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피아노의 길을 걸었던 자로서 미안한 것이 있습니다.
잔잔하게 울리는 선율을 감상하지 못하게 검으로써 잡도록 만든 것이.
저는 그 사이에서 검이 아닌 방패를 든 누군가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찌르기 위함이 아닌, 지키기 위한 연주.
지금은 자신을 지키고 있는 방패를 언젠가 타인에게도 선사해주길 바라며.
앞으로 있을 그의 연주를 응원하겠습니다.
심사위원 김종수.
우승 트로피와 함께 곁들여진 카드.
그 위에 펜으로 수놓아진 글씨는 선생님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났다.
짧은 시간 만에 이런 표현을 받아도 될지 감개무량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작은 손으로, 바이올린을 잡아 뭉친 오른손으로 연주를 하기까지.
아직도 가르침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전생의 기억은 물론이고 아버지, 어쩌면 큰아버지의 가르침까지.
원하는 꿈에 도달하기까지.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이번 트로피는 그 장대한 여정의 시작이리라.
선생님의 말씀대로 앞으로 있을 연주들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절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출사표에 아버지가 선물을 준비했다.
본래 음악실에 있었던 하얀 그랜드피아노 곁에 검은 그랜드피아노가 놓였다.
서로 등을 맞댄 듯,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아우터가 서로 맞닿을 듯 있다.
자리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면 악보 너머로 서로의 얼굴이 보일 것만 같은 모습.
축하한다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의 옅은 욕심이 엿보였다.
“우승 축하한다! 선물 마음에 드니?”
요즘 무언가 계속 알아보는 눈치시기에 선물을 준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그것이 그랜드피아노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아버지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건 네 피아노야. 앞으로 피아노를 칠 때 너만의 색깔을 찾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해. 그러니 앞으로 피아노에 네 생각과 이야기를 새겨 나가렴.”
아버지의 말에 전생의 기억이 약동했다.
전생 또한 개인 피아노의 중요성을 안다는 듯 아버지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자연스레 피아노를 쓰다듬는 손길에는 자신감과 함께 뭉클한 미련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건반을 만지고 싶다는 듯 심장이 꿈틀댄다.
하지만, 아직 단계가 하나 더 남았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어르신.”
“멀긴 무슨. 수철 씨 피아노도 조율할 때가 되었지 않습니까. 겸사겸사 오는 것이지요.”
멜빵 바지 차림으로 들어온 조율사.
피아노의 소리를 보다 훌륭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백발이 성성하지만, 그 미소만큼은 청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환했다.
1년에 두 번 정도 아버지의 피아노를 조율하러 오기에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저 틀린 음을 바로잡아준다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피아노에 익숙해지자 흘려보냈던 과거의 일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럼 아들내미 피아노부터 해볼까요?”
조율사는 연장을 꺼내 피아노로 다가갔다.
마치 너트를 조이듯, 조율사의 도구가 조율핀을 돌리자 건반에서 나던 소리가 미세하게 변화했다.
겉보기엔 큰 차이를 알 수 없는 음색.
그러나 이제는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조율사가 건반을 누르며 핀을 조금씩 조절하자 청아한 음계에 끼어있던 파열음이 단숨에 잡혔다.
조율사의 행동에 전생도 과거 피아노를 조율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움찔거렸다.
신이 시기할 정도로 완벽한 연주에는 피아노의 도움도 필요했으니까.
전생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미리 조율사에게 서신을 보내곤 했다.
아마도 조율사가 서신을 보고는 혀를 찼을 테지.
그가 요구한 조율 방향은 A4용지 다섯 장을 족히 채울 정도로 많았으니까.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길 원하는 듯 뛰는 심장을 겨우 달랬다.
“이 정도면 마음에 들어요?”
30분가량을 한 옥타브 조절을 하신 조율사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조심스레 도에서 다음 도까지 차례로 건반을 눌렀다.
아까 있던 미묘한 파열음들은 사라졌고 선명한 음색만이 음악실에 울렸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운 기분.
“선생님, 혹시 조금 더 톤을 낮출 수 있을까요?”
“... 이렇게요?”
조율사는 행동으로 보였다.
내 요청에 곧바로 도구를 움직이던 조율사는 이내 다시 건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맑은 소리가 내는 음은 같았지만, 미묘하게 낮아진 음은 같은 음인데도 웅장한 기운이 풍겼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율사는 알겠다는 듯 나머지 옥타브들도 차례로 조율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신기한 듯 다가왔다.
“차이를 느꼈니?”
“조금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였지만, 놀라움에 약간 벌어진 입은 막지 못하셨다.
음색의 차이를 알아내는 것은 프로의 영역일 테니.
조율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군데군데 태클을 걸었다.
조율사가 다음 음으로 넘어가려 할 때, 음에서 2%의 아쉬움이 느껴질 때마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섰다.
다행히 조율사는 그런 내 모습을 귀찮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내가 원하는 음색,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만들어주시는 조율사 덕에 90개에 달하는 건반들이 제각기 색깔을 찾아갔다.
세밀한 조정이 이어진 탓에 전체 조율을 하는 데 3시간이나 걸렸다.
조율을 마친 조율사는 홀가분한 듯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아드님이 좋은 귀를 가졌네요. 조율사를 해도 되겠어요.”
조율사의 칭찬에 아버지가 미소를 내보였다.
나는 어느덧 이미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소리를 내 피아노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움찔거렸다.
누가 이야기할 것 없이 손가락이 건반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쇼팽 왈츠 11번.
