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본선.
수많은 예심에서 붙은 자들만이 무대 위에 오를 수 있다.
각지에 내로라하는 대학교 학생들과 피아노에 온 몸을 던진 사람들이 모인 곳.
그중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옛날 생각나네.”
아버지가 작게 읊조렸다.
장내를 살피는 아버지의 눈빛이 사뭇 우수에 젖어있었다.
과거 자신이 콩쿨을 나왔을 때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높은 위치에서 새로 자라나는 새싹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의 눈길은 나를 향했다.
갑자기 전공을 바꿨음에도 잘해 내고 있다는 듯, 아버지의 손이 내 머리를 훑었다.
“이안아!”
살가운 부름에 고개를 돌았을 때, 나는 순간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은은한 하늘빛이 감도는 드레스를 입은 여인.
눈 아래의 점이 돋보인다.
“서지현?”
지현이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가리다시피 한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길게 내려오던 뒷머리는 단아하게 묶어둔 상태였다.
앞머리가 얼굴을 감추는 것만 없어졌을 뿐인데 그녀의 인상이 크게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그녀 곁에는 어김없이 그 또한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리고…”
녀석은 난데없이 아버지에게 90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박수철 선생님. 선생님을 보고 피아니스트의 꿈을 꾼 정우식이라고 합니다. 매번 선생님의 연주회에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감명을 받고 귀가하곤 했습니다.”
우식의 멘트는 정갈하면서도 단정했다.
마치 클라이언트를 맞이하는 기업의 담당자처럼.
언행은 부드러웠고, 몸짓에는 각이 살아있었다.
그 덕에 당황하실법한 아버지도 곧장 미소를 머금은 채 우식을 맞이했다.
“고마워요. 이따 연주 기대하죠.”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그는 어김없이 아버지에 대한 팬심을 표출했다.
자신이 한정판 LP를 구매했다는 말과 해외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비행기를 예매했다는 이야기, 심지어 아버지를 닮고 싶어 연주 습관을 따라 한다는 말까지.
아버지는 자신이 그런 습관이 있었냐며 놀랄 정도였다.
콩쿨에서 잘 해보라는 아버지의 덕담이 우식과 지현, 그리고 나에게까지 흐르고 나서 우리는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예선처럼 백스테이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쩌면 예선 때보다 더.
경쟁자를 의식하듯,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미묘한 날카로움마저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보내는 날카로운 적의에 누군가는 움츠러든다.
기 싸움. 어느 경연장이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시죠 선배님?”
생글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우식이었다.
친근한 표정에 여유로움까지 느껴지는 면모.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악보를 보거나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여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첫 본선 진출인데 떨어져도 아쉬워 마세요. 첫 콩쿨에 순위권도 대단한 거니까.”
그의 태도와 말투에서 미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분명 내용은 조언투에 가까웠지만, 뉘앙스는 조언이나 위로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도리어 당연하다는 듯, 마치 여기에서는 자신이 선배라는 듯.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거였구나.
간신의 웃음 같다는 표현이.
“참가번호 5번, 정우식. 올라가실게요.”
“그럼 선배님, 수고하세요.”
툭툭 말을 던지던 우식은 제 이름이 호명되자 스테이지로 나섰다.
위풍당당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걸음걸이.
스테이지 한 켠에 있는 심사위원을 향해 인사를 하는 모습은 전생의 기억 속 귀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 귀족은 겉보기에도 거들먹거리는 것이 눈에 보여 보기 싫었는데.
녀석의 태도는 마치 내가 본래부터 아랫사람이라는 듯 악의 없이 자연스러웠다.
저 녀석도 재벌 총수의 아들이랬던가. 지현이랑은 다른 성격이다.
시작하라는 사인에 우식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토벤 소나타 23번.’
일명, <열정>.
짧은 전주를 시작으로 빠른 음표들의 연속적인 전개가 휘몰아친다.
프레스토 템포로 연주되는 면모에서 음악에 깃든 분노와 열정이 풍겨온다.
과거 베토벤이 느꼈던 격렬한 정열과 비탄, 그리고 행복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했던가.
우식은 그것을 재현하려는 듯 연주에 힘을 가한다.
