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28화 (28/250)

28화

-이안 씨. 연주 영상 잘 받았습니다. 편집 후 업로드할 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감독님은 약속을 지켰다.

자신이 아는 편집자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했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녀는 다음에 촬영팀까지 꾸릴 것이라고 선전포고 같은 말을 내뱉었다.

감독님이 잡았던 손에 여전히 온기가 남은 듯 따뜻했다.

“이안 씨.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내가 원하던 그림, 내가 원하던 음악이에요!”

말을 하면서 감독님의 손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손을 놓았을 때는 새빨간 자국이 남았을 정도.

아릿한 느낌이 들면서도 입에서 미소가 떠나가지 않은 이유는 왜일까.

그 대답은 전생의 심장이 대신 알려주듯 마구 뛰었다.

‘기쁜 거구나.’

전생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던 것처럼, 내 기억들이 차례대로 흘러들어왔다.

전생이 떠오르고 난 직후 처음 연주했던 피아노.

수많은 걱정들을 내려두고 본능에 충실했던 연주.

그 덕에 지금까지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기세를 몰아 콩쿨에 진출해 우승을 했고, 그 실력을 증명하듯, 큰아버지의 애피타이저 무대에 올랐지.

여전히 나를 향해 박수를 쳐주시던 용사님들의 표정이 선했다.

‘유튜브에 올렸다가 스타도 됐지.’

피식.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금 어이가 없었다.

새로고침 한 번에 구독자가 수만을 찍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상이 가져온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국내 최상위 아이돌, 유라의 곡을 제작하는가 하면, 이를 통해 된 알게 된 피스와 협업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합주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리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콩쿨 예선을 지나 이번에 촬영한 영화 대역까지.

불과 몇 달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지.

그리고 그 사이에는 내 행복감이 가득 차 있었다.

‘바이올린을 켤 때 느끼지 못했던 환희.’

매번 의무감에 바이올린을 켰던 나였다.

실수하면 안 된다, 문제를 일으켜서도 안 된다, 가족의 명성에 누를 끼쳐선 안 된다.

안 된다는 생각들로 점철된 나였기에.

지금은 꽉 막혔던 물꼬가 트인 듯 상쾌했다.

바이올린을 잡을 땐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던 손이 피아노 위에서는 도리어 더욱 흥분해서 날뛴다.

어서 더욱 나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야생마처럼.

그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그에 반응하듯 전생의 심장도 열렬한 박동을 보내왔다.

‘녀석도 느끼고 있겠지.’

전생은 나를 통해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만끽했으리라.

영화 대역을 하며 느꼈던 전생의 감정이 고스란히 흘러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릴 뻔했으니까.

기쁨의 눈물이라고 했던가.

흥분감에 날뛸 줄 알았던 전생은 도리어 묵직한 울림을 보내왔었지.

마치 전생이 과거엔 들키지 않게 자신의 감정을 조절했다면, 지금은 연주에 집중하기 위해.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내려놓기 위해 더욱 평정심을 찾는 듯했다.

일련의 과정들을 떠올리니 문득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각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느낀 감정을 남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 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젠 또 다른 무대를 선보일 때였으니까.

본선 합격 문자가 온 것은 어제였다.

게다가 함께 온 본선곡 주제는 무척이나 간결했다.

50분 내외의 자유곡.

예선과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의 곡 선정이었다.

선정 자체를 금지했던 예선과 달리 본선은 높은 자유도를 요구했다.

아마 자유곡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심사를 하겠다는 것이겠지.

본선을 준비하는 누군가는 곡 선정에서부터 골머리를 앓고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오히려 반가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내 손이 자연스레 음악실 서가를 훑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여러 곳에서 찾지 않았다.

내 손가락은 분명히 하나의 곡을 찾고 있었으니까.

“찾았다.”

서가에서 알맞은 악보를 꺼낸 입에서 자연스레 소리가 나왔다.

교향곡 9번, 일명 <합창>.

베토벤의 곡이었다.

악보를 펴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에 <합창>의 악보가 1악장부터 4악장까지 빠짐없이 떠오른다.

