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후… 이번 타이틀곡 할 수 있을까? 근데 이미 타이틀은 예정되어 있을 텐데? 말씀드리면 괜찮으려나?”
유라는 혼자 고뇌하고 있었다.
매번 당찬 모습만 봤던 터라 유라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얼마나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으면 내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혼잣말을 나열할까.
혼란스런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수정안이 가득한 악보를 내려다봤다.
함께 적어뒀던 상큼한 가사들이 내가 만들어놓은 선율에 따라 변했다.
설레는 감정이 침울한 느낌으로.
걱정을 가득 안고 다가가는 것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전생이 알려주는 대로 사랑 노래를 이별 노래로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와도 맞는 부분이 있었다.
나도 전공을 바이올린에서 피아노로 바꿀 때 그런 걱정들을 안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나아갔고, 지금의 반열에 올랐으니까.
유라가 써놓은 반전에서 환기되는 분위기는 나처럼 걱정을 안았던 사람들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멈춰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나아가라고.
“이번 곡 타이틀로 하면 지금 편곡한 음악 쓰게 해줄래요?”
생각을 마친 듯, 유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진심이 가득한 유라의 표정에 내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인정에 대한 감사함도 있었지만, 작은 의문이 함께 감돌았다.
과연 이 행동이 피아니스트로서 적절할까.
클래식이 대중적이지 못한 이유는 어렵기 때문일 테지.
글이나 그림은 보이는 것이지만, 음악은 그렇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클래식의 차별점과 특수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고, 이는 곧바로 대중적이지 못하는 방향이 되었다.
기존의 클래식은 예술적 가치를 위해 그 어려움을 고수하고, 대중들은 어려운 것이 싫을 테니 자연스럽게 둘 사이는 멀어졌다.
나 또한 클래식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예술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에서 오는 매력은 어렵긴 하지만, 지금 음악의 모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그 예술성.
나는 수정안에 그 감성을 충분히 넣었다고 생각했다.
‘좋아하기에, 좋아하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슬픔.’
슈베르트가 겪었던 슬픔.
전생이 전해주는 기억에 더해 나는 그것을 내 나름의 해석으로 오선지에 새겼다.
당시 슈베르트가 했던 생각을 모두 옮겼는지 알 순 없지만,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했기 때문에.
사랑하기에 놓아주어야 하는 마음을 최대한 곡에 반영시켰다.
내가 꺼내놓은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
각자 가진 기억으로 그 슬픔을 해석하겠지.
그것이 예술을 받아들이는 대중이 해야 할 행동이리라.
‘유라의 반응을 보니 대중성도 충분한 것 같고.’
무려 타이틀곡.
대중음악 업계를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타이틀곡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얼핏 알고 있었다.
그것을 유라가 제안할 정도라면 그녀 또한 가능성을 봤다는 의미일 테지.
모두가 듣고 느낄 수 있는 음악.
데뷔 10년 차 베테랑의 촉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유라가 내 스케줄에 맞춰서 해주겠다고 했으니.
유라의 제안은 나에게 손색이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뻗었다.
그제야 유라는 활기찬 표정으로 내 손을 움켜잡았다.
***
예상은 적중했다.
큰아버지의 제안을 보류한 이후 크고 작은 기관에서 나를 향해 러브콜을 보냈다.
소규모 독주회부터 피아니스트를 섭외하는 미니 콘서트까지.
심지어 소규모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자는 연락도 있었다.
오로지 나만 돋보일 수 있는 무대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큰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명실상부 국내 최대 오케스트라라는 이름도 있었지만, 그 무대의 의미가 더욱 컸다.
애피타이저 무대.
대한 오케스트라만이 가진 특이한 관례이자 이번에 내가 맡은 자리였다.
신인 루키를 위한 자리임과 동시에 이후 음악을 더욱 맛깔나게 만들기 위해 그 장을 여는 자리.
