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16화 (16/250)

16화

‘말 대신 행동이지.’

나는 천천히 전자 키보드를 향해 다가갔다.

아직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유라는 그저 눈만 끔뻑였다.

세레나데.

저녁 음악이라는 뜻처럼 잔잔한 선율이 흐르는 곡.

전생이 기억할 때는 어둑해질 시점에 가볍게 치는 연주곡에 불과했다.

유라가 말한 것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는 창가를 향해 부르는 곡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듯 내 머릿속에 오선지가 그려진다.

악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 곡은 사랑스런 곡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말 없이 키보드의 전원을 켰다.

묵직한 피아노의 건반과 달리 플라스틱을 만들어진 키보드가 전자음을 토해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있었지만, 이걸로 보여줄 수밖에.

Moderato.

D단조의 나지막한 선율.

검은색 커튼을 상상하게끔 낮게 깔린 음들.

그 위에 발걸음 같은 두 개의 화음이 나아간다.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처럼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연약한 음색이 작업실을 조금씩 채워간다.

느릿하게 진행되는 선율은 저녁 음악이라는 느낌에 걸맞게 잔잔하다.

피아니시모의 향연으로 피아노 소리는 무척이나 여렸지만, 분위기는 아니었다.

밤이기에 더욱 울리는 소리처럼.

음표는 귀를 통해 들어와 심장을 고동시킨다.

눈을 감자 전생이 무언가 보여주려는 듯 이미지가 떠올랐다.

달빛에 그늘진 나무 아래에 서 있는 남자.

그는 불이 켜진 창가를 바라보고 있다.

창가 너머로 재잘대는 하인의 목소리와 집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평소 같았으면 들리지 않았을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린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들리는 소리는 열린 창가 사이로 들려오는 허밍 소리.

바로 그가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였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세레나데의 특성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 덕에 나는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의 특이점을 알고 있었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사랑스런 고백이 아니에요.”

“그러면…?”

유라가 내 연주에 집중한 채로 물었다.

설마.

그녀의 표정에 정답이 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지금 상상하는 것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기에 더욱 슬픈 이별곡이죠.”

나는 계속해서 키보드 건반을 눌렀다.

남자는 알고 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소리를 치면 그녀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사랑하는 이가 더욱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목 위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수풀 싸여 덮인 곳에 따뜻한 사랑, 적막한 밤 달빛 아래 꿈을 꾸었네.’

슈베르트 세레나데에 붙은 가곡의 가사가 떠올랐다.

수풀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달빛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슈베르트에겐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남겨두고 보내줘야 하는 마음.

그러나 그 마음마저 무겁기에 비교적 높은 음으로 시작했던 왼손의 위치가 곡의 말미에는 한 옥타브나 낮아져 있었다.

피날레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페르마타까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셰익스피어의 시를 보고 영감을 얻어 그 자리에서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세간에 알려진 것은 거기까지.

전생의 기억 속 슈베르트는 천재적이었지만, 소극적이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간혹 사교장에서는 그의 슬픈 연애 소식이 들려오곤 했으니까.

보통 사람은 모를 세레나데 속의 진실이 내 손끝에서 펼쳐졌다.

유라는 내 해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지만, 반박할 수 없는 듯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 그녀도 연주를 듣고 묘한 슬픔을 느꼈으리라.

당황한 그녀를 향해 나는 차근히 슈베르트의 이야기를 전했다.

“슈베르트는 평소에도 무척이나 우울한 사람이었대요. 꿈이 좌절될 뻔도 하고, 사랑하는 이를 붙잡지 못하기도 했고요.”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과 전생의 정보가 혼합되어 입에서 흘러나왔다.

실제 그는 사랑하는 이를 놓친 기억도 있었으니까.

아마도 슈베르트는 그때의 감정을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다가 셰익스피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

전생은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었다.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았군요?”

내 끄덕임에 유라는 목을 뒤로 젖힌 채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그러나 곡 해석이 잘못되었을 뿐, 곡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악보를 봐도 기본적인 화음과 조성들은 클래식에 관심이 많았던 것을 보여주듯 체계적이게 꾸며져 있었으니까.

