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이번 콩쿨 1위에서 4위까지는 본선에 진출할 자격을 얻는다.
빠르게 진행된 평가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될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선미 아줌마는 당연히 자신의 딸이 될 것이라며 으스대고 있었다.
심사위원 중 하나가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들었다.
“그럼 순위권에 오른 학생들의 이름을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약하게 속삭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왼손을 꼭 쥔 어머니의 손에 은근히 힘이 들어간다.
나보다 더 긴장되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 손에는 묘한 느낌이 함께 감돌았다.
따스하게 전달되는 온기는 마치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 손을 놓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어떤 결과든 이 손을 놓지 않을 테니까.’
1위부터 차례대로 순위가 발표됐다.
안타깝게도 1위에는 내 이름이 호명되지 않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전생의 기억은 분한 듯 꿈틀대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침착했다.
만족스러운 연주이긴 했지만 완벽하진 않았으니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음표를 그대로 나타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아직 내 손은 그 정도 실력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했다.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명화를 고스란히 베끼는 데는 높은 숙련도와 노하우가 필요할 테니까.
게다가 여전히 뭉쳐있는 오른손을 푸는 데 더 시간이 걸리리라.
에튀드를 예선 곡으로 한다는 것은 피아노 기교를 중점으로 보겠다는 것.
그 때문에 내 부족함은 더욱 여지없이 드러났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피아노를 잡은 친구들이 노련함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더 강할 테니까.
2위는 서지현이었다.
2위 호명에 선미 아줌마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지현은 기쁜 듯 배시시 웃었다.
자신이 호명됨과 동시에 지현은 나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백스테이지에서 했던 것처럼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조그만 발걸음으로 무대를 향하자 심사위원은 이어서 3위를 발표했다.
3위에는 모르는 이름이 나왔다.
상을 받으러 향하는 사람을 바라보는데 어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마지막 호명에서도 내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본선에 참여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행여나 실망할 아들에게 어떤 위로를 할지 고민하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장내도 긴장감으로 감돌았다.
마지막 티켓이 누구에게로 돌아갈지 궁금하다는 표정도 있었고, 제발 자신에게 마지막 티켓을 달라고 애원하는 듯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카드를 뽑아 드는 심사위원이 위에 적힌 이름을 호명했다.
“참가번호 16번, 박이안. 축하합니다.”
마지막 순위 발표에 주변 곳곳에서 박수와 함께 얕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박수는 그 어떤 박수 소리보다 컸다.
나는 어머니께 작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건네고 연단으로 향했다.
좌석 복도를 따라 내려가서 연단을 향해 올라가기까지.
전생의 기억과 함께 미묘한 감각들이 밀려 올라왔다.
피아노를 시작한 지 몇 달밖에 안 됐지만, 전생의 실력과 내 노력을 믿고 참전한 첫 피아노 콩쿨.
부족한 점이 많은데도 순위권에 들 정도라니.
밤을 지새우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연습에 많은 시간을 부여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삼 전생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 순위권 달성으로 내 마음엔 진한 목표가 생겼다.
이번에는 겨우 턱걸이로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지만, 다음에는 더 높은 위치에서 해낼 것이라고.
무언의 다짐 때문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수상자들을 향한 박수 세례에 전생의 기억이 감복한 듯 울렸다.
아마도 찬사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지나 심사위원에게서 상장을 받고 나서야 나도 실감이 났다.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이미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내 연주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큰 인정이리라.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축하받는 지금의 상태는 그것과는 묘한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4위이면 어떠한가.
내가 가겠다고 선언한 길에 큰 발걸음 하나 내디뎠는데.
그것만으로도 벅차올랐다.
“축하해, 아들. 연주하는 거 엄청 멋졌어. 어떻게 벌써 콩쿨을…!”
상장을 받아오는 모습에 어머니는 어깨를 토닥였다.
어머니의 웃음에서 묘한 기운이 사라지고 오직 고운 웃음만 남았다.
아마도 전공을 바꾼다는 말에 내심 걱정을 많이 하신 눈치셨다.
이젠 걱정하지 말라고.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어서 ‘박이안’이라는 이름을 날릴 거라고.
입 밖으로 꺼내기엔 아직 민망한 이야기를 가슴으로 곱씹었다.
“운이 좋았어. 가까스로 본선 진출을 했네. 아무튼 축하해.”
애써 축하의 인사를 보내는 선미 아줌마.