다시금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콩쿨 예선에서 선보였던 음색이 음악실을 가득 메웠다.
아니, 같은 음색이라고 하면 피아노가 섭섭해하리라.
콩쿨 무대에 있던 피아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련한 소리가 울렸다.
건반에 이어진 줄이 해머를 당겨 울림판을 건드리는 소리가 이렇게나 청아할 수 있구나.
새삼 조율의 영향이 크게 다가왔다.
예선에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 폭풍을 만들어냈다면, 이곳에서는 얼음으로 된 비가 내리듯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얼음으로 만들어져 날카롭지만, 폭풍처럼 묵직하면서도 웅장하게.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었지만, 지금 귀에 들려오는 멜로디는 입으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좋다.
마음이 울리는 표현은 그게 전부였다.
그때 그 얼음 폭풍 속에서 무언가 스며들어오듯 다른 멜로디가 더해졌다.
어느덧 반대 피아노에 앉은 아버지가 건반에서 손을 움직였다.
마치 폭풍을 뚫고 나오는 한 마리의 불곰처럼.
묵직한 음색이 더해지면서 화음을 이뤘다.
‘놀랍다.’
수많은 놀라움이 한데 교차했다.
음악이 자연스레 그려지는 것도 놀라웠고, 그것에 아버지의 음색이 더해져 풍성해지는 모습도 놀라웠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내 심장이 진실된 즐거움으로 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번 베일 뒤에서 연주를 해 아쉬움을 승화시켰던 전생의 심장.
이번 연주에서도 다른 누군가와 교감한다는 것에 신이 난 듯, 북받친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전생에게 이 환희를 뺏기기 싫을 정도로 내 욕심도 커졌다.
댓글에서 전해지던 마음과 직접 찾아와 사인을 받아간 청년의 응원, 그리고 아버지와의 연주.
혼자만의 사투 같았던 연주가 어느덧 누군가와의 소통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외로이 싸웠던 느낌이 아닌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 나가는 기분.
어쩌면 이것이 선생님이 기대하는 방패의 이미지이지 않을까.
앞으로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향하는 여정에서 어떤 걸음을 걸어야 할지 갈피가 잡혔다.
연주를 뒤에서 바라보던 조율사는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박수를 쳤다.
감명 깊었다는 듯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다.
나는 그런 조율사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우러러 나온 말.
앞으로에 대한 기대감에 내 입가에는 미소가 함께 떠 있었다.
그 정도로 피아노가 만들어낸 선율이 마음에 들었다.
고작 마음에 든 정도뿐일까.
앞으로 큰 대회가 있으면 조율사께 부탁하여 지금의 선율을 재현하고 싶을 정도인데.
조율사에게도 예의를 갖추는 내 모습이 대견하셨는지 아버지도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
아버지 또한 눈시울에 잔잔하게 감정이 떠다녔다.
작은 꿈을 꾸신 듯.
묘한 감정에 젖어들려던 때, 아버지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을 건넸다.
“아, 큰아버지가 한번 오케스트라 찾아오라 하더라.”
***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큰아버지가 관객석에 앉아 있던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딱딱했지만 진심이 어린 축하.
나도 그것에 맞춰 담담하게 응수했다.
그러나 한 켠에는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다.
큰아버지께서 드문 칭찬을 하셨다는 것도 있었지만, 큰아버지가 직접 찾아오라고 말씀을 하실 정도면 무언가 있으리라.
그러나 서로 눈치 싸움을 하듯, 우리는 한참 동안 오케스트라 단원만 쳐다봤다.
“곧 무대가 있다. 게스트로 한번 올라오거라.”
큰아버지의 첫 마디.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애피타이저 무대.
콩쿨 우승자와 같은 신인 루키를 공연의 첫 무대로 올리는 것.
본식을 위해 속을 달래주는 의미처럼 공연의 기대감을 올리는 대한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무대였다.
거대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마에스트로이면서도, 자라나는 새싹을 키우고픈 큰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자리.
그 자리에 올리려는 큰아버지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좋고 나쁜 평가를 하고 계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인정.
조카를 무대에 올려도 잡음이 없을 거라고 판단하셨을 믿음.
그것만으로도 이번 콩쿨의 큰 수혜였다.
어쩌면 아버지가 선물한 그랜드피아노보다 더 값진 성과이리라.
그런데 입은 이 좋은 제안에 당장 수락할 마음이 없는 듯 멈춰 섰다.
‘이게 지금 당장의 최선일까?’
대한 오케스트라에서의 루키 데뷔전.
그 의미가 가지는 수준을 나도 알고 있었다.
공연 일정이 잡히면 곧바로 기사 핫라인을 타고 온갖 홍보가 이뤄지는데 모를 리가.
클래식의 장에 이름을 알리는 데는 그보다 좋은 일이 없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머리가 한층 더 신중하게 돌아갔다.
본선 우승이라는 타이틀이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아버지의 축하와 큰아버지의 인정.
그동안 내가 원했던 것이 맞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으니까.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알아보는 사람도 있는데다 올라가는 조회 수를 보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 뻔했다.
게다가 지금 큰아버지가 제안하듯, 다른 악단이나 협주회 주최 측에서도 연락이 올 수도 있으리라.
수많은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지금.
단 하나의 무대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러한 생각 중 결론에 닿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큰아버지,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리 쉽게 저를 채가시려는 건 상도덕에 어긋난 것 같습니다.
“생각 좀 해볼게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큰아버지가 당황한 얼굴을 처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