단지, 분위기가 그녀가 원래 생각했던 밝은 분위기였을 뿐.

게다가 수십 년을 음악에 쏟았던 유라의 노하우가 담긴 부분도 적지 않았다.

완전히 폐기하고 새로 쓰기엔 아까운 곡.

나는 옆에 있던 펜을 가져왔다.

“원래 이런 곡이죠?”

내 말에 유라가 몸을 바로 세워 나를 향했다.

키보드를 누르자 발현되는 선율.

유라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끊기 전까지 들렸던 전주의 멜로디가 그대로 키보드에서 피어났다.

기본적인 론도 형식에 맞춰 전개되는 곡.

변주를 섞어 반전의 묘미까지 첨가한 수준 높은 곡이었다.

“첫 시작은 괜찮아요. 저녁 느낌을 살리신 것 같은데, 이어지는 들뜬 느낌을 조금 더 차분하게 바꿔볼게요.”

“바로?”

유라의 질문에 나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답이라도 알려주듯 악상이 차곡차곡 쌓였다.

마치 흔한 판타지 영화에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돌다리가 생기는 마법이 일어나듯.

가상의 오선지에 음표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론도 형식의 시작, A.

내 손이 스치자 곡조가 자연스레 나왔다.

기존과 비슷하면서도 갑자기 장조로 튀어 나가지 않게 몇 가지 화음을 조정했다.

화음의 간격이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산뜻한 곡이 차분하게 뒤바뀌었다.

“다음은 B형식. 하이라이트를 주는 부분이죠? 사랑한다는 느낌은 그대로 가되, 슬픈 사랑의 이미지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말과 함께 기존의 선율과 내 생각이 첨가된 선율이 차례로 이어졌다.

이제 유라도 당황한 기색을 떨치고 내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몇몇 부분은 컴퓨터로 옮겨적었지만, 내 속도는 그녀보다 빨랐다.

“반복된 A는 그대로 가시고, C에서는 반전 주셨죠?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대신 격한 분위기에 낮은음을 섞어서 더 웅장하게 바꿔볼게요.”

차분하던 화음의 세기를 넓게, 그리고 크게.

마치 참았던 마음이 폭발하는 것처럼.

상상하던 멜로디가 그대로 키보드에서 펼쳐진다.

어느덧 깨끗했던 악보는 이곳저곳에 얼룩처럼 내가 쓴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마디까지 내 손이 닿자 어느덧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러나 나는 쉬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곡을 많은 사람한테 보이고 싶었으니까.

눈앞에 놓인 악보를 볼 필요는 없었다.

악보에 메모를 한 것은 유라가 편하도록 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

이미 머릿속에 자리 잡은 악보가 스스로 소리를 낸다.

나는 그 곡조를 그대로 펼칠 뿐.

앞서 변경했던 모든 곡조가 내 손가락에 따라 연이어 펼쳐졌다.

***

유라도 나름 활동한 지 10년이 넘은 가수였다.

일찍 데뷔를 한 만큼 후배도 많아졌고, 그에 따라 자신의 음악 소양도 쌓였다.

클래식을 하고자 하는 욕심에 부족한 잠을 더욱 줄여가며 음악에 매진했을 때도 있었다.

보컬 연습에 춤 연습, 무대까지 오르고 녹초가 되었음에도 오선지를 채워가는 일은 항상 그녀를 북돋곤 했다.

언젠가 이 오선지에서 피어난 곡이 자신의 앨범에 들어가길.

더 나아가 앨범 전부를 자신이 만든 곡을 채우길 원했다.

자부심.

오랫동안 음악을 해왔던 그녀에게 차곡히 쌓였던 그 마음.

그랬던 터인데, 눈앞에 있는 청년은 그 자부심마저 내려놓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연주를 쏟아내고 있었다.

‘분명 내 곡의 뉘앙스가 나와.’

청년의 선택에는 거침이 없었다.

