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0화 (20/250)

20화

“엄청 어릴 때 오고 처음인 것 같아.”

지현이 넓게 펼쳐진 음악실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서로 바빠지기 전에 그녀는 곧잘 우리 집으로 놀러 오기도 했으니까.

지금은 단순히 놀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너도 청악 콩쿨 나가지?”

내가 의아한 듯 멈칫하자 그녀는 이내 눈치를 챈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지현 또한 청악 콩쿨에 나간다고 했다.

다행히 아줌마가 콩쿨을 나가지 못하게 막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에 나온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너한테 피드백을 받고 싶어.”

대체 왜?

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스쳤다.

재벌가의 딸로 살아가면서 부모님의 지원이 엄청날 텐데.

레슨 선생은 물론 같은 동년배 친구들을 마다하고 나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이 좀처럼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지현의 믿음이 고스란히 떠 있는 얼굴에 전생의 심장이 약동했으니까.

과거에도 잘해 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기억을 내뱉는 녀석이었다.

흑백 영화를 보듯 흘러나오는 기억 속, 전생은 확실히 좋은 선생이었다.

하지만, 전생이 이리도 열의를 불태우는 것은 비단 과거의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생은 사람과 음악에 대해 소통하는 것에 대해 기대감을 가득 안고 있었다.

소통이 아닌 명령에 따라 움직였던 그때.

전생은 귀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되 연주를 교정해야 했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건방지다고 벌을 받았을 테니까.

솔직한 대담을 나눌 기회는 없었다.

그 탓에 전생은 지금의 경험이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듯 들뜬 마음을 심장 박동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전생의 뜻과 달리 지금 나는 내 연주에 집중하고 싶었다.

조심스레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 내 생각을 돌려놨다.

“소리 되게 독특하다. 원래부터 이랬어?”

건반을 몇 번 퉁탕거리던 지현이 미묘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현의 손가락이 건반을 차례로 건드리자 특유의 음색이 음악실을 가득 메웠다.

“조율사님께 부탁했어. 그렇게 해달라고.”

지현은 신기해하며 계속해서 건반을 눌렀다.

연습곡을 쳐보면서 다른 소리의 특성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미세한 차이를 알아챘어.’

전생의 취향이 잔뜩 묻은 조율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조율법을 사용하여 음색이 다소 낮은 정도.

하지만, 그래 봤자 5hz라는 근소한 차이였다.

프로인 아버지는 아마 눈치채셨으리라.

조율할 당시에, 음색이 보편적 피아노와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피아노도 결국 현과 해머, 울림판을 움직여서 소리를 내는 기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 사이의 사소한 차이가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내가 조율사에게 부탁했던 부분은 그 사소한 것들 중에서도 더욱 사소한 것.

굳이 표현하자면 악수를 할 때 어느 손가락에 힘을 더 줬는지, 덜 줬는지 정도일 것이다.

그런 미세한 차이점을 지현은 꿰뚫어 보았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잡아 왔다 하더라도 그 차이를 알아챘다는 것에 지현이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이 정도 청음 능력이라면 내 연주에서 미묘한 부분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또한 아직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지현의 습관을 바꿔나가면서 내 부족한 부분도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않은 기회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마 저 피아노가 너한테 익숙할 거야. 내 피아노는 조금 낮게 조정돼있거든.”

“저건 누구 건데?”

“아버지 거.”

내 말에 지현은 놀라움에 몸을 움찔댔다.

그녀 또한 아버지의 팬인 듯 반대편 하얀색 피아노를 바라보는 시선에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놀라우면서도 신기하고,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운.

지현은 조심스레 일어나 아버지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뚜껑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듯 손이 떨리고 있었다.

“... 이걸 내가 만져도 돼?”

감히.

지현의 표정에 쓰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보고 싶다는 듯 손이 움찔거렸다.

망설이는 그녀를 위해 나는 손을 뻗었다.

“뭐 어때?”

나는 미소와 함께 건반 뚜껑을 활짝 열었다.

건반을 덮고 있던 벨벳 천을 거두자 가지런한 건반이 나타났다.

사실 일반적인 피아노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피아노였다.

그런데도 지현의 손은 신줏단지를 모시듯 조심스러웠다.

큰마음을 먹고 건반 하나를 누르자 은은한 곡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낸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내 피아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습은 해봤어?”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녀가 오기 전까지 연주했던 곡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정직할 정도로 차근히 나아가는 음계.

그녀가 누르는 건반은 내가 누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신기하게도 소리의 차이가 느껴진다.

연주에도 성격이 묻어난다고 했던가.

