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6화 (26/250)

26화

‘경이롭다.’

예진은 두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연주에서 풍겨오는 압도감은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무시하고 꽂힌다.

높고 낮은 선율이 동시에 피어오르는 환상.

클래식과 영화를 함께 했던 예진에게는 더욱 뜻깊은 선율이리라.

감독이라는 위치에서 바라봐도 이안과 수철의 연주는 완벽에 가까웠다.

아니, 완벽을 넘어서 한 사람이 연주하는 것처럼 정교하다.

그렇기에 경이롭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런 게 바로 영화가 아닐까?’

차기작으로 이안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청년이 피아니스트라는 새로운 꿈을 찾고, 그것을 선배 피아니스트인 아버지가 인도하는 아름다운 그림.

때로는 각자의 연주를 하기도, 때로는 함께 연주를 하기도 하겠지.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은 기술적으로, 인간적으로 성장할 테다.

그녀가 원하는 스토리였다.

짧은 시간 내 엄청난 성장세로 자라나 멋진 연주를 선보이는 이안처럼.

그런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선배로서 연주를 이어나가는 수철처럼.

그 사이에서 이안에 대한 반대도, 수철에 대한 우려도 있을 테지.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둘은 서로를 의지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성장할 테다.

예진은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단순히 불쌍한 주인공이 음악을 해서 희망을 찾는다는 내용이 아닌, 보다 입체적인 인물들이 선보이는 영화를.

그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고, 감동하길 원했다.

‘지금 연주도 촬영하고 싶을 정도야.’

매번 촬영장에서 ‘다시!’를 외쳤던 그녀였다.

연기는 미묘한 차이가 스크린에 담겼을 때 엄청난 효과를 자랑한다.

숨을 헐떡이는 정도, 시선 처리, 발음을 하는 스타일까지.

조금 더 나은 화면을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촬영를 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다시!’를 외치고 싶었다.

지금 귓가에 들리는 멜로디를 다시금 듣고 싶어서.

가슴에 울려 퍼지는 서글픈 감성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카메라를 대동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

어떻게 하면 저 장면을 남길 수 있을까.

‘메이킹 필름이라면…?’

순간, 예진은 자신의 생각을 당장 말하고 싶어서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아직 연주가 끝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고 몸을 가다듬었다.

메이킹 필름.

흔히 영화나 드라마, 더 나아가 뮤직비디오까지.

거대한 대서사시를 만들기 위해 스타들이 하는 소탈한 이야기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스크린에서는 근엄하고 진지했던 사람들이 메이킹 필름 속에서는 일상적이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니까.

사람들은 그런 스타들의 모습에 친근감을 느끼고 새로운 매력에 빠진다.

머릿속에 결심이 선 예진은 곡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떨어질 때, 예진은 곧장 부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연주에 대한 피드백을 나누며 다음 녹음을 준비했다.

예진 또한 둘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

“지금 이 모습. 촬영해도 될까요?”

***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의 손길이 가벼웠다.

아직도 신이 나신 듯 자연스러운 콧노래.

하긴, 연주를 하며 마주쳤던 아버지의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했으니까.

그 모습에 수많은 작곡가들이 다가갔었지.

“이거 다 명함이에요?”

나는 콘솔박스에 한가득 쌓인 종이들을 보며 말했다.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가득 찬 작곡가들의 명함.

연주가 끝나고 아버지께 다가가는 작곡가들이 많은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운전을 하는 아버지가 멋쩍은 듯 웃었다.

“이제 내가 클래식 말고 대중가요로도 손 뻗는 거 아니냐고 관심이 많더구나. 현장에 있던 작곡가들이 이래저래 제안을 많이 하더라고.”

아버지는 작곡가와 제작진이 꺼내놓은 제안에 대해서 하나둘씩 얘기해 주셨다.

전속 계약을 하자는 말을 시작으로 전용 밴드를 창설하자는 말, 기존의 곡을 앨범으로 내보자는 제안까지.

클래식과 대중가요를 넘나들며 여러 제안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꺼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 아니면 안 한다고 확실히 얘기했지.”

절레절레.

누가 아들바라기 아버지 아니랄까 봐.