하지만,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만약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왔다면 혹시 입김 분 것 아니냐며 투정을 부렸을 모습이었다.
설마, 어머니가 그 점까지 예상한 것은 아니셨을까.
문득 의문이 들 정도였다.
“너도 축하해, 선미야. 지현이도 본선 출전하잖아.”
어머니의 축하에도 아줌마는 분한 듯 혀를 찼다.
충분히 좋은 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는 성에 안 찬다는 듯 표독스러운 눈빛을 지현에게 보냈다.
다행히 지현은 친구들과 함께 있느라 이 상황을 모르는 듯했다.
친구들과 한창 담소를 나누던 지현은 나와 어머니를 발견하고 곧장 우리를 향해 왔다.
“이안아. 본선 진출 축하해!”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다가오는 지현.
어머니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이 났다.
아, 약속을 지켜야지.
“잘하던데? 옛날 실력은 무슨. 손가락 빠르게 움직이는 건 나보다 낫더라!”
좀처럼 칭찬을 못 받았다는 듯 그녀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와중, 한 무리의 사람들이 끼어들었다.
연미복과 일상복을 입은 사람이 섞인 무리.
연미복을 입은 사람들은 콩쿨 무대에서 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프로 피아니스트라도 된 양 고급 의류로 몸을 휘감고 있었는데, 1위와 3위도 그들에 속해 있었다.
이때 일상복을 입은 한 청년이 내 앞으로 나와 손을 뻗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정우식이라고 합니다. 한국대 피아노 전공 1학년.”
아, 이름을 들으니 알 것 같았다.
정우식, 한국대 교수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천재.
그 또한 한국대 타이틀로 예비티켓을 따낸 본선 진출자였다.
자퇴하기 전, 실기 평가 때 그의 연주를 들은 기억이 있다.
지현만큼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기계적인 느낌이 난 탓에 학부생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하지만 그는 디테일을 무척이나 신경 쓰는 듯 미묘한 차이로 곡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의 연주는 조금 더 손을 먼저 누르고, 먼저 떼는 아주 작은 차이로 선율의 특이점을 잘 살리고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것을 감안한다면 수준급 실력이었다.
우식은 대뜸 나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악수에 응하자 우식은 신난 듯 손을 마구 흔들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 아버지이신 박수철 피아니스트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몰라요. 한정판 LP까지 구매한걸요. 제가 피아니스트님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피아니스트를 꿈꿨다니까요? 게다가 백부님이신 박현철 선생님은 어떻구요. 국내 연주뿐만 아니라 국외까지 찾아가서 보는 정도랍니다.”
자신의 팬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연이어 아버지와 큰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쏟아냈다.
국외를 찾아가 볼 정도의 열정이라.
“본선에서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나 이제 선배 아닌데.
내 자퇴 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괜히 웃는 표정에 틀렸다고 끼얹기 민망하여 말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은 그의 웃는 표정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묘한 적대감을 표했다.
마치 귀족 출신인 간신의 웃음 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수석님의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간 지 1주일 남짓이 지났다.
몰리던 관심이 조금 가라앉은 듯 조회 수와 구독자 수 증가추세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ㄴ 이안님 영상 언제 올라와요. 현기증 날 것 같단 말이에요.
ㄴ 벌써 초심 잃으신 건 아니죠 ㅠ 뭐라 안 할 테니까 돌아와요
ㄴ 오늘도 또 듣고 갑니다! 다음 곡 기다릴게요!
많은 사람들이 새 영상이 올라왔는지 구경하러 왔다가 기존 곡을 한 번 더 듣고 가는 듯 댓글에는 어서 영상을 올려달라는 요청으로 가득했다.
전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듣고 나니 사람들의 댓글과 조회 수 상승이 새롭게 다가왔다.
‘유명해질 수 있다.’
빠른 유명세를 위해 선택한 길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유명세가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내 연주를 들으러 찾아왔다.
수석님 방송을 통한 광고 효과도 있겠지만, 그것은 찾아오는 이유일 뿐, 내 연주를 듣는 이유는 아닐 테니까.
그러한 이유를 사람들은 고스란히 댓글에 남겨두고 갔다.
ㄴ 우울할 때 듣고 있으면 딱 좋아요!
ㄴ 이안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안님의 연주는 40살인 제 마음도 다독여 주네요. 잘 듣고 있습니다.