심지어 여유 있는 손놀림은 왼손이 오른손을 넘어 음표를 이룰 때 빛을 발했다.
건반을 빨리 쳐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재촉할 법도 하건만, 그 사이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처럼, 그의 손은 용수철처럼 부드럽게 튀어 정확한 지점을 강렬하게 짚는다.
‘대단한 평정심이다.’
본래 무대에서는 긴장감 때문에 속도가 빨라지기 마련이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라면 더욱, 빠른 템포의 곡을 연주한다면 더욱더.
그러나 우식의 표정은 지금을 즐기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미묘한 웃음에서는 지금 감도는 열정을 모두 표출할 수 있다는 듯 강대한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그는 정확한 속도로 양손을 움직인다.
2옥타브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펼쳐지는 손가락의 세례.
음계를 내려오는 면모에서 그가 말했던 아버지의 습관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아버지가 알려주셨던 변환법.’
중지에서 엄지로 갈아타는 것이 아닌, 약지까지 활용하여 음계를 오르내리는 기술.
우식은 아버지를 존경하다 못해 그것마저 가져온 듯했다.
이외에도 그는 건반을 누를 때 미묘한 속도로 차이점을 주어 선율의 차이점을 만들어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지금껏 내 또래 사람들이 연주했던 것과 비교하면 가히 최고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
그러나 그 또한 미묘한 기계적인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감정을 끌어 올려 열정을 표현하기보단, ‘열정’이라는 단어를 따라 쓰는 것처럼.
우식 역시 오선지를 그대로 끄적이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곡에 담긴 기교를 표현하는 것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기에.
그의 무대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심사위원들 일부도 박수를 조그맣게 칠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무대.
백스테이지에 있던 다른 출전자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우식이 이 곡을 선택한 이유는 화려한 기교 말고도 다른 것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에 나는 넘어가지 않았다.
도리어 미묘한 자신감이 내 앞에 감돌았다.
“참가번호 6번, 박이안. 올라가실게요.”
다음은 내 차례였다.
준비를 하고 나가려는데 지현이 조심스레 주먹을 쥐어 내보였다.
화이팅!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매번 하던 것처럼 엄지손가락을 내보이곤 무대로 향했다.
백스테이지로 들어오는 우식이 미묘한 웃음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우두커니 놓여있는 그랜드피아노에 눈이 쏠렸으니까.
쓸쓸한 듯 보이지만 혼자 있는데도 그 위용은 대단했다.
이전보다 넓어진 무대의 크기와 그에 비례하여 많아진 관객석.
찬란한 조명이 나를 향해 흩뿌려졌다.
나는 심사위원과 객석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의자에 앉았다.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자 암보해둔 악보가 스쳐 지나간다.
5개의 줄이 그어지고, 가장 먼저 높은음 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가 떠오른다.
이어 음표들이 오선에 걸려 떠오르면 머릿속에 이미지가 형형한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이미 손가락은 건반 위에 올라가 있었다.
***
지현은 소심할 뿐, 성숙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매번 사람들 앞에서 움츠러들었지만, 그랬기에 주변 사정을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그녀의 눈에 우식은 한 마리의 뱀이었다.
“지현아. 끝나고 자축하는 의미에서 호텔 디너쇼 갈까?”
재벌가에는 이런 녀석들이 많았다.
매번 최고의 서비스, 최고의 대우만 받았다 보니 자신의 행동과 업적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녀석들.
대부분 부모의 엄청난 지원 덕에 남들보다 일찍 천재성을 찾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재벌 2세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곤 했다.
지현이 생각하기에 우식은 그중에서도 심한 케이스였다.
분명 그의 천재성은 높이 평가할 만했다.
빠른 암보 능력과 활용성, 거기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까지.
그러나 그는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지 않았다.
매번 레슨에 빠지며 거들먹거리기 일쑤.
지금도 그랬다.
연주도 시작하지 않은 콩쿨에서 1위라도 한 듯, 우식은 여유로웠다.
“우리 엄마 성격 알잖아. 또 1등도 못했다면서 어딜 놀다 왔냐고 하실 거야.”
이럴 때 선미는 좋은 바리케이드가 되어 주었다.