못 말린다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나는 허벅지 위에 놓인 서류 봉투에서 종이 뭉치를 하나 꺼내 들었다.

‘두껍다.’

감독님이 건넨 파일은 종이 두께만 엄지손가락 굵기에 맞먹었다.

단순히 악보 몇 장만 건네주고 끝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시놉시스에 담긴 인물 설정은 물론, 대본의 일부까지 첨부한 상태였다.

대역도 좀처럼 쓰지 않으려고 하던 그녀의 성격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파일.

속에 적힌 내용들을 차근히 읽어보니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다.

‘그림 그리듯 연주하는 실력이 필요해요.’

그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정말로 필요로 하는 부분이었다.

“감독님이 건넨 파일이구나?”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각장애인.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은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고스란히 서류에 적혀 있었다.

어떠한 사건에 대해 인물이 느꼈을 감정과 행동 양식에 대한 정보까지.

사소한 성격과 습관 등, 주인공을 이해하기 위한 모든 것들이 상세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뛰어난 영화감독의 대본은 읽는 것만으로도 마법이 펼쳐진다고 했던가.

전생의 기억이 합세하자 그 마법은 현실이 되어갔다.

‘마치 처음 음악을 접한 전생처럼.’

전생에게는 눈이 있었지만,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신분이 없었다.

함부로 음악을 감상하고, 재능을 펼치는 것은 죄악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전생은 대본의 내용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는 듯 깊은 박동을 전달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겪었다는 것처럼 안타깝게.

존재하지도 않는 영화 속 인물을 향해서 자신이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다고 항명하듯 전생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녀석 또한 모두가 갈 수 없다고 생각한 길을 걸었던 사람이기에.

주인공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피아노를 무서워했을 것 같아요. 부딪쳤을 수도 있고, 만져봐도 좀처럼 뭔지 감이 안 왔을 테니까요.”

“그렇지. 게다가 갑작스레 소리를 들었다면 더욱 그럴 테고.”

아버지는 내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쳤다.

묘하게 영화 속 주인공은 전생과 닮아있었다.

병이 주인공의 눈을 앗아갔던 것처럼, 전생은 하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재능을 빼앗겼다.

사람들이 주인공의 피아니스트 도전을 만류하던 것처럼, 전생도 하인들의 만류를 받았지.

전생의 기억 덕에 주인공의 성격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벌써부터 전생이 약동하기 시작한다.

악보를 차근히 넘길수록 복사되듯 뇌리에 박힌다.

그대로 베끼는 듯하면서도 어디에 특이점을 줘야 할지, 크레셴도를 얼마나 크고 웅장하게 사용할지 등 수많은 표현법이 일렁인다.

더 나아가 시놉시스에 적힌 주인공의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오선지로 형상화된 주인공이 완성되자 그 무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망이 북받친다.

한참을 종이뭉치만 바라보던 나에게 아버지가 툭, 말을 내뱉었다.

“알겠다.”

난데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의 눈빛에는 강한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했다.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어느덧 우리는 주차장에 있다는 것을.

정신없이 악보와 대본을 보는 동안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빠질 정도로 대단한 그 열정. 그 덕에 네 실력이 그렇게나 빨리 늘었구나.”

나는 물끄러미 악보를 쳐다봤다.

전생과 닮아 있는 주인공의 삶.

그것을 재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나도 모르게 아버지께 생각을 내뱉었을 정도니까.

음악을 처음 느꼈던 것이 흥미보다는 공포였을 주인공.

제대로 되지 않는 연주를 해보겠다고 애를 쓰고, 그것에 무너져도 봤을 주인공.

하지만 그럼에도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워 다시금 연습에 연습을 기한 끝에 무대에 오르는 모습까지.

그것을 차근히 들은 아버지께서는 내가 그동안 어떤 마음가짐으로 피아노를 잡았는지 느끼신 듯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마치 전생의 유지를 잇는 것처럼 생각했던 마음은 어느덧 내 심장에 박혀 있었다.

나 또한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길.

그렇기에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충실하고, 그것을 위해 때론 전생,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며 여기까지 올라왔다.

물론 내가 이 정도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의 반은 전생 덕이리라.

하지만, 그것을 이어나가려는 나의 의지 또한 있었기에 지금에 올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전생이 동의한다는 듯 박수 같은 박동을 내뱉었다.