ㄴ 어제는 무척 힘든 날이었는데, 이 노래를 들으니 마음이 좀 낫네요! 고마워요 이안님!
미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단순히 유명해지기 위해,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향하는 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단순히’ 이외에 어떤 것이 들어가야 할지 얼핏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다독여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느덧 자신의 뜻대로 곡을 해석하고 위안을 얻어가고 있었다.
열렬한 성화에 나는 이번 콩쿨 예선으로 준비했던 에튀드들을 녹화했다.
통통 튀는 음색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내려두고 갈까.
결과는 사람들이 알려주겠지.
업로드를 마친 손은 드디어 키보드와 마우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서가로 자리를 옮겼다.
음악실 벽면 한쪽을 가득 메운 서가.
마호가니 목재로 만든 책장에는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빼곡하게 악보들이 꽂혀있었다.
본선 무대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0분.
그 10분 동안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표출해야 한다.
관건은 ‘어떤 이야기’로 시간을 채우느냐겠지.
본선에서는 예선과 달리 연습곡에서의 기교 대신 곡의 해석 능력을 볼 테니까.
전생과 내 심장이 뜀에 따라 악보를 훑는 손이 빨라졌다.
하나. 둘. 셋.
책장에 담긴 이야기들을 하나씩 찾아보던 그때.
손가락이 어느 한 악보에서 멈췄다.
Franz Schubert.
머릿속에서 영사기가 켜진 듯 시야가 멍해지면서 전생의 한 장면이 펼쳐진다.
사교장으로 보이는 공간.
시끄러운 귀족들의 목소리가 베일을 넘어 들려온다.
어김없이 누군가의 대신으로 연주를 마친다.
이제 자리를 피하려는데, 한 실루엣이 점차 베일로 다가온다.
진실이 드러난다는 공포감인지, 아니면 어떠한 긴장감인지 모를 심장박동이 들려온다.
베일 앞에 선 사람의 형체는 얼핏 부드러운 미소로 입을 연다.
“참 좋은 연주였소. 비밀의 신사.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규칙을 어기고 찾아왔네.”
어서 도망치듯 장내를 나가야 함에도 전생은 움직이지 않는다.
직접 칭찬을 받기는 처음인지라, 그리고 물어보고 싶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한 것이다.
일어나려던 몸을 의자에 안착시키자 베일 너머의 남성이 묻는다.
“이 곡을 연주할 때 무슨 생각을 했소?”
남자의 말에 전생의 머릿속이 울린다.
곡을 생각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음표들과 이음줄, 오선지 위에 있는 존재들을 자신이 보는 세계로 표현하면 남자가 알아들을 것인가.
하지만 뭔가 묘한 기분에 전생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는다.
“밤중에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참새, 둥지로 돌아가지 못해 뛰는 뜀걸음과 녀석이 생각했을 어둠의 공포를 생각했소.”
이쯤에서 그는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사교장에 참석할 정도였다면 연주자가 누구인지 알 테고, 그 사람과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 테지.
당장 정체를 밝히라고 베일을 겉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베일 너머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입으로 소리를 낸다.
“흥미로운 해석이로군. 트릴의 전개와 점차 빨라지는 세기를 그런 마음으로 해석했다니.”
곰곰이 생각하던 남자.
이내 베일 너머에서 옅은 미소가 보인다.
또한 미묘하게 빛나는 눈이 마주친 듯 남자의 얼굴에는 작은 환희가 떠오른다.
좋은 조언을 들었다는 듯, 그는 뒤를 돌아 작게 속삭이듯 말한다.
“내 곡을 아름답게 꾸며주어 고맙네. 베일 속의 하데스.”
바로 그가 프란츠 슈베르트.
연주한 곡의 작곡가였다.
지금은 교과서에서나 등장할 법한 인물을 직접 만났다는 전생의 기억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전생은 과거의 존재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나는 그 위용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마음과 끓어오르는 희열.
전생의 기억이 날뛰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베일에 가린 채 연주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환희가 내 심장에도 느껴졌다.
나도 은근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거장이 인정한 만큼의 연주를 보일 수 있다고.
노력만 한다면, 전생의 기억을 잘 활용하여 그때의 칭찬을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손가락이 옅게 떨렸다.
어서 움직이게 해달라고 보채는 손가락을 피아노 앞으로 가져갔다.
Allegro.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나아가는 단거리 선수처럼.
내 손가락이 일제히 건반 위로 뛰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