우식 또한 선미의 극성을 알았기에, 지현이 선미의 이야기만 하면 별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와중에 이안이 등장했다.
재벌가 신경을 쓰지 않고 왕래했던 친구이자, 솔직 담백한 이야기만 하는 이안.
허례허식에 찌든 재벌가 아이들보다 훨씬 나았다.
모든 게 평소보다 좋았다.
이안의 등장에 우식의 눈빛이 변했다는 것만 빼면.
사람들 앞에서는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우식이었지만, 지현은 그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은 무조건 가져야 속이 시원한 녀석.
지현은 자신에게 향한 그의 표현, 대시도 그의 일부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이안에게 미소를 보인 후로 우식의 질투가 시작됐으니까.
그 질투가 담기듯 우식의 연주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잘 벼려진 칼 같애.’
오랫동안 같은 레슨 선생님 아래에서 연주를 봤던 지현이었다.
큰 키에 걸맞은 긴 손가락,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실력.
우식은 그 덕에 아르페지오 선율에서 특출남을 보였다.
빠르게 스치는 음표들의 향연에도 그는 멈춤이 없었으니까.
다른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기술들을 보기 좋게 소화하는 모습에서 선생님은 천재라고 일컫기도 했으니까.
이번 콩쿨 연주도 다르지 않았다.
경쟁사를 모두 없애고 나아가는 아버지의 성정을 닮은 듯, 우식의 연주는 장애물을 베어나갈 듯이 압도적이고 날카로웠다.
그 증거로 연주를 들은 일부가 자신감을 잃고 동공이 떨렸으니까.
그러나 변화가 없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참가번호 6번, 박이안. 올라가실게요.”
그녀는 오랜 친구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에 화답하듯 이안도 미소를 지었다.
대가 없이 편안한 미소에 지현도 떨리던 동공이 제자리를 찾았다.
이안이 연주를 시작하자 지현은 조심스레 입구를 향해 고개를 뻗었다.
그리고, 이안의 손가락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Allegro.
연이은 셋잇단음표의 세례에 빠르면서도 잔잔한 선율이 장내로 퍼져나간다.
마치 밤안개를 떠올리듯, 낮은음에서 시작한 선율은 어느덧 데크레셴도의 지시 아래에 여린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내, 중간중간 플랫이 들어가며 음악이 반전된다.
은은한 밤거리에서 다른 이의 발걸음을 들었다는 것처럼.
이안의 연주는 공포에 젖은 사람의 발걸음을 표현하듯 급박해진다.
동시에 5개나 되는 건반을 누르며 화음을 선보이자 심장이 내려앉듯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러나 다시금 가벼워지듯, 다채로운 음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마치 음악을 듣는 이들과 밀당을 하듯.
적절한 셈여림은 지현의 마음마저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우식과 이안의 연주를 비교하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도리어 임팩트만 고려한다면 우식의 연주가 더욱 강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일까.
분명 임팩트는 우식이 더 나았는데, 지현의 머릿속에는 이안의 연주만 감돌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 지현은 이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안이의 연주는 칼이 아닌 손을 떠올리게 해.’
피아노는 당연히 손으로 치는 것일 텐데, 기묘하게도 이안의 연주는 손을 떠올리게 했다.
이안의 연주에는 따스함이 섞여 있었고, 날카롭고 묵직함이 섞여 있었으며, 간질거리게 하는 끌림까지 섞여 있었다.
마치 고스란히 자신의 이야기를 내려놓는 모습.
순간, 지현은 이안이 기술만 추구하는 연주자가 아니라 창작자로 느껴졌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를 내려놓는 창작자.
기승전결처럼 그의 연주에서는 높낮이가 느껴졌다.
그 탓일까.
이상하게도 이안의 연주는 장엄한 그랜드피아노가 아니라, 이안의 몸체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지현은 문득 처음 자신의 머리를 들췄던 이안의 손길을 떠올렸다.
미묘한 심장박동이 지현의 뺨에 홍조를 띠게 한다.
다른 사람들이 지현의 박동을 대신 표현해주듯, 우레와 같은 박수가 관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심사위원석에서도 기립 박수가 나올 정도로.
지현도 질세라 박수를 쳤다.
친구를 응원함과 동시에 길을 알려줬다는 감사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