뒤이어 전생의 심장이 그리움에 뭉클한 심장 박동을 보냈다.

이 곡은 전생의 기쁨이 가장 많이 묻어나는 곡이었으니까.

***

연희대 로얄 클럽.

재벌가 자제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클럽에서는 연습이 한창이었다.

곧 콩쿨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피아노를 비롯한 바이올린, 플루트 등 각자의 악기들이 쉴 새 없이 기염을 토했다.

그 모든 것을 두르는 한 남자.

성호였다.

짝짝.

“10분간 휴식. 그리고 개별 피드백하자.”

성호의 말에 학생들 사이에서 탄식과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쉬는 것은 좋았으나, 10분 뒤에는 무자비한 성호의 비평이 쏟아질 테니까.

일부는 비평을 듣느니 쉬는 시간을 포기하겠다는 마인드로 악기를 고쳐 들었다.

쉬는 시간임에도 악기 소리가 즐비하던 찰나.

성호의 귓가에 묘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뭐지?’

순간, 성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절대 하나의 피아노에서 나올 수 없는 소리가 옅게 들려왔던 것.

그는 천천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해 걸어갔다.

몇 명의 학생들을 지나쳤을까.

지현이 바라보는 휴대폰에서 그가 이상하다 여겼던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지현아. 그거 누구 연주야?”

“아, 선배. 이거 이안이 연주예요.”

박이안?

성호의 표정에서 묘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누구와 어떤 연주를 펼치고 있길래 이런 신비로운 소리가 나는 것일까.

화면을 바라보는 성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그랜드 피아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색.

대결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함께 합주를 하듯.

미묘하게 선율을 움직이는 두 사내의 연주는 가히 압도적이라고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한 명은 국내 최정상 피아니스트인 수철.

그리고 다른 한쪽은 그의 아들이자 피아니스트계의 신예 루키, 이안이었다.

지그시 연주를 감상 중이던 성호와 지현 곁으로 다른 학생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뭔데? 누구야? 헐! 박수철 피아니스트 아냐?”

“네. 친구가 보내준 영상인데, 이번에 가요 반주 협업을 했나 봐요.”

“친구? 이 사람 박수철 피아니스트 아들이잖아.”

클래식을 수학하는 학생으로서 박수철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순식간에 쉬는 시간은 이안과 수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로 변했다.

“나도 이번 콩쿨에서 들어봤는데, 확실히 잘하긴 하더라고.”

“이 정도면 한국대에 있는 피아노 전공 중에선 가장 잘하는 거 아냐?”

이안에 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대학으로 번졌다.

최근 급부상한 연희대와 기존의 최고 존엄을 지키려는 한국대 사이 경쟁이 치열했다.

누가 콩쿨에서 우승을 했는지, 또는 누가 이번에 후원을 받게 되었는지.

학생 사이에 있던 일도 학교 간의 경쟁으로 번지곤 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지금은 자퇴해서 집에서 혼자 독학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뭐? 독학 수준이 이 정도라고?”

학생들이 크게 술렁였다.

일부는 말도 안 된다며 지현의 말을 농담투로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일부는 박수철 피아니스트의 아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특출난 재능에 감탄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동안, 한 사람은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내가 말했던 부분을 벌써 고치다니.’

학생들이 이안과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성호는 끝까지 이안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콩쿨 예선을 앞두고 이안에게 오른손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얘기했던 그 아닌가.

그런데 그날.

성호는 이안의 연주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 연주도 개선됐어.’

성호는 주변에 바글바글한 학생들을 스윽 쳐다봤다.

그가 학교에 다니면서 한 번씩 피드백을 날렸던 친구들.

하지만, 그의 피드백을 곧바로 수용하는 학생은 몇 없었다.

성호의 실력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었다.

20년간 살아오면서 몸에 밴 습관을 고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성호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교환 학생으로 갔던 그에게 교수가 그리 말했지 않는가.

