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7화 (27/250)

27화

새벽이 넘은 시간.

하지만 음악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휴대폰을 바라봤다.

며칠 전, 촬영장에서 성훈과 찍었던 사진이 고스란히 화면에 떠올랐다.

어색한 듯 하면서도 표정은 행복한 듯 밝게.

성훈은 작은 종이 하나를 카메라에 보이게끔 들고 있었다.

6.25 전쟁 70주년 대한 오케스트라 공연

멋진 연기 화이팅입니다. 박이안.

용사님을 모신 대한 오케스트라 공연.

큰아버지의 제안으로 루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날이었지.

성훈이 건넨 건 다름 아닌 그날 공연 티켓이었다.

그는 유튜브에서 봤던 내가 공연장에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렇기에 가지고 있다가 나와 만날 일이 있으면 꼭 사인을 받으리라 다짐했다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적은지라 다소 엉망진창인 글씨체인데도 그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괜스레 지난번에 떠올렸던 것들이 기억났다.

내가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생각했던 것.

전생이 부럽다고 느낄 정도였던 사람들과의 소통.

“이안 씨가 등에 손을 올렸을 때 되게 경건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다른 장병들께서도 무대를 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 생활이 떠오른다고 했다.

분명 나라를 지킨다는 의무로 간 군대인데, 사람들이 좋지 않은 말로 표현하는 것에서 회의감이 들곤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을 몰아내듯 나의 연주는 감성적이라고 덧붙였다.

나라를 지켜주어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고.

내 생각이 고스란히 전달됐다는 생각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 인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악보와 함께 대본을 바라봤다.

전생과 닮았지만, 현재의 나와는 정반대되는 주인공.

나에게는 끝없는 지지를 보내는 부모님도,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큰아버지도 계셨으니까.

병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역경을 이겨내고 무대에 올랐다는 주인공을 내가 나타낼 수 있을까.

한창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전생은 속삭이듯 가슴을 진동시켰다.

마치 전생이 떠오르고 처음 피아노에 손을 올렸을 때처럼.

‘괜찮아. 해 봐.’

자신의 생과 닮아 미친 듯이 두근거리던 전생의 심장은 이제 진정되었는지 차분한 박동을 내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는 나를 향해 응원의 박동을 보냈다.

녀석의 의지에 나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이니까.

열정 덕분에 내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마지막 한 번만 더.

내 머릿속에 있던 이야기를 내려보겠노라.

내일이 촬영일이니까.

마치 음악실이 촬영 현장이라는 생각으로, 손가락이 가지런히 춤을 췄다.

그리고 끝났을 때, 내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 있었다.

***

야외에서 촬영을 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실내 촬영이었다.

가운데 피아노가 놓여있는 정육면체의 구조물.

구조물에는 검은색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운데를 비롯하여 4면에 해당하는 곳에도 각기 다른 피아노가 설치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피아노 주변을 감싼 원형 레일과 레일에 설치된 카메라가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원테이크(One take).

감독님이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특수 제작된 세트장이었다.

“컨디션은 어때요, 이안 씨?”

감독님이 작업복 차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피아노를 살폈다.

갈색 업라이트 피아노.

울림판과 현들이 가로놓인 그랜드 피아노와 달리 수직으로 세워진 피아노.

나보다 전생이 특히나 반가움을 자아내는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생이 처음으로 만졌던 피아노와 비슷하게 생긴 피아노인 탓이었다.

둥.

건반을 살포시 누르자 굳건한 소리가 금세 세트장을 채운다.

성훈도 피아노 소리를 들었는지 머리핀을 고정한 채 내게 다가왔다.

둘은 미리 짜두기라도 한 것인지 함께 이번 촬영에 대해 늘어놓았다.

“이미 들었겠지만, 이번 촬영은 원테이크로 진행되는 탓에 이안 씨의 연주가 무척이나 중요해요. 물론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래도 신경 써 주세요.”

“작중 시혁은 조심스럽게 건반을 누르는 것으로 시작해요. 그 사이에서 자신의 과거들을 떠올리는 장면이니 그것에 따라 변화를 주는 것이 중요해요.”

촬영 자체에 대한 중요도와 인물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어떤 부분을 조명해야 하는지 상세한 말들이 오간다.

이미 전생과 생각을 마쳐둔 부분도 있었지만, 감독님이 말한 연주의 중요성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곡이 펼쳐지는 3분.

철저하게 짜여진 계획대로 곡의 부분마다 촬영 위치가 바뀐다.

그러니 나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연주를 완성해야 한다.

그래야 예정된 대로 장면을 보여주고,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재빨리 준비를 할 테니까.

이미 카메라가 순회하는 위치와 속도까지 악보에 명시해두었기에.

나는 그것들을 다시 한 번 더 머릿속에 되새김질했다.

“불편하진 않아요?”

감독님이 바디슈트를 입은 나를 향해 물었다.

얇으면서도 근육이 잘 잡힌 성훈의 모습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 같은 사이즈의 옷과 부스스한 가발까지 씌우자 앉아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쌍둥이였다.

바디슈트 때문에 연주에 불편함이 있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생각 외로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묘한 기억이 밀려올 뿐.

‘마치 전생 때 같네.’

운명의 장난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전생의 심장이 떨린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솜을 채웠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실리콘으로 된 바디슈트를 입고, 하얀 정통 가발 대신 검은 더벅머리 가발, 게다가 피아노 주변을 두른 실루엣까지.

가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전생의 기억을 향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전생의 감각에서 울컥함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나는 녀석에게 진정하라는 듯 심호흡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아니야.

곧 그 감정을 여지없이 터뜨릴 수 있을 테니 기다리라고.

