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대표님! 이번 한 번만 믿어보세요. 저 못 믿어요?”
“유라야 당연히 너 믿지! 하지만…!”
아침부터 피네 엔터테인먼트 대표실이 시끄러웠다.
소속 가수가 대표을 향해 소리를 지르다니.
다른 엔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피네 엔터에서 한유라의 입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유라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악플 세례에 고통받으면서도 매일을 연습실에 출석 도장을 찍었던 그녀 아닌가.
매니저도 기겁한 살인적인 스케줄을 유라는 싫은 내색 한 번 않고 소화해냈다.
그래서 대표도 이번 앨범만큼은 유라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했었지.
“너도 알잖아. 이번 타이틀은 피스랑 작업하기로 한 거.”
대표의 말에 유라도 잠시 멈칫했다.
피스.
한국 가요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존재.
그를 부르는 이명이 더욱 유명했다.
‘히트곡 제조기’.
음원차트에서 피스가 손대지 않은 곡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
음악 방송 1위 곡의 작곡가를 보면 어김없이 피스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프리랜서인지라 곡을 부탁해도 몇 년이 지나서야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
유라도 그와 협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던가.
겨우 계약을 따내어 이번 앨범 타이틀 자리까지 약속했는데, 난데없이 타이틀곡을 바꾸자는 유라의 말에 대표도 미칠 지경이었다.
“유라야. 네 마음 충분히 알겠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단호한 대표의 말에 무게감이 실렸다.
대표도 유라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데뷔 때부터 유라를 바라왔던 사람이었으니까.
유라가 ‘제 2의 아버지’라는 표현한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데뷔하여 서른이 되기까지.
긴 활동 기간 동안 더 좋은 회사로 옮길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유라야. 더 좋은 회사로…”
“섭섭한 소리 할 거예요?!”
한창 전성기를 끝내고 계약 만료일이 다가올 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연히 회사를 옮길 줄 알았지만, 유라는 의리파였다.
도리어 옮길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섭섭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때의 감동에 힘입어 언젠가 유라가 원하는 대로 앨범을 기획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하필 그 기회를 지금 부르짖을 줄은 몰랐지만.
유라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클래식을 고집하면서도 곡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라가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마치 뮤즈라도 발견했다는 듯.
과거 자신이 유라를 발굴해냈을 때 눈빛이 아닌가.
그 정도의 모습이기에 대표 또한 유라의 선택을 믿고 지지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번 사안만큼은 대표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아무리 대형 기획사여도 철저하게 자신의 스케줄을 중요시하는 피스였다.
이미 갑작스레 일정 변경을 통보한 회사에게 더 이상 곡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정도로 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이번 일로 그 고집을 건드려버린다면 다음부턴 아예 피스와 작업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표로서 유라에게 당장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갑자기 계약을 바꿔버리면 피스 쪽에서도 어떻게 생각하겠니. 이번에는 원래대로 가고…”
대표가 안 된다며 유라를 설득했지만,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 또한 이번 기회를 놓치기 싫었으니까.
단순히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친 생각이 아니었다.
유라에게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한이 될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이 염원했던 클래식의 합작이자, 이안의 편곡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
복합적으로 쌓인 선율과 감정선을 모두에게 알리고 당장이라도 무대에서 부르고 싶어서 심장이 뛸 지경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번 곡을 최대한 빨리 무대에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에서 생각을 이어가던 유라는 좋은 생각이 낫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러면 되겠네요.”
이게 아닌데?
대뜸 내뱉은 유라의 말에 대표의 눈이 불안감에 몹시 떨렸다.
유라의 행동력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목표가 생기면 그곳까지 밀고 가는 성미.
지금 유라의 눈에는 한 가지 목표로 반짝이고 있었다.
“피스, 제가 설득해볼게요.”
***
웅성웅성.
2천여 개의 객석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에 살색 물결이 흐르는 모습.
분명 사람들이 작게 말하고 있는데도 그 소리가 한데 섞여 오페라하우스에 울렸다.