“미스터 배가 연주할 때 손의 위치가 다소 고정적이에요. 부드럽게 손가락을 이동시켜야 레가토를 효율적으로 칠 수 있습니다. 손가락에 힘을 조금 더 빼고 연주를 해보세요.”

그는 이 이야기를 들은 지 1년이 흘러서야 손가락에 힘을 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좀처럼 본래 담겨있던 습관이 고쳐지지 않아 매번 애를 먹었다.

미리 손가락이 움직여야 하는데 멈칫하기 일쑤.

그것을 방지하고자 성호는 연주를 이어가는 매 순간마다 자신에게 비판을 했다.

과하게 정형화된 연주에서 벗어나도록.

손가락에 더 많은 자유를 주도록.

매번 힘을 들여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했던 그 아니었던가.

그런데 혜성같이 등장한 이안은 그동안 그의 노력을 비웃듯, 단 한 번의 피드백으로 수준급의 연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손목만 이용하여 다소 단조로웠던 몸짓은 다채로워졌다.

어깨와 팔꿈치를 자연스럽게 움직여 건반을 누르는 손길은 우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진짜 연주 잘한다. 학교에서도 탑급이었겠는데? 성호처럼.”

그의 친구들은 이 사실이 자랑스러운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성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안의 연주에서 단점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

정중한 악마라고 불리며 숱한 학생들에게 비평을 날렸던 그였다.

하지만, 영상 속에서 흘러나오는 연주는 프로 피아니스트인 수철과 비견될 정도.

성호가 할 수 있는 비평은 없었다.

게다가 이어진 지현의 말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아뇨, 이안이 원래 바이올린 전공이었는데 최근에 바꾼 거예요.”

성호는 아연실색했다.

또 잊을 뻔했다.

그가 바이올린 전공이었다는 것을.

***

라운지에서 아래를 바라보는데 간담이 서늘했다.

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작았다.

청악 빌딩 스카이라운지.

청악 빌딩의 최고층이자 거대한 라운지가 본선 진출자들을 반겼다.

파티장을 연상케 하는 라운지의 중심.

상아색 그랜드피아노가 연단에 올라와 있었다.

“성호도 본선에 진출한 모양이구나.”

아버지의 말에 나는 시선을 자연스레 성호에게 돌렸다.

아버지가 인정할 만큼 강자.

그의 독특한 타건법은 아버지도 인정할 정도리라.

“편하게 치는 성호의 타건법이 아마 이 무대에서 유용하게 작용할 거야. 독주의 포인트는 힘 조절이거든.”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장시간 독주에 중요성을 알았으니까.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음색을 낼 수 있도록.

도중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손길이 지쳐서도, 급한 마음에 빨라져서도 안 된다.

듣는 심사위원들은 분명 그 차이를 느낄 테니까.

하지만, 강세를 보인다고 해도 걱정되진 않았다.

도리어 그가 긴 시간 동안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궁금한 정도.

딱 궁금의 영역까지였다.

“지난 콩쿨에서 보인 연주는 표현력이 조금 아쉬웠었는데.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구나.”

이에 대해서도 동의했다.

그의 유려한 손동작과 연주법은 인정할만한 수준이었지만, 묘하게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그 부분을 신경 쓰던 탓에 정형화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

과거 내가 벌였던 실수.

기계처럼 연주하는 모습이 그에게서 엿보였다.

그러니 이번 연주에서는 더욱 자신이 있었다.

“표현력에서는 이안이 네가 더욱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자신감을 가져.”

아버지가 강한 자신감으로 어깨를 주물렀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서 화답하듯 밝은 미소를 선보였다.

눈을 감고 악보를 복기하려는데, 아버지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근데 이안아, 베토벤의 곡을 선정한 이유가 있니?”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유명한 부분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었다.

하지만, 이 곡은 ‘교향곡’.

다수의 악기를 사용하는 만큼, 피아노로 이를 모두 표현하기에는 굉장한 난이도를 요구하는 곡이었다.

그러나 이 곡을 고집하던 이유는 단 하나.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하되, 속으로는 진실을 내뱉었다.

‘제 전생이 손댄 곡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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