지현의 연주에는 정직함과 함께 그녀 특유의 밝음이 묻어난다.

같은 레가토의 선율.

음표와 음표를 부드럽게 연주하라는 지시는 같았으나, 그 결이 미묘하게 다르다.

내 연주는 마치 굳센 밧줄로 하는 것처럼 힘차게 묶은 것 같다면, 지현의 연주는 연한 리본으로 감싸는 느낌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트릴에 그녀의 손가락은 사뿐하게 움직인다.

부드러운 그녀의 성정이 고스란히 음표에 맺혀 떠오른다.

나무랄 곳이 없는 실력인데, 나는 가슴 한 켠이 아쉬웠다.

‘분명 연주는 자연스러운데.’

연주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운 성정이 그대로 나오듯.

하지만, 그것이 연주의 전부를 장식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지현의 연주에서는 콩쿨 때 들었던 기계적인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너무나도 정직해서 융통성도 없는 느낌이랄까.

전생 또한 내 생각과 같다는 듯 약동했다.

악보를 그대로 베끼는 듯한 연주.

과거에 내가 그랬듯, 지현에게서도 느껴지는 문제점이었다.

곡은 연주하고 있지만, 표현하고 있지는 않은.

전생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 미세한 차이를 나 또한 몰랐으리라.

그러나 알게 된 후 듣는 멜로디는 극명하게 차이점을 드러냈다.

연주를 마친 그녀는 멋쩍은 듯 뒤를 돌아 나를 향했다.

“어땠어?”

기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된다는 듯 이중적인 표정.

나는 여러 평가를 하기 이전에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내뱉었다.

“무슨 생각하면서 쳤어?”

***

지현은 이안의 연주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백스테이지에서 봤던 선율.

피아노가 아닌 이안의 몸에서 나오는 듯한 소리.

그 근원을 알고 싶기도, 가능하다면 배우고 싶었다.

그러면 매번 부족했던 무언가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처음에는 혼자 연습을 해보기도 했고, 주변에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성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배성호.

연희대 수석 입학생이자, 지현의 선배.

최근 급부상하여 한국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고 표현되는 연희대였다.

그 중심에는 성호를 주축으로 만든 젊은 예술가 클럽이 있었다.

서로의 연주를 평가하고 콩쿨에 도전할 때마다 지원을 아끼지 않는 클럽이었기에 지현도 클럽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중 성호의 의견은 지배적이었다.

신랄한 비평.

총알처럼 쏟아내는 특유의 비평에 클럽원들은 물론,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지현 또한 몇 번이고 눈물을 삼켰을 정도니까.

사뭇 포악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비평이었지만, 성호의 실력을 본 사람들은 그의 비평을 납득했다.

클래식의 고장에서 오랜 교환학생 시절을 경험한 성호였기에, 그의 연주는 다른 학부생과 비견할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 실력자이기에, 지현은 성호에게 이안의 연주에 대한 조언을 구했었다.

그러나 지현의 기대와 달리 먼발치서 콩쿨을 바라봤던 성호는 이안에 대해 다소 실망이라는 비판을 내놓았다.

“아무리 전공을 바꾼 지 얼마 안 됐다지만, 기술이 너무 별로야. 박수철 피아니스트님 명성에 먹칠하는 수준인걸. 외국에는 저 나이에 더한 실력자들이 많아.”

성호는 지현이 아는 또래 중 가장 뛰어난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성호의 비평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피아니스트 지망생이니까.

이안이 당장 완벽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21살밖에 되지 않은 청년에게 완벽함을 요청하는 것은 어불성설.

지현이 생각하기에 스스로도 부족한데 누굴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무작정 이안의 집으로 찾아왔다.

평소 소심하던 지현도 들끓는 의문을 참을 수 없었다.

조심스레 연습했던 곡을 선보이고 이안을 보았을 때.

그가 지현에게 내놓은 피드백은 뜻밖이었다.

“무슨 생각하면서 쳤어?”

지현은 이안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치긴 했던가.

굳이 생각을 표현하자면 악보에 있는 음표의 위치를 보거나, 암보라면 그 위치를 떠올리면서 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지현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안의 질문이 그런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

‘나는 그냥 연주만 했었나 보네.’

이안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허탈함에 웃음이 삐져나왔다.

자신이 연주하는 곡은 그림이 없었으니까.

“나는 연주할 때 이미지를 그리곤 해. 이렇게.”

이안이 피아노에 앉아 천천히 건반을 눌렀다.

