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30화 (30/250)

30화

“도리어 간결하게 느껴지는 합창 교향곡이라. 어떻게 그런 표현을 생각해낸 거니?”

식사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밥은 쥐가 파먹은 것처럼 줄어 있었다.

콩쿨장을 나오면서, 차를 타고 오면서, 차고에서 집으로 오는 길까지.

아버지의 질문은 시시때때로 날아왔다.

이젠 그만하시겠지… 하다가도 아버지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날아갔다.

마치 새로운 화석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아버지의 눈에는 신기함과 대견함 등이 섞여 있었으니까.

나는 아버지께 연주할 때 내 마음가짐을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귀가 안 들렸을 베토벤을 상상하면서 연주를 했노라고.

하지만 그 의식이 누군가를 찬양하는 것에 더불어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전생이 보여준 베토벤은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기에 반대일 줄 알았는데 말이지.

하지만 전생이 알려준 이야기는 현대에 내려오는 이야기와 조금 달랐다.

그는 독신으로 살았지만, 인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도리어 청각장애를 앓으면서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더욱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귀족 나리’라는 친구의 장난에 재미없다고 응수했겠지.

아픈 그의 곁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사람은 귀족보다 그를 보필한 하인들이었을 테니까.

이 사실을 모르는 아버지는 고마움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귀족주의 시기에 거장이었던 그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렇다면 환희의 송가로 곡을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전생이 내 대답에 동의의 뜻을 전했다.

모든 인간들의 우애를 전하고 싶었던 베토벤이었으니까.

만약 여타 귀족처럼 자신의 능력을 당연시하고 으스댔다면 그 정도의 거장으로 클 수도 없었을 테지.

당시 사교계에서는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평판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테니까.

그 부분은 전생이 보장하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 속.

심부름을 나갔을 때 마주친 루드비히 가의 하인의 칭찬이 생생했다.

선생님께서 자신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주셨다고.

고작 침대에서 피아노까지 가는 길을 부축해드린 것에 감사함을 표했다고 말이다.

“이번 우승은 네가 되겠다.”

확신에 찬 듯 무거운 말투.

아버지는 내 해석법을 들으시곤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라고 표현하셨다.

거기에 더해 아버지의 입에서 부연 설명이 흘러나왔다.

전생은 알지 못했던 베토벤의 과거가 아버지의 입을 통해 전달됐다.

베토벤이 합창 교향곡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날.

그날 무대에는 두 명의 지휘자가 올랐다.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과 그를 보조한 보조 지휘자.

들리지 않는 선율을 몸으로 느끼고 악기들의 마찰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지휘를 했겠지.

그리고 1시간에 가까운 지휘를 선보이고 난 후.

그는 아무런 함성도 듣지 못해 풀이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성악가가 베토벤의 몸을 돌려준 순간.

베토벤은 그를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마주했다.

그제야 베토벤은 눈물을 쏟았다고.

“귀가 멀어버린 자신의 연주, 지휘를 보고도 박수 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고마웠지 않을까?”

아버지가 의문을 던지며 국을 한입 드셨다.

그의 말에 나보다 전생이 진한 울림을 보냈다.

어쩌면 그 눈물이 자신의 곡을 들으러 와준 사람에 대한 감사일 수도 있겠지.

그와 동시에 베토벤의 곡을 매만져준 전생에 대한 감사함도 섞여 있지 않았을까.

‘그랬을 거야.’

나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강한 확신에 찬 대답이기도 했지만, 전생을 향한 나의 응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약동했다.

“고증을 덧붙인 심미적 해석과 당시 했음직한 고전의 감성까지. 조사를 많이 했겠구나.”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따스했다.

아마 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 연주를 했을지 다 아신다는 듯.

이젠 단순히 신기한 경지를 넘어서 내가 음악을 얼마큼 이해하고 느끼는지 아시는 것 같았다.

그 이해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능성을 아신 듯.

아버지는 그 이상의 말을 잇지 않았다.

다시금 식사에 집중하려던 찰나, 이번에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활기찬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안 씨. 오늘이에요. 음원 발표!

***

키보드에서 몇 번이고 f5를 눌렀다.

