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배성호. 만만치 않은 학생이지.”
팔짱을 낀 채 성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좁아진 미간과 팔짱, 피아니스트로서 아버지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자세였다.
성호의 명성이 생각보다 높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한 콩쿨에서 성호를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예전에도 몇 번 콩쿨을 나갔던 학생이라 본 적이 있어.”
내가 바이올린을 켤 때만 해도 아버지께선 피아노 콩쿨 심사위원으로 많이 위촉되곤 하셨다.
지금은 나에 대한 서포트를 위해서 거의 내려놓으셨지만.
콩쿨 심사위원으로서 아버지가 내린 판단은 날카로웠다.
“연희대뿐만 아니라 한국대에서도 성호만 한 실력자가 없었지. 교환학생을 다녀오면서 격차가 더 벌어졌고.”
그의 비평에 자신감이 서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 클래식의 본고장에서 수학하면서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한 존재를 만났으리라.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력을 갈고닦았겠지.
그의 성격에서 상황이 고스란히 그려졌다.
비평가적인 면모에 유럽계 학교에서 높은 수준의 연주를 봤으니 한국의 학부생들의 실력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겠지.
아버지가 기억하는 그의 특기는 성격만큼이나 완벽에 가까운 타건이라고 했다.
그 특기가 지금, 예선장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성호의 차례와 내 차례 사이 여유가 있었기에, 나는 관객석에서 그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심사위원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 모습, 너무나 창백한 모습에 생기마저 없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기계적인 연주만 할 것 같은 모습.
그러나 건반 위에서 손이 움직이자 그 편견은 말끔히 사라졌다.
전주곡.
내가 연습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의 곡이 무대에서 펼쳐진다.
알레그로의 지시 아래에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화음.
C에서 Dm7, G7, 다시 C코드로 돌아와 Am로, D7으로.
C장조 아래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화음이 정직하게 나아간다.
특별한 기교는 없다.
위치만 바뀔 뿐, 검지와 중지, 약지가 차례대로 건반을 건드리는 게 전부.
비전공자가 보면 유치하다고 느껴질 수준이었다.
그러나, 푸가에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전환된다.
‘변화에 힘을 주는 게 느껴져.’
Moderato e maestoso.
장엄하게 보통 빠르기로.
크레셴도를 앞둔 두 마디 동안 많아 봤자 두 개의 음만 나열된 선율을 무슨 수로 장엄하게 나타낼까.
그러나 성호는 그 표현을 고스란히 펼쳐내는 데 성공했다.
깊은 생각을 할 필요 없다는 듯 굳은 표정이었지만, 그는 악보에 적힌 셈여림표를 제대로 지켜가며 연주에 임했다.
장엄하게, 여리게, 부드럽게, 점점 세게, 점점 여리게.
마디가 바뀔 때마다 변칙적으로 펼쳐지는 선율에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이미 잘 짜여진 프로그램처럼 펼쳐지는 연주.
아버지가 만만치 않다는 표현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순식간에 C장조를 펼치고 C단조를 펼치자 아까와는 다른 선율이 그의 손에서 떠오른다.
이번에는 전주곡에서부터 빠르게 몰아치는 화음.
화음이 반복되는 것은 이전과 동일했다.
하지만, 비바체에 맞춘 활기찬 선율에 단 두 개의 음표로 만들어진 화음이 마치 더 많은 건반을 누른 것처럼 울려퍼진다.
점차 빨라지는 전주곡 C단조.
끊김이 있을 법한 곳에서도 그의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보다 자연스러운 레가토를 위해 손가락을 자주 바꾸는 모습 보이니?”
아버지가 작게 속삭이며 성호를 가리켰다.
비교적 앞좌석을 선점한 덕에 성호의 손가락이 더욱 확연하게 보였다.
본래 책에는 1번과 2번. 즉, 엄지와 검지를 사용하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지만, 그는 때때로 중지와 약지까지 사용했다.
아주 미묘한 차이로 건반을 떼지 않고 다음 건반이 이어질 때까지 건반을 누르는 특이한 기술.
현란한 손가락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기교였다.
문득 지현이 알려줬던 성호의 별명이 떠올랐다.
정중한 악마.
그가 내려놓는 비평은 악의가 없었다.
