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4화 (24/250)

24화

낮은 옥타브의 소리가 음악실을 가득 채운다.

얼핏 들으면 두꺼운 망치가 내리치는 것처럼 낮고 묵직한 소리.

하지만, 그렇기에 가져오는 울림이 웅장하면서도 독특하다.

낮은 선율만 반복되면 지루하기 마련인데, 아버지의 연주는 손가락에 힘을 조금씩 달리하며 조금씩 적절한 소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벌써 5시간째.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의 하얀 피아노가 맑은소리를 계속해서 내뱉고 있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아시아의 바흐, 박수철.

바로 아버지가 피스의 곡에 함께할 나의 파트너였다.

“악보는? 가지고 왔니?”

합주 협업을 제안하는 내 말에 아버지는 빙긋 웃었다.

오히려 지금 이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악보를 받아든 아버지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감상을 하는 듯하면서도 날카롭게.

공중에 손가락을 움직이며 연주를 체크하는 모습에서 노련함이 엿보였다.

한참 동안 구상을 이어가던 아버지는 악보를 내려놓으시곤 나를 빤히 바라보셨다.

“좋은 곡인데?”

인자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토닥이던 손.

그 손이 지금은 건반을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서 피어난 음색은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부분을 정확히 관통했다.

내가 기획했던 선율을 두 갈래로 나눴다.

하나는 낮은음에서, 또 다른 하나는 높은음에서.

그중 아버지는 낮은음을, 나는 높은음을 맡을 예정이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제안이리라.

그럼에도 아버지는 흔쾌히 내 요청에 수락하고 연습에 매진했다.

문득 아버지의 스승님, 김종수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네 아버지만큼만 하거라.’

아버지가 엄청난 연습벌레이신 것은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연주회나 해외 공연이 잡혔을 때는 하루의 반절 동안 음악실에서 나오지 않으실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 아버지를 닮았으니 나도 지금처럼 연습을 이어갈 수 있던 것이겠지.

그러나 그때는 아버지의 공연이었으니까.

사소한 아들의 도움 요청인데, 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서 도와주시려는 듯 연습에 연습을 이어갔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쯤 되었을 테다 하고 그만뒀을 텐데.

내가 피스와의 협업 중에도 부족하다며 아버지를 초빙한 것처럼.

아버지 또한 충분해 보이는 그의 연주를 다시금 갈고, 또 갈았다.

끊임없는 연습의 반복.

그것이 아버지를 거장의 반열에 올린 것일 테지.

“어떻니?”

내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미 완성형인 연주에 내가 얼마나 더 손을 댈 수 있을까.

여유로운 기교는 물론 가지런히 펼치는 가락까지.

덧붙일 것이 있다면 이번 곡의 컨셉 정도였다.

“약간 미련이 남는 느낌을 더할 수 있을까요? 컨셉이 헤어진 연인을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느낌이거든요.”

아버지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내 정리가 끝났다는 듯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훑었다.

방금만 해도 아버지의 연주에서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펼쳐졌었다.

아버지의 성격이 잔뜩 묻어나는 연주.

그런데 컨셉을 이야기하고 난 직후, 피아노 선율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미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끌림음.

아련하게 늘어지는 음색은 듣는 것만으로도 미련이 느껴진다.

아버지의 표정 또한 곡의 분위기에 걸맞게 바뀌었다.

평소처럼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대신, 비통에 잠긴 듯 슬픔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아마 피스가 봤다면 기염을 토했으리라.

나도 놀라울 정도니까.

“네. 딱 그 컨셉이면 될 것 같아요.”

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기호를 악보에 미리 적어두며 복기하는 듯 건반을 다시금 눌렀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

아버지의 모습은 얼핏 신나 보이기까지 하다.

마치 처음 피아노를 수학하는 대학생처럼.

오십이 넘은 아버지의 연주와 콧노래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

띵-동

초인종 소리에 은희가 개던 빨래를 내려놓고 현관으로 향했다.

