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1화 (21/250)

21화

“감독님. 오늘은 픽스를 해주셔야…”

오늘도 어김없이 예진의 전화로 독촉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에이전시에서.

“강 감독. 이번 주까지 대역 못 구하면 이제 나도 몰라.”

이번 영화에 투자를 한 투자사까지.

스태프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감독님. 이 친구 어떠세요? 괜찮을 것 같은데.”

그녀의 성정을 아는 스태프들이 피아니스트들의 프로필을 여럿 가져왔다.

녹음 파일까지 가져와 대령했건만, 예진의 표정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예진은 헤드폰을 쓴 내내 혀만 찼다.

스태프들은 그런 예진의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갔다.

그녀 또한 스태프들의 속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함부로 영화를 만들 순 없기에.

예진의 커리어에 ‘괜찮은 정도’는 있을 수 없었다.

강예진.

음악 영화계의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는 그녀가 개척해낸 독보적인 장르 때문이었다.

음악 영화.

K-pop이 전 세계를 휩쓸 때 그녀는 꿋꿋하게 음악 영화를 내세웠다.

때로는 클래식 세계의 안쓰러움을 담기도, 뿔뿔이 흩어질 뻔했던 가족이 음악으로 한데 뭉치기도 하며.

그녀의 영화에서 음악은 가장 잔혹하면서도 사람을 이어주는 끈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성을 알아본 것인지.

예진의 집 한 켠에는 트로피로만 이뤄진 장식장이 있었다.

백상예술대상 트로피, 청룡영화상 트로피, 심지어 황금사자상까지.

수많은 트로피를 얻기 위해 예진은 일반적인 감독이 하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연출과 각본은 물론이고, 배경음악과 녹음.

특히 음악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남달랐다.

“음악 영화에서 음악이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

그녀에게 영화 속 음악은 분위기를 띄우는 도구 따위가 아니었다.

뚝심 같은 철학 때문에 촬영장에서 마찰을 빚은 것도 수없이 많았다.

배우가 직접 연주를 못한다는 이유로 반 가까이 촬영한 영화를 날려 먹기도 했고, 밴드의 실수가 들어간 음원을 가져왔다고 그날 촬영을 접기도 했으니.

그러나 깐깐한 그녀의 성격 덕에 영화는 매번 업계에 새로운 센세이션을 불러왔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그녀가 꼭 만들어보고 싶은 장면이 있었기에 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원테이크.

피아노가 시작됨과 동시에 기억들을 떠올리는 장면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시각장애인 주인공이 피아노 연주로 사람들과 소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인데…

‘완벽한 장면을 위한 피아니스트가 없어.’

대역을 쓰는 것은 업계에 흔한 일이었다.

심지어 대역 없는 영화를 고집하던 예진이 대역을 선택한 이유는 원테이크에서 실제 배우가 움직여야 하기에.

본래 피아노 연주를 하는 대역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배우의 실력도 평소 예진의 기대에 못 미쳤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대역이라도 제대로 된 연주를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문제는 그 고민을 한 지 어언 한 달이 훌쩍 넘었다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촬영 딜레이에 스태프들도 감독을 만족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그나마 예진이 만족한 연주는 대한 오케스트라 수석 피아니스트 출신인 주은미 피아니스트의 연주였다.

그녀의 연주는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웠다.

게다가 은은한 눈웃음을 지으며 연주하는 은미의 모습은 예진이 생각하는 주인공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직접 건반을 볼 수 없는 주인공.

그렇기에 아무리 벅차오르더라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는 연주가 필요로 했다.

마치 힘이 있으면서도 절제력으로 부드러움을 유지하는 은미의 연주처럼.

그러나.

“너네 아무리 급해도 20살 남자 대역을 50대 여성으로 쓸 거야?”

적어도 손은 나와야 예의이지 않겠는가.

그런 것에 비해 은미의 손은 세월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으니.

예진의 눈 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은미의 유튜브 채널에 나온 숱한 클래식 연주자들을 보았지만, 모두가 미묘하게 예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너무 가볍고, 누군가는 너무 슬프고, 또 누군가는 동작이 너무 화려했다.

시각장애인 캐릭터인 만큼 필요한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했고, 장면의 특성상 과하게 슬퍼서도, 과하게 기뻐서도 안 됐다.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가 첫 무대를 서는 장면을 가장 잘 나타낼 사람.

예진이 찾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찾았다.’

3일 밤낮을 새워가며 유튜브를 둘러보던 중 이안의 연주가 들어왔다.

***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지현이 집에 와서 피드백을 받아간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음 날이 콩쿨 예선이었다.