하지만, 비평의 수준은 악평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했다.
사람의 실수를 정확히 꿰뚫고 특유의 정중한 말솜씨로 평을 쏟아내는 능력.
그 별명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파가니니를 ‘악마의 재능’이라고 했던가.
성호의 연주는 완벽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 또한 인정한다는 듯 조용한 박동을 내보낼 정도니까.
숱한 귀족들의 연주를 들었던 전생이 인정한다면 쉬운 상대는 아니겠지.
“아마 이번 콩쿨에서 네 라이벌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모두가 연주를 끝낸 성호를 향해 약하게 박수를 치는데도 아버지는 팔짱을 풀지 않았다.
내가 백스테이지에 가야 할 때가 오고 나서야 아버지는 표정을 풀고 응원을 덧붙였다.
나는 아버지의 응원에 고개만 끄덕인 채 복도로 향했다.
콩쿨이 한창 진행 중이라 복도는 고요했다.
내 심장 소리만 자그맣게 울릴 뿐.
전생 또한 그것에 맞춰 작은 박동을 시작한다.
귀족의 무대를 대신 올랐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이 여지없이 느껴졌다.
환희에 불타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던 것과 달리 전생의 심장은 정갈하고 정제된 박동을 내뱉는다.
그러나 백스테이지에 가까워질수록 그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운 듯 박동이 점차 커져간다.
내 것인지, 전생의 것인지 모를 울림.
예전에 바이올린 콩쿨을 갈 때면 자주 이러곤 했지.
긴장감에 심장이 마구 뛰고 숨을 헐떡였던 기억.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은 아니다.
아버지가 내 라이벌이라고 할 만큼인 사람.
전생 또한 실력을 감탄했던 성호였지만.
왜일까.
지금 입가에 미소가 피어 있는 이유는.
‘기대된다.’
성호가 말했던가.
해외에는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가 수두룩하다고.
그 말을 스스로 증명하듯 성호의 연주는 훌륭했다.
나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음에도 관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숙련도.
건반을 어루만지듯, 혼내듯 내리치듯, 그는 다양한 감정을 실어 소리를 표현해냈다.
천재들 사이에서 가르침을 받은 성호의 실력이리라.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그들이 잘한다는 말은 필요 없었다.
내가 잘하면 그만이니까.
문득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방패 같은 연주.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은 누군가를 억지로 밟고 일어나는 것이 아닌 본연의 연주를 선보이는 것.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달려 있었다.
사람들에게 억지로 내 연주가 좋다고 주입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참가번호 26번, 박이안.”
내 연주를 선보일 뿐.
건반에 올린 손을 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뿐이다.
***
빗발치는 전화에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
비행기를 타지 않았음에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촬영 지연으로 인해 스태프의 마음이 타들어 가듯, 그녀의 휴대폰도 타들어 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숱한 독촉에도 예진은 당장 일어난 사태를 해결하기보다 발길을 재촉했다.
어쩌면 지금의 선택이 밀린 문제들을 한 번에 해결해주리라.
그 마음에 예진은 청악 빌딩에 발을 들였다.
‘콩쿨장이 원래 이렇게 정신없는 곳이었던가?’
필름에 콩쿨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기 위해 숱한 취재를 했던 예진이었다.
참여자가 많아도 콩쿨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무겁기 마련.
마치 고지식한 클래식의 특징이 콩쿨장에서도 그대로 묻어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 콩쿨은 예진이 알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한가득 뭉친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으니까.
둥글게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어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선 인파를 뚫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40이란 나이를 먹고 몸을 비집고 들어가서 바라본 모습.
사람들이 이렇게나 북적한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한유라? 게다가 옆에는… 피스?’
한유라야 말할 것도 없는 국내 최정상 아이돌 가수 아닌가.
이미 드라마판에서 연기 실력을 검증해 충무로에서도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으니까.
음악 영화 감독으로서 예진 또한 언젠가 유라와 함께 작업을 하고자 했었다.
예진은 피스 또한 단박에 알아봤다.
피스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란 뿔테 안경.
협업을 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 특유의 안경은 잊을 수 없었다.
대중 가요계 블루칩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왜 여기 왔지?
이어 피스의 말은 예진의 궁금증을 해결해줌과 동시에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했다.