내가 피아노에 앉아 순식간에 촬영장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리허설 없이 곧바로 들어가는 촬영.

처음부터 실전이라니.

손에 절로 땀이 맺혔다.

“자! 슛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들 위치하시고!”

감독님의 목소리에 진득한 무게감이 실렸다.

내 프로필을 읊을 때 들었던 간결하고 가벼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촬영장 전체에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목소리.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모든 스태프가 긴장 어린 시선으로 자신의 목표를 바라봤다.

철컥.

슬레이트가 소리를 냄과 동시에 감독님이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바람대로.

나는 조심스레 눈을 감고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성훈이가 저렇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는데.’

예진이 성훈을 본 세월만 5년째다.

그와 같이 작업을 한 것도 몇 번.

그는 서글서글한 성품을 가졌지만, 무척이나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오죽하면 상대역이 제대로 연기를 준비해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날 선 비판을 하기 일쑤.

처음에는 10살이나 어린 대역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지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첫날 만난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것을 보고 예진은 걱정을 내려두었다.

‘도리어 신난 눈치였지.’

마치 자신이 이안의 연주를 들었을 때처럼.

자신보다 훨씬 어린 이안에게 조언을 구하는 성훈의 모습에 그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으니까.

예진은 그런 성훈의 면모를 높이 샀다.

촬영을 위해 취재도 불사하는 뚝심.

그를 보며 언젠가 할리우드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성훈 옆에서 차근히 설명을 곁들이는 이안도 예진의 눈에는 대단했다.

‘어쩜 긴장한 모습도 없이 당당할까.’

능력 위주 캐스팅 덕에 예진은 신예 배우들과 작업을 많이 해본 터였다.

하나같이 능력은 출중하나, 첫 촬영이라는 긴장감 때문에 실수를 하는 것이 매번 안타까운 점이었다.

촬영장에 미리 놀러 오라고 했던 이유는 그 때문도 있으리라.

하지만, 성훈이 살가운 것에 잠깐 당황한 모습을 보인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움찔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대역을 위해 바디슈트를 착용하는데도 표정 변화 없이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전문 대역 연기자를 데려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랬기에 기대감은 더욱 증폭됐다.

여유롭게 촬영장에 녹아드는 성격, 누가 뭐래도 최고의 연주 실력.

이 두 개의 하모니가 어떤 씬을 만들어낼지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철컥.

슬레이트가 부딪치며 이안의 독주가 펼쳐진다.

정시혁.

소년은 어릴 때 열병을 앓으며 시력을 잃었다.

그에게 검은 세상은 당연했고, 앞길 또한 그것만큼 새카맸다.

그런 시혁이 처음 교회에서 들었던 피아노 소리는 공포였다.

처음 피아노 선율을 들었던 그는 그것이 천둥소리인 줄 알고 비가 온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에게 조심스레 피아노를 만지게 해준 사람.

그의 어머니였다.

‘아이처럼 조심스럽고 약하게.’

차례대로 음계를 넘나드는 아르페지오의 선율.

마치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건반에서 나오는 소리는 느릿하지만 정확하다.

그와 동시에 카메라와 배우들이 빠르게 움직인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반바퀴 회전한 카메라는 반대편에 있던 아역 배우를 조명한다.

눈을 가린 아역배우가 피아노에 손을 댔다가 불에 댄 듯 화들짝 놀란다.

하지만 다시금 조심스레 건반을 누르자 미소를 터뜨리는 아이.

시혁이 처음으로 피아노를 느낀 시점이었다.

‘소년기. 피아노를 떠나지 않는 시혁.’

다시금 회전한 카메라는 이번에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역 배우를 비춘다.

피아노를 좋아하여 하루 종일 뚱땅거리지만, 눈이 보이지 않으니 제대로 소리를 낼 리 만무.

그런 아역 배우에게 성훈이 다가간다.

마치 헬렌 켈러의 스승, 설리번 선생님처럼.

소리를 느낄 줄 아는 시혁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한 스승이었다.

그 환희를 느낀 듯 단조로웠던 선율이 조금씩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이전보다 훨씬 다채로운 음색이 촬영장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고배를 맞이하지.’

성훈이 다음 장면을 위해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 동안 이안의 연주가 카메라에 담긴다.

밝은 분위기에서 순식간에 단조로 바뀌며 우울감이 감돈다.

뛰듯 튀는 박자는 죽은 듯 느려지고 빗방울처럼 툭, 떨어지듯 나오는 음색이 형형한다.

스승의 죽음.

소리 없이 펼쳐지는 연기임에도 그 처절함이 드러날 정도로 성훈의 연기는 훌륭했다.

장례식 연단을 볼 수 없으니 꽃과 연단을 차례로 훑으며 사진을 더듬는 성훈.

소리 없이 붉게 물든 얼굴에서 비통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나 그동안 쌓였던 기억은 인간에게 힘이 되지.’

이안의 연주에서 밝은 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의도된 불협화음 속에서 펼쳐지는 은은한 선율.

카메라가 비춘 성훈의 주변에 아역배우들이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손을 올린다.

마치 이전에 자신이 연주했던 피아노를 떠올리라는 듯.

그제야 일어선 성훈은 양복을 매만지고 마지막 남아있던 피아노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동안 이안을 비추던 카메라는 자연스레 성훈을 비추고, 마치 성훈이 연주하는 것처럼 이안의 연주가 흐른다.

아기의 걸음걸이에서 환희에 찬 다채로움으로, 우울감에 빠졌다가 다시금 떠오르는 시혁의 스토리.

예진은 촬영 화면을 지켜보면서 흥분감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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