방금 지현이 연주했던 바흐의 곡.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연주했을 때와 완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연주에 임하는지 알 수 없지만, 차이점은 확실했다.

콩쿨 때 느꼈던 것처럼 이안의 몸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으니까.

분명 같은 곡을 연주하는데도 그의 연주는 묘한 일렁임이 느껴졌다.

그 때문일까.

소리가 선처럼, 선이 면처럼 이안의 연주가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연주를 끝낸 이안은 짧은 조언을 덧붙였다.

“연주에서 그치지 않고 너라면 어떤 느낌을 표현하고 싶은지 떠올려봐.”

이안의 조언은 지극히 추상적이었다.

그러나 지현의 머리는 이미 무언가 떠올렸다는 듯 자신 있게 건반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미 머릿속으로 암보를 했기에 손가락이 자연스레 움직인다.

단순히 소리에 국한됐던 곡이 지현의 생각을 더하자 깊이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음계에 지현은 시냇물을 떠올렸다.

똑같은 속도로 흘러가서 멈춰 보이는 듯한 시냇물을.

그 사이에 음표를 하나씩 변주하듯, 잔잔한 파형이 시냇물을 건든다.

그러나 기존의 시냇물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파형 또한 시냇물의 일부가 되어 함께 흐른다.

단순히 이미지를 떠올린 것인데 지현이 느끼기에도 곡의 자연스러움이 훨씬 올라갔다.

시냇물이 중간에 뚝 끊겨있지 않듯.

레가토의 선율이 물길처럼 자연스레 연결된다.

작은 변화지만, 그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는 무척이나 컸다.

이안도 변화를 느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어. 다만, 생각이 겹치니까 원래는 안 했던 실수를 하더라.”

이안의 조언은 추상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음계를 올라가기 위해 손가락을 이동하는 방식에서 건반을 누를 때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

악보에 제시된 셈여림을 분위기처럼 활용하려면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지현은 동갑내기 친구가 아닌 노련한 선생에게서 배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언이 가미될 때마다 연주가 풍성해진다.

실수뿐만 아니라 작은 추천에도 곡의 흐름이 변했다.

그녀 또한 피아노를 수학하면서 배웠던 것들인데, 이안처럼 활용하진 않았다.

그러나 연주의 기초를 여러 갈래로 활용하는 이안의 모습에 지현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쩌면 성호 선배보다 위…’

한 수 정도는 어림도 없었다.

그보다 몇 배나 앞서있는 느낌.

지현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곧 있을 콩쿨에 자신은 물론 성호도 참여하기에.

주어진 곡은 하나.

하나의 곡에서 어떤 그림이 파생될지 기대하니 지현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그림을 그려보겠노라.

작은 의지까지 싹트고 있었다.

***

오랜만에 피아노에 삼각대를 설치했다.

피아노를 선물 받고 처음으로 찍는 영상.

그런데 오늘은 특히 더욱 싱숭생숭했다.

전생의 심장이 마치 요조숙녀처럼 뛰었다.

“고마워.”

아주 간결하면서도 마음이 가득 담긴 말.

그런 말에 박동하는 전생의 심장이 다소 이해가지 않았다.

숱한 귀족들의 인정을 받아서 무대에 올랐던 녀석일 텐데.

고작 내 또래 친구의 감사 인사에 감동을 했을까.

그런데 전생이 떠올린 기억은 내가 생각한 것과 결이 달랐다.

“자네 하인 하나 기가 막히게 두었구먼. 웃돈을 얹어줄 테니 나한테 보낼 생각은 없나?”

어느 날, 귀족 자제 하나가 전생에게 한 말이었다.

전생은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과찬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귀족들에게 음악을 가르친 것도 전생이고, 목숨을 바쳐서 무대에 오른 것도 전생인데.

모든 환호와 감사는 잘난 하인을 둔 도련님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누구도 하인의 재능을 찬양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운 좋게 얻어걸린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작자들만 있을 뿐.

부러움.

전생이 가지고 있던 감정이 아니었을까.

그가 했던 음악은 베일과 가면으로 자신을 감추며 해야 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동안 전생의 심장이 약동했던 때를 떠올렸다.

잘 듣고 있다는 유튜브 댓글을 보았을 때.

팬이라며 청년이 사인을 받아갔을 때.

아버지와 함께 연주를 이어갈 때.

모두 음악을 통해 사람과 소통할 때였다.

그것을 떠올리자 나는 조금이나마 녀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정에만 취해있을 순 없다.

콩쿨이 눈앞.

어쩌면 이 도전이 전생이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이룰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 또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기를.

녹화 버튼이 돌아가는 동안 내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