미리 손님을 알고 있던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셨어요, 아주버님?”

“잘 지냈어요, 제수씨?”

염라, 박현철.

세계 최고의 마에스트로 앞에서도 허리 한 번 굽히지 않고 악수를 받았던 그 아닌가.

세상 두려울 게 없어 보이는 현철에게도 은희는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현철의 엄한 모습에 모든 사람이 한 번쯤 움츠러든 것과 달리 은희는 한 번도 현철 앞에서 움찔거린 적이 없었다.

그 때문일까.

기선 제압을 위해 항상 말을 편하게 했던 현철이었건만, 은희에게는 말을 함부로 놓지 못했다.

자신의 동생은 물론 조카에게는 한없이 엄한 현철이었지만, 은희에게는 왜인지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세계적인 거장임에도 그녀 앞에서는 모든 것이 훤히 꿰뚫린 듯.

나체로 서 있는 느낌이 든 탓이리라.

위층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현철은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

“수철이 위에 있죠?”

“어우. 말도 마세요. 부자가 아주 밤새 연습한다고… 이안이보다 애 아빠가 더해요. 아주 신이 난 것 같던데요?”

현철은 연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집중했다.

같은 피아노 소리겠지만, 그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피아노 소리에서부터 수철의 기운이 물씬 묻어났으니까.

밝고 따뜻한 곡들을 연주하기 위해 수철의 피아노는 다른 피아노보다 조금 높은 음으로 조율되어 있었다.

오랜 습관이자 수철의 트레이드마크였기에, 형인 현철 또한 그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선율.

손가락을 최대로 활용하는 수철만의 타건법이 가미된 결과였다.

그는 자연스레 풀려나오는 선율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 오르는 소리까지 죽이면서 조심스레.

소리 없이 음악실 문에 도달한 현철이 음악실의 문을 열었다.

둘은 문을 등지고 있던 탓에 현철이 들어온 것을 보지 못한 듯 피드백을 이어갔다.

수철의 연주에 포인트를 짚어주는 이안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음을 끄는 것 되게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대신, 초반부에서는 조금 줄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1절 가사까지만 해도 미운 감정을 토로하는 부분이라 미련보다는 단호함이 느껴져야 할 것 같거든요.”

“음… 이렇게?”

수철의 피아노 연주가 순식간에 펼쳐진다.

잔잔하면서도 단호하게.

레가토로 자연스럽게 선율을 이어가면서도 강세를 주어 끊고 맺음을 확실히 한다.

다소 강하게 느껴질 수 있는 타건이 건반을 통해 해머를 움직이자 내리치듯 강렬한 소리가 음악실을 메운다.

마치 분노로 가득 찬 것처럼.

오열하는 듯한 강한 선율이 피아노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분노만 가득할 것 같았던 선율은 2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다른 분위기로 변모했다.

‘슬픔이 그리움으로 변한 것 같군.’

듣기만 해도 현철은 어떤 분위기의 곡인지 알 것 같았다.

흔히 대중가요에서 나오는 사랑 이야기.

클래식의 거장이지만, 현대에서 터져 나오는 대중가요의 트렌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클래식이 성부를 통해 뿌리를 세우고 성조라는 곁가지로 다양한 변주를 선보이며 주제를 펼친다면, 대중가요는 거기에 가사라는 것을 덧붙여서 주제를 완성한다.

밝은 분위기를 위해서 장조를 사용하고, 서글픈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단조를 펼쳐낸다.

아무리 가사가 좋은 가요라 한들, 그 기본이 되는 반주가 형편없으면 전달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반대의 상황이었다.

가사가 없음에도 반주만 들었는데도 어떤 느낌을 선보이고 싶은지 유추가 될 정도.

오랜만에 들은 동생의 연주에서 그간 쌓인 노하우와 노련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수철의 연주는 현철이 자부했다.

