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피네 엔터 지하에는 거대한 강당이 있다.
흔히 새로운 앨범 쇼케이스가 열릴 때 사용되는 무대.
매번 기자들을 초청하여 화려한 쇼케이스가 열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무대에는 있는 것은 그랜드피아노 두 대가 전부.
오직 녹음을 위해 피네 엔터 측에서 공수해온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렇게 피네 엔터 사옥까지 빌려주시고.”
“아닙니다. 앞으로 저희 볼 날도 많은데 이 정도는 충분하죠.”
대표는 걱정 말라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피네 엔터 대표, 고만식.
그동안 유라와 함께 걸어온 스승이자 비즈니스 파트너.
피스와 인사를 나눈 그는 곧장 나와 아버지를 향해 다가왔다.
“영광입니다. 박수철 선생님.”
무려 박수철 피아니스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수록되는 곡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대표는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노리는 듯 눈을 반짝였다.
히트곡 제조기인 피스를 비롯하여 피스의 관심을 받은 나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기회.
어쩌면 유라보다 더욱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리라.
지금의 자리를 만들기까지 유라의 공이 가장 컸다.
“어때요? 이 정도면 녹음에 문제없겠죠?”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이며 다가오는 유라.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피스에게서 두 개의 피아노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유라가 곧장 대표에게 지원 요청을 했단다.
소식을 들었을 때의 전율을 기억하는 듯 유라의 주먹이 옅게 떨렸다.
자신의 곡을 탈바꿈한 존재이자 피아노 천재, 그리고 그의 아버지이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두 사람의 협업에 유라는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버지가 관객석 쪽을 조심스레 가리켰다.
저마다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있는 사람들.
꽤 빼입은 모양새가 연습생은 아닐 테고…
다들 연예계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인물들 같았다.
유라는 그들을 슬쩍 보고는 곧바로 알려주었다.
“사실 이미 업계에 소문이 쫙 퍼져버렸어요. 피스가 이안 씨와 선생님과 콜라보를 한다고요.”
기사화되지 않았지만, 업계의 소식통은 무척이나 빨랐다.
피네 엔터의 경쟁사는 물론 다른 작곡가들에게 소문이 퍼졌을 정도.
그 때문에 수많은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나 또한 뉴스에서 본 사람들이었다.
대중 가요계에서는 최고를 달리는 사람들이었다.
피네 엔터의 경쟁사이자 국내 3대 소속사로 불리는 엔터들의 수장들.
국내 No. 1 작사가, 봄마다 돌아오는 후크송의 창시자, 게다가 강예진 감독님까지.
그 외에 당사자들이 데려온 손님 때문에 강당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히려 피스도 놀랄 지경.
“죄송합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올 줄은 몰랐거든요. 연주에 방해가 된다면 모두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연주에 방해된다면 그때 내보내면 그만.
그렇지 않다면 저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 기회가 되리라.
이때 한 청년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아버지를 향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혹시 저 기억하시나요?”
“네, 기억합니다. 그때 연주회에 오셨던 작곡가분이시죠? 피네 엔터 소속이셨군요.”
“맞아요. 그때는 거절하시더니! 조금 섭섭합니다, 선생님.”
장난스레 맞받아치는 작곡가의 말에 아버지는 대답 대신 멋쩍은 미소를 내보였다.
둘 사이의 대화를 들어보니 얼핏 기억이 날 것 같았다.
꽤 오래전 밥상머리에서 들었던 이야기.
한 소속사에서 연주 제안이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는 연주회 중이기도 했고,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응하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피스 씨의 곡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흔쾌히 녹음까지 하시는 걸 보면.”
“좋은 곡이더군요. 그리고…”
아버지의 시선이 자연스레 나를 향했다.
“아들의 요청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죠.”
아버지의 말이 들렸는지, 업계 관계자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마치 아버지를 움직이게 하려면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처럼.
하지만, 그들에게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의 눈길에 많은 감정들이 녹아있었으니까.
뿌듯함과 함께 대견함, 그리고 미묘한 고마움.
여러 감정들이 교차한 마음이 눈빛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에 화답하듯, 나는 자신 있는 미소를 보였다.
“자, 준비 끝났습니다! 녹음 들어갈게요.”
피스의 말과 함께 유라와 대표도 무대에서 내려갔다.
무대에는 오직 아버지와 나, 단둘뿐이었다.
콩쿨을 몇 번이고 오갔던 무대였건만.
아버지와 둘이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아버지와 나만을 위해 마련된 협주회 자리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엄숙하기까지 하다.
음악실에서도 연습을 위해 몇 번이고 마주 앉았건만, 그랜드피아노 너머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웃음에 화답하듯, 아버지는 은근한 미소를 내보였다.
어쩌면 즐거워하고 계시리라.
아직도 연습 때 아버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수없이 연습을 거듭하면서도 이 순간이 재미있고 신난다는 듯.
즐겁게 건반 위에 손가락 춤을 추시던 아버지.
작곡가의 대답과 함께 나를 향했던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피스가 손을 위로 뻗어 주먹을 쥐었다.
녹음을 시작했다는 의미.
아버지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메트로놈 따윈 없었다.
오로지 둘 사이의 협동만 존재할 뿐.
눈빛을 맞추며, 서로 고개를 함께 까닥거리며.
Adagio.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음에도 피아노 건반에 네 개의 손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대단한 사람을 초빙했다는 피스의 말에 대성은 오랜만에 찾아온 쉬는 날도 반납하고 피네 엔터로 향했다.
정대성.
피스가 만들어낸 그룹, 코스모의 리더이자 리드 보컬.