그와 동시에 그 무게를 홀로 감내해야 하는 무거운 자리였다.
비록 베테랑 오케스트라와 협주를 하는 큰 스케일은 아니었지만, 시작종을 울리는 것만큼 값진 일은 없으리라.
‘그러니까 큰아버지도 그 자리에 루키 연주자를 세우시는 거겠지.’
어쩌면 다른 무대에 비해 내가 주인공인 것도 아니고, 뒤에 오를 대한 오케스트라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수단일 수도 있다.
큰아버지 또한 그 수를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지금 이 위치가 내 상태에서 가장 적합한 위치일 터.
이 무대는 오케스트라의 기대감을 높이는 동시에 나 같은 루키에게는 처음 관중을 맞이하는 일일 테니까.
처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연주를 선보인다는 중압감과 책임감.
그러한 묵직한 감정들을 이겨내고, 본연의 무대를 선보이는 것이 애피타이저 무대에서 루키가 이겨내야 할 관문이었다.
이 자리를 지나고 나면 나는 내가 꿈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일 테지.
더욱이 선곡의 자유를 보장하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펼칠 수 있으리라.
벌써부터 나와 전생의 심장이 수많은 관객을 앞에 둘 생각에 활발하게 움직였다.
뜻깊은 무대임과 동시에 내가 더 나아갈 수 있는 판로를 마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
큰아버지께서 그런 자리를 맡기셨으니,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내 도리일 테다.
똑. 똑.
“연습은 잘되어가니?”
노크와 함께 어머니가 과일 접시를 가져오셨다.
시계를 보니 연습을 한 지 벌써 3시간이 지나있었다.
과일 접시를 테이블에 올리시는 어머니는 들뜬 듯 밝아 보였다.
간식은 핑계고 내 연주를 감상하러 오신 것처럼.
“아버지 선물은 마음에 들고?”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피아노를 치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심장이 뛰는데.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나는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다.
Prelude.
대미(大尾)를 돋보이게 만드는 전주곡.
과하게 튀지 않는 선율이 차근히 쌓여간다.
한 개였던 음표가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차례대로 늘어나는 음표들이 쌓여 화음을 만들어 낸다.
마치 협주곡에서 바이올린과 첼로, 플루트 등 여러 악기가 한목소리를 내듯.
이후에 있을 오케스트라를 예고하려는 듯 음색이 조심스레 뻗어나간다.
어머니도 어느새 한 명의 관객이 되어 눈을 감고 계셨다.
감고 있는 눈인데도 나를 바라보는 듯, 고개는 나를 향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어머니의 입술.
플루트를 잡아 합주를 하고 싶은 듯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힘을 주시는 듯 떨림이 멈췄다.
조금이라도 아들의 연주를 감상하고 싶으신 듯 내가 만든 선율에 따라 고개를 천천히 움직이셨다.
“좋은 곡을 골랐구나.”
악보와 나를 번갈아 보던 어머니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셨다.
이제는 옅게 남은 걱정도 사라지신 듯.
음악을 충분히 감상하신 듯한 상쾌한 얼굴로.
나를 향해 작게 박수를 쳐주셨다.
“내일 연습 때 잘하고 오렴.”
어머니가 내 어깨에 손을 얹어 토닥였다.
아버지만큼 큼직하고 힘이 있는 손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특유의 따스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런 어머니의 손에 내 손이 조심스레 포개졌다.
따스함에 보답이라도 하듯,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오페라하우스에 몇 번씩이나 왔음에도 그 웅장함은 올 때마다 조금씩 달랐다.
때로는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 냉혹함이 느껴지는가 하면, 오늘처럼 연습의 열의가 가시지 않은 날에는 장내에서 열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때.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합이 끝나고, 큰아버지가 확인할 수 있는 자리.
공연 일자를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확인을 받는 자리였다.
루키를 위한 애피타이저 무대의 규칙 하나.
곡의 선정과 연습은 최대한 본인에게 맡긴다.
