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1화 (11/250)

11화

김포에서 출발한 벤은 서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뒷자리에서 자고 있던 여성은 자신의 휴대폰에 맞춰 둔 알람 소리에 깼다.

여인이 안대를 벗자 잘 정돈된 일자 눈썹이 드러났다.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잡티 하나 찾기 힘든 뽀얀 피부.

피곤에 절어 퀭한 눈인데도 깊은 눈매 덕에 수수하지만 고혹적인 느낌까지 든다.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매니저가 안쓰러운 듯 쳐다봤다.

“유라야 깼어? 아직 조금 남아서 좀 더 자도 되는데.”

“아냐, 미리 일어나야 붓기도 빠지지.”

피곤해 보이는 모습으로 유라는 매니저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장장 4박 5일.

제주도 콘서트 하루를 위해서 쏟은 시간.

리허설과 무대, 연습에다 기존 스케줄까지 소화해내느라 일주일 동안 그녀가 잔 시간을 다 합쳐도 10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좋았으나 인기만큼이나 많아진 스케줄에 쉴 틈이 없었다.

이제 콘서트도 끝났으니 휴식기에 접어들 만도 하건만.

“언니. 피디님이 신곡 시안 보고 연락 주신 거 있어?”

“피디님이 도리어 쉬라고 일부러 안 주신단다!”

매니저의 장난스런 호통에 유라도 장난스레 울상을 지었다.

다들 10년 이상 함께 합을 맞춘 사람들이라 서로의 사정은 불 보듯 뻔했다.

유라도 그 마음들을 알기에 오늘은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그나저나 유라야. ‘기다려’ 약간 역주행한 거 알아?”

“잉? 왜?”

매니저의 말에 유라는 곧바로 음원차트를 찾았다.

‘기다려’는 발표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음반.

아무리 제 1 전성기 때 발표하여 여태껏 인기가 많은 곡이라지만, 순위권에 있는 것은 신기할 지경이었다.

100위권에서도 사라졌던 음원이 어느덧 50위권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주은미 선생님 방송에서 커버했는데 엄청 인기 있는 것 같더라고.”

“수석님 방송에서?”

매니저의 말에 유라는 곧바로 유튜브 채널로 들어갔다.

그녀 또한 은미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였다.

한때 평생 동안 클래식을 하고 싶어 했던 터.

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기에 찾은 차선책이었다.

은미의 연주는 위로가 되었고, 자신이 클래식을 잊지 않게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은미의 연주뿐만 아니라 게스트의 연주 또한 화두에 올랐기에 매번 빠짐없이 챙겨보는 컨텐츠였다.

그 컨텐츠 속에 이안이 있었다.

제주도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쌓인 영상들 중 하나.

이안의 연주 영상을 누르는 유라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재생과 동시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선율.

지금껏 많은 사람들의 커버를 손수 들었던 유라도 놀라게 만들 정도의 실력이었다.

싱어송라이터로 성장하기 위해 그녀 또한 피아노를 잡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원곡자인 자신도 연주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청년의 연주는 화려하다 못해 웅장했다.

수많은 오케스트라 음색으로 만든 곡을 피아노 하나로 커버했음에도 느껴지는 웅장함.

유라의 가슴 한 켠이 마구 뛰었다.

매번 인상 깊은 커버 영상을 스토리에 게재하는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른 감각이 흘렀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촉이 떨리고 있었다.

“언니, 이 친구 섭외할 수 있겠어?”

대표가 알면 기염을 토할 소식이겠지.

10년 동안 몸담았던 소속사이기에 대표의 반응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러나 유라에겐 대표의 반응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이안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유라의 가슴 한 켠이 아련해졌으니까.

유라가 ‘기다려’로 활동할 때 했던 생각.

‘당돌하게 기다려달라고 말하지만, 속으론 걱정 많은 소녀를 떠올리자.’

표정은 세상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지만, 눈빛은 우수에 차도록.

그 감정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이를 알아본 대중은 많지 않았지만.

그런데 이안의 연주는 당시 유라의 생각을 그대로 재현한 듯, 행복과 걱정이 교차하는 감정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게다가 이번 앨범에 클래식을 메인으로 한 곡을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협업할 수 있는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필요하던 상황.

연주와 더불어 자신이 작곡한 곡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이안만큼 알맞은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있던 악보에 부족한 한 피스가 맞춰지는 기분이었기에.

유라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매니저는 부정적인 생각을 내놓았다.

“누구? 이안 씨? 클래식 전공이 대중가요 거들떠보겠니?”

매니저는 질색이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에도 비슷하게 클래식 전공자를 초청하려 했으나, 미묘하게 대중가요를 깔보는 듯한 모습에 진저리를 쳤었지.