그와 동시에 피스와 함께 코스모의 곡을 만드는 창작자이기도 했다.
이번 빌보드 차트인에 성공한 노래도 시초는 그의 것이었다.
피스마저도 인정한 뛰어난 작곡 실력, 거기다가 그 작곡을 그대로 노래로 현현하는 보컬 실력까지.
피네 엔터의 수장, 만식에게 유라가 있다면, 피스에게는 대성이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토록 오래 함께 해왔기에 대성은 피스의 작업 특성은 물론 성격까지 모두 꿰뚫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다면 시작도 하지 않고, 확신이 없다면 장담조차 하지 않는 성격.
오죽했으면 대성을 비롯해 코스모의 멤버가 항상 듣는 말이 ‘더’였겠는가.
멤버들을 가장 힘들게 만든 말이었지만, 대성은 그런 대쪽 같은 피스가 마음에 들었다.
‘더’라는 마법의 단어로 나은 선택지가 나타나고, 더 좋은 곡이 탄생했으니까.
실낱같은 차이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채워 넣을 줄 아는 디렉팅 실력.
대성이 피스의 곁에 남아 있는 이유였다.
그런 그가.
“대성아. 이번에는 기대해도 될 것 같다.”
대성은 그날 처음 피스의 입에서 ‘기대’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아주 확신에 가득 찬 음성으로.
귀한 손님 덕에 자신들의 곡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고.
그랬기에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곡을 받고도 기대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던 피스였으니까.
대체 어떤 인물이 칼 같았던 그의 마음을 이리도 녹여놨을까.
이안의 연주를 듣는 순간, 그 의문은 단숨에 사라졌다.
그 또한 마음이 녹아내렸으니까.
‘엄청 평범해 보였는데…’
사실 처음 이안의 모습을 보았을 땐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수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몰랐으니까.
그래서 대성은 처음에 피스가 말한 귀한 손님이 수철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되자 그 대상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말도 안 돼.’
대성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입이 벌어졌다.
의식을 하고 닫았는데도, 정신을 차리면 입이 벌어져 있었다.
문제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는 것.
그동안 숱한 오디션을 봤던 그에게 익숙한 사람도 몇 있었다.
유명 소속사의 대표와 보컬 트레이너, 작곡가들까지.
그런 사람들이 모두 수철과 이안의 연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둘의 합은 말로 표현하기 부족한 정도였다.
‘서로 건반이 안 보일 텐데 저렇게 합을 맞춘다고?’
합을 맞추는 것에 대해서는 대성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기본적인 댄스를 위해 멤버들과의 합을 맞추는 데 도가 텄을 정도니까.
하지만, 멤버들도 새로운 안무, 새로운 곡을 받았을 때는 미묘한 차이로 그 합이 틀어지기 마련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춤, 보컬에 치중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바라보지 못한 탓이었다.
무대에서 그 합이 무너지는 순간, 오합지졸이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컴백 준비 기간에는 2할이 개인 실력, 8할이 합을 맞추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안과 수철은 눈을 감으며 자신의 연주에 집중하면서도, 때론 눈을 떠 서로를 응시하면서 합을 맞춰가고 있었다.
마치 서로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처럼.
지금 멤버들과 20년 정도 같이 활동하면 저들처럼 할 수 있을까.
‘심지어 곡도 너무 잘 나왔어.’
낮은음과 높은음을 맡은 각자의 피아노가 소리를 내면서 주행한다.
평행하게 나아가는 듯하면서도, 때론 서로 엇갈리게.
음색이 함께 약해지거나 강해질 때도 있었고, 반대로 상대를 누르듯 전개되기도 한다.
마치 한 사람이 네 개의 손으로 연주하듯.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음색의 향연.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당장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는 당장이라도 무대 위에 뛰쳐나가서 마이크를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직 가사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당장이라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가사가 머릿속에서 쏟아지는데.
피스와 함께 곡의 컨셉을 잡은 것이 다름 아닌 대성이었으니까.
처음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1차 완성을 했을 때 들었을 때도 충분히 그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작업실에서 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피아노 연주가 격해질수록, 그의 가슴 또한 격하게 뛰었다.
Please Go away. 내가 찾을 수 없게
Please Run away. 내가 쫓을 수 없게
Please Throw away.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도록…
당장이라도 피스에게 달려가 가사에 넣자고 하고 싶은 욕심.
지금 울려 퍼지는 선율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
마치 천사와 악마가 양쪽에서 속삭이듯 반대되는 욕심이 혼재했다.
대성은 떠오르는 가사를 휴대폰에 옮겨적으며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했다.
‘이게 기존 신디음에 겹쳐지면 어떻게 될까?’
대성은 디렉팅 때 들었던 음색을 최대한 떠올렸다.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넣은 묘한 신디음의 향연.
머릿속에서 피아노와 신디음이 합쳐지자 기대감은 배가 되었다.
그제야 피스가 기대된다는 말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클래식의 팬이 될 것 같은 황홀한 화음.
앞으로 작곡을 할 때 참고하고 싶은 수준이었다.
하이라이트를 달려 마무리에 닿았을 즘 미묘한 떨림음에 그는 애가 탈 지경이었다.
곡에서 미련을 제시했듯, 대성도 곡에 대한 미련이 생길 것 같았다.
곡이 마무리되었음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직 피스의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
피스는 마지막 끌림음까지 모두 마이크로 잡으려는 듯 신중을 기했다.
그가 손을 높게 들어 올려 다시금 주먹을 쥐자…
짝짝짝짝짝
대성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그제야 두 피아니스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