보통 유라 정도의 가수가 되면 자신의 아이디어가 함부로 훼손되는 것이 거북할 법도 한데, 유라는 전혀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더 큰 벽을 맞이한 사람처럼.

펼쳐지는 음색에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모든 것이 뒤엎어지는 줄 알았지만, 청년은 유라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듯 기존에 유라가 사용했던 화음을 지켜주고 있었다.

단지 화음의 위치를 교묘하게 바꾸거나 과하게 환한 장조를 단조로 바꾸면서 곡을 매끄럽게 매만졌다.

마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유라의 의식이 성장하듯.

아침처럼 발랄하게 감돌던 사랑이 어느덧 저녁 하늘처럼 은은한 사랑으로 변해있었다.

‘창문 틈에 비치는 너를 향해 속삭이면 과연 너는 나를 향해 문을 열까.’

유라가 기존에 썼던 가사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사들을 읊조리고 있었다.

분명 사랑 노래에 맞춰 상쾌하게 진행하던 가사들이었는데, 반주가 바뀌는 순간 곡의 분위기가 반전된다.

당장이라도 소리쳐 상대를 부르고 싶은 마음에서, 과연 내가 불러도 될까 싶은 떨리 마음으로.

유라는 신비로움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그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가사가 다른 느낌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할 뿐이었다.

게다가 가수로서 그녀의 마인드도 가능성에 꿈틀댔다.

‘사람들은 좋은 사랑보다 슬픈 사랑에 더욱 공감하는 법이지.’

봄이 되면 어김없이 마음을 간질이는 사랑 노래가 인기였다.

벚꽃만 피면 차트를 역주행하는 명곡도 있지 않은가.

설레는 첫사랑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기분이 좋아지는 곡, 본래 이번에 만들고 싶었던 테마였다.

그러나 이안의 연주를 보고 직감했다.

사람들이 더욱 공감하는 곡은 지금처럼 슬픈 사랑을 노래하는 곡일 거라고.

유라 또한 가지고 있는 감정이었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이 아팠던 기억,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해본 기억, 오랫동안 함께했던 반려동물을 잃었던 기억.

분명 전혀 다른 상황에서 발생한 기억들인데도 모든 기억들이 한 감정에 섞여 머릿속에 감돌았다.

들끓는 감정들에 어느덧 유라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베테랑인 자신조차 넋을 놓고 눈물을 떨어뜨리는데, 일반 대중은 어떻게 될까?

‘서로 슬펐던 기억을 떠올리며 노래를 감상하겠지.’

대중들도 다르지 않으리라.

방금 유라가 떠올린 기억들처럼 저마다의 슬픈 기억들을 떠올려 곡에 대입시킬 테지.

이미 그 역할을 웅장한 피아노 음색이 해주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니까.

이안의 연주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슬픈 기억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밀려오는 감정에 유라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 부분을 움켜잡았다.

슬픔의 감정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흥분된 마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 웅장한 멜로디에 가사를 써 내려가면 어떨까.

멜로디가 휘어잡아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

걱정, 이별, 죽음.

하나의 곡에서 튀어나올 사람들의 감정들을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했다.

유라는 가사로 이 감정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프로인 자신마저 떨리게 만드는 이안의 실력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작곡도 겸했었나?

화음을 절묘하게 섞어 자욱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부터 2절에는 약간의 변주를 주어 미묘한 차이를 만드는 것까지.

심지어 하이라이트에 이안은 피아노 솔로를 집어넣어 격해진 감정을 터뜨리는 연출까지 숨겨두었다.

환상(幻想).

이안의 연주에 그녀가 그려두려고 했던 이미지가 미묘하게 바뀌어서 선사된다.

당돌한 고백은 어느덧 현실적인 걱정에 무뎌지고, 걱정 가득한 마음에 하루하루 말라가는 마음에 지치는 모습까지.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애절한 마음이 상상 속에서 펼쳐졌다.

곡이 끝날 때까지 유라는 이안을 향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봐서, 기억해서, 구현해야지.

감정과 이성,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유라는 생각만 했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타이틀로 해도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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