모두 대한 오케스트라 무대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어서 무대를 시작하라며 재촉하는 듯.
관객석에서 쏟아지는 묘한 압도감이 백스테이지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그 백스테이지의 입구에 내가 서 있었다.
‘사실상 첫 데뷔 무대.’
심장이 맹렬하게 떨렸다.
콩쿨은 몇 번이고 나가봤지만, 평가 없이 사람들 앞에서 정식으로 연주한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수석님 유튜브 방송할 때는 수천의 사람이 보고 있었다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크게 체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는 2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저마다 다른 색의 옷을 입고, 다른 모습을 한 채.
과연 이 모두에게 내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까.
긴장감보다 더 큰 기대감이 몸 안에서 벅차올랐다.
“긴장되지 않아요?”
오케스트라 단원 하나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반짝이는 바이올린을 쥔 채로.
나는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유진석 바이올리니스트님.”
“나를 알아요?”
사뭇 놀라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석.
한때 내 롤모델.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꿨을 때 큰아버지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바이올리니스트로 대한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인물.
게다가 지금은 그 실력을 인정받아 악장의 위치가 오른 사람이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또한 나이가 들었지만, 특유의 편안한 표정은 여전히 기억에 또렷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바이올린 그만둬서 아쉬워요. 엄청 기대했었는데.”
어렸을 때 봤던 진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이올린을 들고 웃는 나를 향해 그가 지었던 표정.
이내 바이올린을 켰을 때 놀라서 입을 떡 벌렸던 때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단순히 귀엽다는 것뿐만 아니라 잘 자라서 좋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있었지.
출중한 재능을 펼치길 바랐을 터인데, 갑자기 피아니스트로 찾아왔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법했다.
“그래도 화이팅! 아마 저분들도 무척이나 좋아하실 거예요.”
진석이 객석을 바라봤다.
수많은 인파들.
그럼에도 진석의 눈가에는 걱정보다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첫 연습 때도 연주를 들은 그가 찾아와서 물었을 정도였으니까.
“선곡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악보를 바라보던 그를 향해 나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관객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연습 중에 손이 경련을 일으켜도 참아냈다.
큰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 곡을 들을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멋지게 선보이리라.
어쩌면 치기 어린 당돌함일 수 있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수많은 노력을 했으니까.
도리어 들끓는 자신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내 무대를 비추던 불빛이 일제히 꺼지고, 홀로 서 있는 피아노를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펼쳐졌다.
그 빛을 향해 나아간 나.
객석에 가까워지자 그 웅장함은 배가 되었다.
스포트라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박수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수많은 시선과 응원하는 박수 소리.
기대감에 부푼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피아노에 앉았다.
건반이 눈에 들어오자 전생이 날뛰듯 심장을 고동시켰다.
전생의 기억처럼 주변을 가리는 베일도, 정체를 감추는 가면도 없다.
박이안.
오로지 내 이름 하나로 무대 위에 섰다.
전생의 기억이 첫 무대를 축하하듯, 그리고 자신이 겪지 못한 환희를 대신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는 듯 정갈한 심장 박동을 보냈다.
마치 자신의 심장 박동을 메트로놈처럼 쓰라는 듯.
그 의지에 힘입어 나는 하얀 건반 위에 왼손을 올렸다.
그리고 오른손은 곧게 세운 등 뒤로 가져갔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지만, 내 왼손은 개의치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보를 재현해내기 시작했다.
***
수십 년 동안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수많은 인재들을 봤던 현철이었다.
그 덕에 그는 연주를 몇 번 들으면 상대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부분 현철의 예상은 적중했다.
지금 새롭게 나타난 그를 제외하고.
‘매번 예상을 뛰어넘는군.’
처음부터 이안의 가능성은 높은 편이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음악적 재능과 빠른 암보 능력, 곡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모습까지.
대부분 태생적, 또는 유전적으로 우월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정도였다.
그러나, 기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테크닉과 기교는 음악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몸을 옮기는 과정.
테크닉은 따라 한다면 할 수 있었지만, 그것에 감정이 제대로 실리지 않으면 기교라고 부를 수 없었다.