‘녹음 제안이라니. 게다가 이미 확정 난 상황처럼.’
예진 또한 피스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음악이 나오지 않으면 모두 새로 시작하는 완벽주의자.
협업할 때도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표출하는 모습에 예진은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철두철미한 사람이 웃으면서 협업 관련 얘기를 하고 있다니.
대체 누구와?
‘박이안.’
유라와 피스의 시선은 건실한 청년에게 향해 있었다.
예진이 찾던 피아니스트.
두 셀럽의 등장에 예진은 더욱 확신에 가득 차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느낀 감정은 허투가 아니었다고.
이번 무대에서 제대로 확인하겠다는 마음을 안고 콩쿨장에 들어섰다.
콩쿨이 시작되자 그녀는 매서운 눈빛을 장착했다.
이안의 연주 이외에는 감상만 하려 했지만, 직업병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 들리는 선율은 모조리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너무 얕아, 이 사람은 속도가 너무 변칙적이야, 왜 저렇게밖에 못하는 거지?’
숱한 음악을 들어오면서 높아진 귀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녀의 기분을 약간 좋게 만든 연주는 성호의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예진의 영화 속 인물 대역으로는 성호가 조금 더 제격이었다.
마른 체형에 큰 키, 캐스팅된 배우를 생각하면 성호의 모습이 조금 더 흡사했다.
그러나 아주 큰 단점이 가로막았다.
‘왜 이렇게 벼랑 끝에 선 느낌이지?’
분명 성호의 연주는 수준급이었다.
가지런히 펼쳐지는 손가락과 그에 맞춰 눌리는 건반.
미묘한 차이로 건반이 내려가고 올라가며 끊임없는 선율이 연속된다.
부드러움과 빠르기.
프렐류드와 푸가가 바뀌면서 분위기가 섞일 법한데, 성호의 연주는 칼로 자른 듯 예리하게 그 차이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갑게 굳은 표정 때문일까.
아니면 오직 연주에만 집중한 열성적인 모습이 그렇게 비쳤을까.
업계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달력이 떨어져.’
그녀도 영화를 위해 클래식을 수학하면서 프렐류드와 푸가를 접했다.
아주 단순한 연습곡이기에 어떠한 감정을 자아내는 것은 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진이 원하는 피아니스트는 그런 단순한 연습곡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보이지 않는 음악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에.
연습곡도 악보를 보고 치는 것이 아닌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여러 예비 피아니스트들이 선보인 연주는 그 정도에 미치지 못했다.
예진의 희망은 참가번호 26번, 이안뿐이었다.
이안의 등장에 예진의 신경이 매우 곤두섰다.
이안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오랜 직업 생활로 벼려진 기운이었다.
아무리 큰 기대감을 안고 있다 한들 그녀가 원하는 그림을 만들지 못하면 영화에 올릴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리라.’
그러나 5분 뒤.
그녀의 다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C major.
아직 마이너 프렐류드와 푸가가 남아 있었음에도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겉보기엔 여느 연주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그러나 앞선 연주에서 볼 수 없었던 미묘한 차이가 예진에게 크게 다가왔다.
성호의 연주가 벼랑 끝에 몰린 긴박함을 표현했다면, 이안은 같은 벼랑에 서 있음에도 바람을 즐기는 신선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봄철의 느낌을 띠는 C장조의 프렐류드가 흐르자 꽃밭에 선 듯 온화한 기운이 펼쳐진다.
단조로운 화음의 조합인데도 여유롭게 움직이는 손길은 건반이라는 꽃에 다가가는 나비 같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부드럽게.
그 부드러움을 즐기듯, 이안의 얼굴에는 얕은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마이너로 넘어오면서 급박해지는 속도.
그럼에도 이안의 표정은 급해지지 않았다.
단순히 급하다는 느낌보다는 임무를 하달받은 긴박한 느낌.
예진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장면이 그려졌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짐에도 파발을 보내기 위해 멈추지 않는 장수.
그리고 그런 장수를 따라붙는 의문의 추적자.
점차 빨라지는 심장 박동처럼 빨라지는 박자에 예진도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거다.
그녀가 원하는 연주.
그림을 그리듯 펼쳐지는 선율에 그녀는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올라갔다.
‘찾았다. 내가 찾던 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