이제는 눈을 감기만 해도 오선지가 눈앞에서 흐를 것만 같았다.

콩쿨 전날인 만큼 오늘은 그동안 점검했던 디테일들을 한데 모으고, 기술을 연마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 작업에 아버지는 큰 도움이 되었다.

“훨씬 좋아졌구나. 지난번에 얘기한 트레몰로 부분도 잡혔고. 그 부분을 칠 때 손의 축을 중지보다 약간 왼쪽이 되도록 한다는 거 잊지 말고. 이미 잘하고 있지만, 엄지에 힘 실리지 않게 계속 주의하고.”

연주를 짚어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의사 같았다.

기존의 기교를 넘어 손의 감각을 잡아주는 모습에 전생도 감탄의 박동을 보냈다.

곡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나의 능력과 특성에 맞춰 손을 움직일 때 주의점을 알려주시는 아버지.

기본적인 주법에 부자의 능력이 혼합되자 지극히 단순했던 음계가 입체적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연습에서 아버지는 내 연주를 차근히 바라보시고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마치 하산하라는 도인의 말투처럼.

아버지가 후련한 듯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묵직한 손이 내 어깨에 올라왔다.

은근하게 힘이 들어가는 손아귀에서 칭찬하고픈 아버지의 감정이 느껴졌다.

“볼 때마다 놀랍구나. 프로 피아니스트들도 이렇게 곧장 기교를 습득하지 못할 텐데.”

아버지의 감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놀랍다, 비범하다, 신기하다.

피드백을 받는 족족 연주에 반영하는 내 모습에 아버지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습득력과 이해력이 빠른 나이인데도, 이토록 빠른 성장이 가능한지 의문을 품는 듯했다.

하긴.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범주는 비상식적이었으니까.

전생이 떠오른 이후, 처음 아버지에게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였던 날이 생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이올린을 잡던 오른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고역이었는데.

지금은 왼손보다 더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바이올린을 켤 때 미세하게 조정했던 근육들이 아버지의 인솔 아래에 더욱 민첩하게 움직였다.

어떤 건반이든 공평한 선율을 낼 수 있도록.

특히 16분음표처럼 짧은 음을 연속적으로 낼 때 오른손이 비상하게 움직였다.

아버지가 신기한 부분은 하나 더 있는 듯했다.

“이안아. 혹시 조율 관련해서도 배운 적 있니?”

역시.

조율을 할 때도 얼핏 느꼈지만, 아버지도 내 피아노가 내는 음색의 차이점을 눈치채신 듯했다.

수십 년 동안 피아노를 연주하신 분이니까.

그 소리의 차이점을 알아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조율사님이 고전파 시기의 조율과 유사하다고 하시는구나.”

전생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돼서일까.

아버지의 입에서 전생이 살았던 시기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435hz와 440hz.

둘 사이는 1초에 5번 진동을 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였다.

그러나 내게 들리는 소리는 그 변화를 크게 알아챘다.

마치 도로에 잔잔한 안개가 깔린 것처럼.

같은 ‘도’여도 떨림의 차이가 만들어낸 간극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옅게 깔린 음색 덕에 웅장한 느낌이 들어 그대로 놔뒀는데, 과거의 유물일 줄이야.

“현대에 연주하는 피아노랑 음색이 많이 다를 텐데. 어색하진 않니?”

“네. 조금 더 낮은 음이 웅장하게 느껴져서 그렇게 했는데, 옛날에 그렇게 했었나 봐요.”

아버지는 그 작은 차이를 알아챈 내가 대견하기라도 하듯 어깨를 토닥였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미묘한 감정이 엿보였다.

대견함과 동시에 이제라도 이 재능을 발견해서 다행이라는 듯.

하루가 멀다 하고 성장해나가는 모습에서 오묘한 희망을 발견하신 듯했다.

“스스로 좋은 소리를 찾아냈구나.”

아버지 또한 고전파 시기 조율에 대해선 들어보지 못하신 듯했다.

그래서 지금 검은 피아노에서 나오는 선율을 더욱 독특하게 받아들이는 것이겠지.

특히 아버지는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음색에 주목했다.

안개처럼 잔잔하면서도 묵직하게.

다음에 당신의 피아노도 그렇게 조율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마지막 연습을 끝으로 나가려던 찰나, 아버지가 내일 콩쿨 화이팅하자는 말과 함께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은 기회도 함께 올 거야.”

좋은 기회?

나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버지는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

대망의 예선전 아침.

따뜻한 햇살이 빌딩 유리에 비쳤다.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지경.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뒤로한 채 유리로 도배된 건물을 빤히 바라봤다.

청악 빌딩.