다시금 그 상황이 반복될까 하는 우려가 섞여 있었다.

“그랬으면 내 노래도 커버 안 했겠지. 한번 알아봐 줘.”

매니저는 유라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매니저 15년 차, 유라만 담당했던 그녀는 유라의 눈빛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

“피드백을 받고 싶어서 불렀다고?”

“네, 큰아버지.”

큰아버지는 내 태도가 나름 마음에 든다는 듯 딱딱했던 표정이 조금 풀려있었다.

“콩쿨까지 2주 정도 남았지?”

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남짓 주어진 시간이 불붙인 양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사이 이미 암보는 완료.

백지를 내밀면 오선지부터 음악 기호까지 상세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악보가 머릿속에 생생했다.

남은 2주는 디테일을 살리고 그 디테일의 위치를 다시금 암보한 악보 속에 집어넣는 작업이 필요했다.

전생의 기억이 필요한 부분을 가르쳐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연주에 대한 의식이 크게 변하진 않았겠지만, 현대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

또한, 전생뿐만 아니라 여러 전문가가 피드백한다면 부족한 부분을 더욱 빠르게, 풍성하게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에게는 이미 그 분야에서는 최고인 사람이 둘이나 있었으니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가감 없이 얘기해주세요.”

자신 있는 내 태도에 큰아버지는 물론 아버지까지 눈썹이 꿈틀거렸다.

프로 피아니스트를 보는 것처럼, 두 남자의 시선이 매섭게 꽂혔다.

두 사람의 태도가 변하자 순식간에 음악실은 연습실이 아닌 콩쿨장이 된 것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쿵. 쿵.

심장 소리가 귀로 생생하게 들려온다.

전생의 심장은 도리어 이 상황이 즐겁고 기대된다는 듯 세차게 뛰었다.

녀석에 동화되어 내 심장도 기분 좋은 박동을 시작했다.

어서 곡조를 보여주고 싶다고, 과거의 거장이 인정했듯, 현재의 거장에게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 기대감에 들뜬 녀석을 위해 나는 손가락을 건반 위에 살포시 올렸다.

마치 당장이라도 출발할 것 같은 경주마처럼.

희열이 들끓어 오르듯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려고 안달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말이 발돋움하듯, 손가락이 건반에 쏘아졌다.

콰광.

흡사 벼락이 내리치듯, 5개의 음이 동시에 발현된다.

D장조임에도 낮은음자리표의 선율로 시작하여 엄숙하고 침울한 시작.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레가토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바뀌는 음표들이 하나로 꿰인 채 나아간다.

크레셴도(Crescendo)

소리의 세기가 점점 강해지면서 음계가 올라간다.

무언가에 쫓기듯 두려움이 잔뜩 묻어나는 느낌.

전생은 이것을 밤 중에 떨어진 참새가 공포에 떠는 소리라고 칭했었지.

그의 감각이 실리듯 공포에 질린 심장이 뛰듯 포르테와 포르잔도의 선율을 표현한다.

시간이 지나 적응한 듯 조금씩 작아지는 소리는 트릴에 맞춰 콩닥거림으로 변한다.

전생의 가르침이 감돌자 실제로 손가락은 물론, 팔과 어깨까지 그 분위기에 맞춰 펴지고 구부려진다.

짧은 박자의 음표가 연달아 여리게 연주될 때는 조심스런 참새의 발걸음처럼 몸을 한껏 움츠리고, 고동하는 심장을 보여줄 때는 어깨를 한껏 펼쳐 손가락에 온 힘을 쏟는다.

본선에서 보여줄 것을 기대라도 하듯, 전생의 기억은 환희에 가득 찬 상태다.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모두 쏟아내자, 어느덧 10분이 넘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천천히 건반에서 손을 떼어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두 개의 레이저가 쏘아지듯, 강렬한 두 눈빛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제야 아버지는 엄숙한 눈빛을 거두고 나에게 박수를 쳤다.

큰아버지도 앞으로 쏠린 몸을 뒤로 펴면서 작게 심호흡했다.

순간, 음악실은 정적이 감돌았다.

두 분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감고 계셨다.

먼저 눈을 뜬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로 다가왔다.

“불협화음은 자칫 과하게 나타내면 괴상하게 들리기 마련이지. 그래서 약하게 연주하는 경우가 많고. 하지만… 이안이 너는 다르구나. 얼핏 감추는 것 같으면서도 강조하듯 표현한 부분이 굉장히 세련돼. 마치 작위적인 곡에서 벗어나 물체를 그리는 것 같구나.”

아버지는 연이어 칭찬을 늘어놓았다.