“벌써 영화 대역도 참여하고, 나중에는 더 큰 무대에서 뛸 것 같은데?”

“글쎄요. 아버지가 작곡가들한테 그렇게 말씀하셔서 제 몸값이 엄청 뛰었을 텐데. 너무 올려서 들어오려던 제안도 막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내가 익살스럽게 얘기하자 아버지는 피식하며 웃었다.

“사내대장부라면 그 정도 스케일은 감내해야지.”

***

“이안 씨. 어서와요. 촬영 현장은 처음이죠?”

차에서 내리자 감독님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내가 맡은 촬영은 일주일 뒤였지만, 현장 감각을 위해서 그녀가 특별히 초대한 것이었다.

아마 현장 감각뿐만 아니라 주인공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이겠지.

나도 상황에 맞는 최고의 연주를 하기 위해선 미리 답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이로 보는 것과 실제 보는 세상은 다를 테니까.

주인공의 분위기를 관찰하기 위해 촬영장을 보는 내 눈이 매서워졌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촬영을 점검하고, 배우들은 슛에 들어갈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연기에 매진한다.

서글프게 우는 배우의 목소리는 연기가 아닌 실제처럼 촬영장에 울려 퍼진다.

시간을 고스란히 담는 예술, 영화의 미학이 펼쳐지는 현장.

“이안 씨가 대역으로 해줄 배우님 소개해드릴게요. 성훈 씨!”

감독님은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남성에게로 다가갔다.

아까 바닥을 더듬으며 울던 배우.

부름에 응한 남성이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사뭇 놀라 절로 눈을 끔뻑였다.

남성은 놀란 나를 향해 여유롭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반갑습니다. 윤성훈이라고 합니다.”

윤성훈.

명실상부 국내 탑 배우.

충무로, 아니 대한민국에서 모르면 간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서른이 넘는 나이에도 곱상한 외모에 학교 드라마에 출연해도 위화감이 없는 잘생긴 외모.

숱한 드라마, 영화에서 활약하는 것은 물론 뮤지컬에서도 두각을 보여주기까지.

뮤지컬 무대에서 직접 피아노를 친 모습은 팬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회자되는 모습이었다.

아마 감독님 또한 그것을 의식하고 그를 캐스팅하셨던 것이겠지.

“안녕하세요. 박이안이라고 합니다.”

나 또한 그의 악수에 화답하며 소개를 덧붙였다.

그런데, 다소 굳어 있던 성훈의 표정이 내 소개에 점차 밝아졌다.

카리스마 넘치던 얼굴이 서서히 흩어지더니 개구진 아이의 모습이 엿보였다.

“팬이에요! 연주하는 모습 봤습니다.”

감독님도 뜻밖이라는 듯 나와 성훈 사이를 번갈아 가며 시선을 옮겼다.

나도 그녀처럼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아 성훈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과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천천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에 캐릭터 구상을 하면서 이안 씨 영상을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을 보다 보니 제가 팬이 될 지경이더군요.”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배역인 21살 청년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던 중 내가 올린 유튜브 영상을 많이 참고했다고.

특히 암보를 해서 악보 없이 연주를 선보였던 영상을 보고 큰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악보에 눈이 고정되지 않은 면모가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의 면모를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즐기듯 은은하게 눈을 감고 웃는 모습이 영화로 나온다면 무척이나 치명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휴대폰으로 찍은 탓에 표정이나 눈의 깜박임이 잘 보이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관찰했다는 것에서 그의 프로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악보를 볼 수 없을 테니까요. 이안 씨는 외울 때 어떻게 외우시나요?”

그는 도리어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날렸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악보를 숙지할지 묻는가 하면, 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연주할 때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방식 등 연기에 필요한 정보들을 세세하게 챙겼다.

그와 대화를 하는 순간에는 톱스타가 아닌 그저 피아노를 전공하는 형처럼 느껴졌다.

질문 세례를 날리는 성훈의 모습에 감독님도 뿌듯하신 듯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저 사인도 좀 부탁드립니다!”

아, 아직 사인 없는데.

지난번처럼 이름을 그대로 적으려는데, 그가 꺼내 든 것에 놀라 손이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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