기교라고 불릴 수 없는 테크닉은 있는 것만도 못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이안이 그 한계점을 넘지 못하면 제대로 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여겼던 터인데.
‘지난번보다 기교가 자연스러워졌군.’
잔잔한 프렐류드와 녹턴.
듣기에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곡을 연주하는 사이에 수많은 기교가 존재한다.
가지런히 펼쳐지는 음계의 울림은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댐퍼 페달의 합작.
박자에 맞추되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도록 손과 발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특히 녹턴, 야상곡의 분위기를 연출하려면 그 자연스러움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땅거미가 몰려오는 은은한 분위기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묵직한 분위기로.
하루의 끝을 기념하듯 잔잔하게 흐르면서도 다음 날을 준비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빠르게.
빠른 속도에 맞췄다가는 느긋한 분위기의 야상곡을 해칠 수 있다.
그렇다고 분위기에 취해 느린 속도를 유지하면 이내 빠르게 전개되는 화음을 따라잡지 못한다.
수천의 사람을 앞에 두고 연주를 해서 긴장할 법도 한데, 이안은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의 곡에 충실했다.
은은하면서도 느린 분위기와 활기차고 빠른 템포.
이안은 그것들을 모두 표현하고 있었다.
오직 왼손 하나로.
‘마치 군인 같군.’
백스테이지에서 바라본 탓에 이안의 등이 훨씬 더 잘 보였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오른손으로 열중쉬어 자세를 취하는 모습.
이안의 모습은 각 잡힌 군인을 떠올리게 했다.
특수부대 출신인 현철도 인정할 정도.
절도 있는 상체와 달리, 이안의 왼손은 그 누구보다 부드러운 연주를 해내고 있었다.
왼손만으로 곡을 연주하고 있음에도 여유롭게.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스크랴빈, 왼손을 위한 프렐류드와 녹턴.’
러시아 작곡가, 스크랴빈이 전쟁에서 팔을 잃은 피아니스트를 위해 쓴 곡.
오직 왼손만을 활용하여 오선지의 음표를 표현해야 하는 난이도 있는 곡이었다.
피아노 건반의 끝과 끝을 넘나드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 네 개의 건반을 한꺼번에 눌러야 한다.
오른손이 없으니 왼손이 이동하는 시간 동안 비는 음을 페달로 잡아내야 하며 연이어 몰아치는 음표의 향연을 정확하게 짚어내야 한다.
녹턴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와 정확하게 울리는 음색.
둘 중 하나라도 놓친다면 클래식 팬들의 눈에 장난치는 것으로 보이리라.
그러나 이안은 그 둘을 잡은 데 이어 곧은 자세로 한 가지 효과를 더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늘은 6월 25일.
6.25 전쟁 70주년이었으니까.
크리스마스, 광복절, 어린이날 등 일반인들이 쉬는 날에.
현철은 이러한 기념일에 주로 애피타이저 무대를 꾸렸다.
그래야 일반인도 쉽게 클래식을 접할 수 있을 테니까.
또한, 오로지 선곡까지 루키에게 맡기는 관례에 따라 그 선곡을 보다 편하게 하도록 배려한 것이기도 했다.
이전에도 루키들이 캐롤을 현악 4중주로 표현하거나, 동요를 편곡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독불장군처럼 느껴졌던 현철이지만 세세함까지 놓치지 않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무대.
이번 무대는 참전용사들을 모시는 자리였기에 그 중요도는 더욱 올라갔다.
그런 공연의 시작종을 이안이 멋지게 울려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수천의 관객을 마주했음에도 떨리지 않게 곡을 완수하는 능력.
공연의 특색에 맞춘 선곡.
실제로 전채를 연상케 하는 편안한 분위기.
그 모든 것을 감수한 상태에서도 정확히 건반을 눌러 선율을 만들어내는 능력까지.
현철이 생각한 애피타이저 무대의 모든 요소를 이안이 완성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현철은 몰래 미소를 지었다.
합격.
앞으로 더 큰 기대를 걸어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