특히 강세와 분위기를 조절하는 솜씨에 대한 평이 대부분이었다.

레지타티브처럼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같다는 아버지의 평에 전생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대신 하나를 짚어주자면.”

아버지는 건반에 손을 올려 셋잇단음표가 즐비한 부분을 연주하셨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저력을 보여주듯, 악보도 올려두지 않았음에도 내가 연주했던 곡을 자연스럽게 피아노로 구현해내는 모습에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 손으로 펼쳐지는 음표들의 가락.

분명 잠깐, 얕게 재현해내는 모습인데도 섬세한 성격이 묻어난 연주는 풍부했다.

빠르게 부분을 재현하신 아버지는 나를 향해 돌아앉았다.

“네 연주와 차이점을 알겠어?”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번 연주에서 다른 음을 치는 바보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다.

암보와 함께 좀처럼 되지 않던 정확한 음을 짚는 법을 몇 번이고 연습했었기에 그 부분은 자신이 있었다.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하자 아버지가 방금 선보였던 연주가 머릿속에서 감돌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

반복적인 음을 표출하는 것은 나와 같았지만, 아버지의 연주는 미묘한 차이로 나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아버지의 연주를 되새김하던 중 나는 차이점을 깨달았다.

“약지까지 사용하시네요.”

아버지는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음계를 오르내릴 때 검지와 중지를 쓰고 곧바로 엄지를 사용하는 나와 달리 아버지는 부분에 따라 검지에서 약지까지 사용하고 계셨다.

손가락 하나의 차이였지만, 그에 따라 바뀌는 자연스러움은 배가 됐다.

“원래 음계 변환은 두 손가락으로 하는 게 간편하긴 해. 손가락 가동 범위도 그게 훨씬 짧고. 하지만, 슈베르트 소나타처럼 음표가 세 개씩 붙어 있거나 더 많다면 빠르게 바꾸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누르는 게 더 자연스럽지.”

냉철하게 기술에 대한 피드백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

큰아버지도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에 나도 피아노 앞에 앉아 아버지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했으나, 아직 뭉친 손가락은 물론 당장 박힌 변환법을 바꾸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스킬은 전생의 기억도 놀란 듯 꽤나 어려운 기술이었다.

보통 음계 이동에는 엄지에서 중지까지, 세 개의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단순히 허공에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어색한데, 아버지께서는 이것을 기술로 익히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묘한 존경심이 가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금 입을 열자 몸이 꼿꼿하게 굳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버지가 아닌 한 명의 프로 피아니스트 같았다.

조금이라도 더 선배의 가르침을 받고자, 내 귀가 활짝 열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은 말은 뜻밖이었다.

“사실 할 말이 이것밖에 없구나.”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씀하셨다.

무언가 더한 것이 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에 반해 칭찬인지, 비평인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반응에 몸이 당황했다.

“분명 프로 피아니스트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아. 그러나 이제 3개월 남짓 피아노를 잡았는데, 이 정도 수준이면 손댈 게 없다고 생각한다. 빠른 이동에서 음색이 조금 더 자연스러웠으면 하는 바람에서 얘기한 거지, 사실 문제는 없었고. 저번보다 오른손도 많이 풀렸는지 훨씬 유연하더구나.”

엄숙한 아버지의 말이 스포르잔도를 띤 듯 강하게 들려왔다.

평가로서 듣는 아버지의 인정은 처음이었으니까.

갑작스런 피아노 연주에 당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 명의 피아니스트 지망생을 바라보는 눈길.

나를 향한 아버지의 눈빛에 불길이 일렁이는 듯했다.

“속도가 빨라져도 건반을 정확하게 치고, 손가락을 교묘하게 사용해서 레가토를 이어가는 것까지. 사실 전공생에게 몇 번 가르쳐도 소화하지 못하는 어려운 기교들이야. 그걸 모두 소화해내면서 특유의 셈여림까지 표현하기까지. 솔직히 볼 때마다 놀랍구나, 이안아.”

아버지의 평가는 칭찬 일색이었다.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의 태도에 편안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내가 했던 연습이 헛되지 않았구나.

“형은 할 말 없어?”

아버지의 말에 큰아버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그나마 낫네.”

큰아버지의 말에 나는 가슴이 더욱 뛰었다.

지난번에도 자신의 입으로는 칭찬 한 번 안 하셨던 분 아닌가.

아버지에 이어 큰아버지도 인정했다는 생각에 마음 한 켠에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큰아버지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무언가와 비교하는 뉘앙스.

그 대상을 모르는 탓에 내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너희 큰아버지, 이번에 학장님 부탁으로 한국대 피아노 전공생들 피드백하고 오셨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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