큰아버지는 게스트라는 이유로 오라 가라 시키지 않으셨다.
마치 콩쿨 무대에서도 연습의 기회가 없듯, 큰아버지의 요점은 강렬하면서도 잔인했다.
처음, 리허설, 그리고 본 무대.
루키를 위한 현실.
자신이 선택한 곡으로 홀로 무대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앞으로 콩쿨처럼 평가는 없을 테니까.
친절하게 어느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것을 개발해야 좋을지 알려주는 선생님도 없다.
곧바로 사람들에게 곡을 선보이고, 부족한 점까지 자신이 찾아야 하는 일.
그것이 루키들이 프로로 나아가기에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자리에 올라 빛내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나 또한 이 무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가.
연습량만 생각하면 지금도 손가락이 저릴 지경이었다.
나는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연습을 마친 단원들은 녹초가 되어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몇몇은 나를 향해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지만, 대부분 악기를 정리하거나 자신의 부분을 연습하고 있었다.
수많은 단원들을 지나치고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둥.
확인 차 건반을 하나 눌렀을 뿐인데, 뒤에서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중 아주 매서운 한 눈길.
아마도 큰아버지일 테지.
벌써부터 관객석에서 느껴질 중압감을 체험하듯 무거운 분위기가 장내에 감돌았다.
활기차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나에게 집중되며 도리어 스산한 분위를 연출했다.
이마저도 시험이리라.
이 정도 시선을 견디지 못하면 본 무대에는 오를 수도 없겠지.
나는 차근히 눈을 감는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을 뚫고 악보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가상의 악보 속에, 수백의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 메시지를 예고하듯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을 춘다.
아침 햇살 같은 프렐류드를 지나 찾아온 곡이 오페라하우스를 울린다.
극장의 특성상 희미한 잡음이더라도 크게 확장될 법도 한데, 연주가 시작되자 잡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직 내 손길에 의해 만들어진 선율이 오페라하우스를 메운다.
밤하늘이 시간에 따라 자연스레 변하듯, 끊어짐 없이 연주를 이어가기 위해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인다.
악보에 새겨진 이음줄을 따라, 연속된 레가토의 선율에 손가락이 쉴 틈이 없다.
화음이 펼쳐지는 곳에는 댐퍼 페달을 눌러 화음을 지속시키고, 다음 화음이 이어지는 순간 발을 떼야 한다.
조금만 늦게 발을 떼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화음이 한데 합쳐질 테지.
그 순간이 대참사다.
그러지 않기 위해 손가락만큼이나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
‘녹턴.’
저녁 하늘에 떠오른 노을처럼 은은한 야상곡이 장내에 퍼져나간다.
앞으로 풀코스의 연주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한 선택이었다.
큰아버지가 애피타이저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비단 첫 무대라서가 아니었다.
애피타이저는 앞으로 이어질 코스 요리들을 더욱 맛깔나게 하고, 입맛을 돋우는 전채.
그렇기에 과한 느낌으로 이어질 것들을 망쳐선 안 된다.
그 선곡을 하는 센스도 아마 큰아버지의 큰 그림 중 하나겠지.
게스트 제의를 받아들이고 큰아버지께 연주 리스트를 달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법이구나.”
큰아버지가 리스트를 건네며 말씀하셨지.
정답에 근접한 듯 큰아버지는 흔쾌히 리스트를 건네주셨다.
이번 곡들은 행진곡과 강렬한 음악의 연속.
나마저도 그것에 맞춰 시끄러운 연주를 펼치면 관객들이 시작부터 귀가 아프다고 눈살을 찌푸리시겠지.
아무리 좋은 요리라도 기름기가 많거나 묵직한 음식만 나오면 쉽게 질릴 테니까.
오페라하우스를 방문할 손님들을 위한 최고의 선곡이라고 자부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잘되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단원들이 해주셨다.
연습을 끝낸 나를 향해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