한때 몇 번이고 자신이 가르쳤었으니까.

아시아의 바흐라는 타이틀도 있었지만, 비슷한 연배의 피아니스트들을 데려온다 한들 단연코 수철을 최고라고 뽑으리라.

그런 당연한 것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일까.

‘왜 이리 기분이 좋지 않을까.’

현철의 이마에 주름이 패여 있었다.

한때 그가 수철 앞에서 대중가요에 대해 낮게 평했던 것이 기억났다.

클래식을 수학했던 시절, 동생이란 녀석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대중가요를 들으면서 좋다고 했을 때.

한창 클래식에 매료되었던 현철은 동생 앞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딴따라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게 뭐 그리 좋다고 난리야.”

모름지기 음악이라 함은 깊이감과 기교에서 선보이는 화려함이 있어야지.

클래식이 음악의 정수라고 생각했던 그였기에.

자극적인 가사와 드럼, 기타의 선율은 과한 소음이나 다름없었다.

현철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지, 수철의 앞길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당시에는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시끄럽게 하지 말고 멀리 가라는 의미였을 뿐.

하지만, 그 말에 수철은 꽤나 동요한 듯 몸을 가느다랗게 떨었다.

수철의 몸이 떨리는 것을 봤지만, 공부가 더 중요했기에 모른 척했다.

행여나 그 때문이었을까.

자신이 대충 던진 말 때문에 동생이 독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연습벌레가 되었던 것일까.

도리도리.

현철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금 수철과 이안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반들거리는 피아노에 비친 두 사람의 얼굴.

대중가요를 수학하는 듯, 이안에게 곡 설명을 듣는 수철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자신이 피아노를 알려줄 때는 볼 수 없었던 화사한 표정.

물론 엄한 현철의 특성 때문에 그랬겠지만, 그마저도 혹 자신이 수철의 즐거움을 막은 것은 아닐까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이번에는 현철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옮겨갔다.

처음 봤을 때는 흔한 객기라고 생각했었지.

몇 주 뒤에 분명 못한다며 피아노를 내팽개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벌써 그리 생각한 지 몇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이안은 하나의 콩쿨에서 우승을 거머쥐었고, 유튜브에 수많은 팬층이 생겼고, 이번에는 홀로 힘으로 가수의 타이틀곡을 맡았다지.

어릴 때부터 이안을 후원하면서 했던 생각은 하나였다.

‘뛰어난 음악가로 크거라.’

가족 간의 연이 아니었다.

일찍부터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였던 이안의 능력을 높이 산 현철의 결정이었다.

그렇기에 콩쿨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알려줬고, 그 자리에 이안을 세웠다.

이번에 그가 집을 찾아온 까닭도 반은 수철에게서 이안의 소식을 들어서였지만, 반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기획 중인 전국 순회공연에 이안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차후에 그가 국제 공연과 국제 콩쿨로 나아간다면 경험하게 될 살인적인 스케줄을 미리 경험하게 시켜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지금 둘의 연주를 보니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래라저래라할 필요가 없었구나.’

물론 현철의 제안은 다른 곳에서 받기는 힘든 달콤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동안 현철은 그 제안들이 무조건 좋다고.

이안이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대다수였다.

클래식으로 성공하기 위해 최적의 루트라고 생각했던 것들.

하지만, 현철이 나이를 먹었듯, 세상도 많은 변화를 거듭했다.

유라와 피스처럼 대중가요에 클래식을 접목하려는 사람도 생겨났고, 과거 같았으면 부자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을 클래식을 휴대폰으로 간단하게 들을 수 있었다.

현철은 자신이 권하는 클래식 무대가 더 이상 제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더욱 강하게 클래식이라는 굴레에 자유를 묶어두는 행위였을지도.

그 속에 이안을 묶어두려고 했던 자신의 욕심은 아니었을까.

피식.

현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이 왔음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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