청악의 역사와 발자취가 아로새겨진 곳이자, 그룹의 모태가 되었던 곳에 세워진 고층 빌딩.

2층짜리 가구점에서 시작한 회사가 20여 층의 고층 빌딩으로 변화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입구에서부터 그 역사를 보여주듯 흑백사진을 시작으로 청악 빌딩 준공식 컬러사진까지 모든 역사가 나열되어 있었다.

오늘 예선이 벌어지는 곳은 이곳의 지하이자 강당 겸 무대.

이곳에서 승리한 사람은 빌딩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이뤄지는 본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

로비에는 콩쿨에 참가하려고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전 콩쿨에서도 익숙했던 얼굴이 몇 보일 정도.

그중에는 지현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습은? 잘했어?”

“덕분에. 지난 콩쿨 때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아.”

나를 바라보는 지현의 표정이 전보다 더욱 밝아져 있었다.

생글한 미소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궁금해질 정도.

그런데 밝은 지현과 달리 옆에 있는 남자는 비교적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10cm 정도 큰 키에 서양인을 떠올리게 하는 날렵한 체형.

연미복을 입은 것을 보니 그 또한 이번 콩쿨 참가자인 듯했다.

얼핏 본 얼굴인 것 같은데.

떠오를 듯 말듯,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현이 설명을 덧붙였다.

“여긴 우리 학교 선배. 이번에 같이 콩쿨 출전해.”

연희대라고 했던가.

기업들의 후원을 공격적으로 받아 세력을 확장한 덕에 한국대의 명망을 노릴 정도로 급부상한 학교.

한국대에 다닐 때 연희대에 대한 소식을 접한 적이 있었다.

엘리트로만 구성된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 있다고.

피아노 전공의…

“배성호라고 합니다.”

우식과 같이 그의 표현은 무척이나 정갈했다.

악수를 청하는 성호의 태도에는 묘한 각이 살아 있었다.

다소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적대감보다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았다.

마치 모든 일에 진지하게 임할 것 같은 사람.

그것이 성호의 첫인상이었다.

굳센 그의 표정에서 이번 콩쿨에 임하는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악수에 응하다 성호는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안 씨. 지난 콩쿨 때 봤습니다. 오른손 움직임이 때론 부자연스럽더군요. 아마 바이올린을 켜던 습관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보이던데. 손목보다는 손가락, 팔을 여유롭게 뻗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뜸 비평을 하는 성호.

지현도 갑작스런 평에 당황한 듯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성호의 평은 불쾌하지 않았다.

자신 있는 어투에서 나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만 보고 내 습관을 눈치챘다는 것에 도리어 신기할 정도였다.

바이올린 활을 잡던 습관 때문인지 음과 음 사이를 이동할 때 손목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짧은 거리면 크게 상관없었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걸림돌이 되는 습관.

그 습관에 대한 그의 피드백은 대비책을 알려줄 정도로 상세했다.

마치 진심으로 조언을 해주듯.

그런 성호의 피드백에 나는 감사의 표시를 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성호 씨. 개선하도록 노력해보죠.”

그는 내가 조금 마음에 들었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대화가 통한다는 듯 성호가 입을 더 벌리려고 했지만, 중간에 한 여인이 끼어들었다.

하얀색 모자에 후드까지 눌러쓰고 선글라스까지 낀 여인.

몸을 꽁꽁 둘러쌌지만, 나는 첫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유라 씨? 여긴 어떻게 왔어요?”

“어떻게 오긴요? 차 타고 왔죠. 이안 씨 연주 직접 듣고 싶었거든요.”

유라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면서 눈웃음을 보였다.

‘유라’라는 이름에 장내가 순식간에 술렁였다.

가히 국내 정상급 아이돌의 명성에 걸맞게, 이름만 불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벌써부터 휴대폰을 꺼내 든 사람들의 셔터음이 사방에서 울렸다.

유라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이어지는 셔터음에도 나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와 달리 일행은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은 듯 셔터음이 들릴 때마다 몸을 돌려 움찔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로 올 걸 그랬습니다.”

피스가 트레이드마크인 노란 뿔테 안경을 벗고 이마에 가득 맺힌 땀을 닦아냈다.

처음엔 누군지 몰라 의아하던 사람들도 이내 휴대폰에서 그의 정체를 알아내곤 더욱 크게 술렁였다.

이번 유라의 타이틀을 피스가 작업한다는 기사가 나온 덕에 피스를 알아본 사람들은 더욱 많았다.

성호도 둘을 알아본 듯 아까 보였던 냉철한 표정은 사라지고 지현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이어진 피스의 말에 성호를 비롯한 장내 사람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거 끝나면 작업 같이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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