다.

마치 눈발이 날리는 것처럼.

<겨울바람>

쇼팽 에튀드 11번.

가련하게 시작하는 음색이 고요하게 무대에 울렸다.

사람들의 잡담마저 흘러들어올 정도로 미묘한 선율.

하지만, 그 본 시작은 몇 초 뒤에 시작된다.

오른손은 멜로디를 치되 끊임없이 약지와 소지를 움직여야 한다.

마치 눈발이 계속해서 바닥에 떨어지듯, 아르페지오와 트릴로 쌓이는 음색들이 장내를 휘감았다.

왼손마저도 아르페지오의 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도리어 오른손이 반주를 대신하듯 천천히 진행되자 왼손이 낮은음에서 선율을 이어간다.

레가토로 자연스럽게 왼손이 흘러가는 사이, 눈발 같은 오른손의 트릴이 휘몰아친다.

마치 바람을 일으키는 왼손과 눈과 비를 머금은 오른손이 합쳐지듯.

‘기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현의 연주를 보고 더욱 체감이 되었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것의 문제점.

연주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연습을 이었다.

그리고,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만두었다.

그래선 안 됐다.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 나만의 생각을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어야 했다.

‘단순히 따라 하지 않도록.’

내 머릿속에 가상의 오선지가 떠오른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기만 한다면 여타 학부생이 연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오선지를 길로 삼아 차근히 밟아가듯.

그 악보 전체를 이해하면서 감상을 만들어간다.

마치 길을 걸으며 주변을 살피고, 그 주변에 대한 감상을 자유로이 펼치는 것처럼.

자유로운 감상 속에서 나만의 답을 찾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콩쿨과 시험에 맞게 연습을 하고 생각을 멈췄다.

그 이상의 발전을 생각하지 못하고 멈춘 것이겠지.

이제는 다르다.

악보를 온전히 느끼고, 곡의 이야기를 느낀다.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덧대어 연주에 더한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전생의 심장이 박수처럼 두근거림을 보내왔다.

전생의 기억이 묘한 이미지를 보내온다.

인적없이 눈이 쌓인 겨울 산속.

쉴 새 없이 부는 눈 폭풍에 나무들은 흔들리고, 눈들이 시비라도 걸듯 끝도 없이 나무와 땅에 부딪친다.

생물이 도저히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악천후.

그 사이에서 털로 몸을 감싼 산토끼는 몸을 움직인다.

천적이 등장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그러나 눈 폭풍을 피해 재빠르게.

살금살금 걷는 발걸음이 건반에 의해 만들어진다.

마치 노래하듯이 쏟아내는 이야기.

이렇게 해야겠다.

아직은 전생의 기억이 알려주듯 이야기와 이미지를 내보내지만, 언젠가 내가 직접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짜내어 손으로 표현하도록.

다양한 색감의 그림을 보듯, 다채로운 선율에 그들의 귀가 매료되게.

그 특별함을 알릴 것이다.

그리고 유명해질 것이다.

그렇게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다.

나의 다짐이 담담하게 피아노 건반에 흩뿌려졌다.

모든 곡을 마쳤을 때는 나도 모르게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내는 정적만 감돌았다.

지현이 연주를 마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심사위원, 관객석, 백스테이지까지.

빠르게 시선이 훑고 지나갔지만, 생각보다 멀리 볼 필요는 없었다.

눈과 입을 떡 벌린 선미 아줌마와 배시시 웃고 있는 엄마의 표정만 봐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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