화면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몇 차례.

하지만 오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화면은 변함이 없었다.

가온차트 디지털 부문

1위 / 세레나데(with Pianist 박이안) / 유라

2위 / Get it BOMB! / 유라

.

.

히트곡 제조기, 피스의 곡을 제치고 내가 손댄 음원이 1위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모티브로 만든 곡.

음원을 재생하자 그녀의 가련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창문 틈에 비치는 너를 향해 속삭이면 과연 너는 나를 향해 문을 열까

차라리 열리지 않기를 바라 네가 내 뒷모습을 보진 않을까 맘 편히 뒤돌지 못해

슬픈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곡.

처음부터 이 곡이 1위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 1위를 차지한 것은 피스의 곡.

그의 이명을 증명하듯, 유라의 곡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공개와 동시에 3사 방송사 음악 방송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유라의 저력을 보여줬었지.

공중파에서 유라의 곡이 빠르게 퍼져나가는 동안.

유튜브에서는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ㄴ 한국 피아니스트 중에 이런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의 곡은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밤하늘을 연상하게 만들더라고요.

ㄴ 이안의 연주와 유라의 보컬은 마치 18세기 아리아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라이브로 들어보고 싶네요.

빅토리아 크롬웰, 마틴 홈즈.

각각 미국과 영국의 피아니스트계를 밝힐 등불이라는 신예 피아니스트들이었다.

피아니스트 유망주이자 유튜버로 활동하는 그들이 이안의 곡을 업로드하자 세계의 집중이 단박에 모였다.

그들을 시작으로 마치 유행처럼.

오묘한 선율을 자랑하는 유라의 세레나데가 전 세계로 펼쳐졌다.

빅토리아와 마틴의 연주가 공개된 이후, 해외 K-pop 차트는 큰 변화의 물살을 탔다.

게다가 신예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해외 아티스트들도 연락을 보냈다.

“이안 씨! 에비게일 측에서 우리 곡을 연주하고 싶다는 요청을 보내왔어요.”

에비게일 스트링.

무려 1,3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이자 바이올리니스트가 피네 엔터로 연락을 보낸 것이다.

바이올린을 수학하면서 나도 알게 된 바이올리니스트.

정통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외면하는 서양 클래식계에서도 유일하게 인정하는 그녀였다.

전자 바이올린으로 정확한 선율을 뽑아내며 가벼운 춤사위를 뽐내는 모습.

내한 공연에서도 매진 행렬을 선보일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지.

그런 그녀의 연락이었기에, 스케줄로 바쁜 와중일 텐테도 유라가 잔뜩 흥분한 채 연락을 했겠지.

그 덕일까.

피스의 곡마저 제칠 정도로 유명해지는 것은 물론, 내 유튜브 채널도 급성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곡들을 연주할 시간이 없었다.

신곡 공개날 나에게 새로운 미션이 전해졌으니까.

축하드립니다. 박이안 님.

귀하께서는 제 X회 청악 콩쿨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셨습니다.

시상식과 더불어 청악 클래식 갈라쇼에 초청하는 바이오니, 회신 부탁드립니다.

이런 걸 보고 겹경사라고 하던가.

우승의 기쁨도 잠시, 내 눈에 초청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청악 클래식 갈라쇼.

청악 콩쿨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연주회 참여 기회.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등 1년간 진행한 모든 콩쿨의 우승자를 모으는 자리.

경쟁이 아닌 화합과 감상의 장이었다.

청악 그룹이 운영하는 오케스트라까지 대동하여 진행되는 연주회기에 그 스케일이 어떤지 감이 왔다.

스케일 만큼 수많은 클래식 팬들과 후원자들의 눈길을 받을 수 있는 무대.

이미 콩쿨 우승과 유튜브를 통해서 기회가 주는 달콤함을 맛봤기에.

이번 연주회가 어떤 만남, 어떤 기회로 이어질지 기대하는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

연주회 미팅은 합격 연락이 온 지 이틀이 지나서였다.

청악 빌딩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출입을 인증해준 가드가 나를 미팅룸으로 안내했다.

회색 정장을 입은 담당자가 나를 보자 일어서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연주회에서 이안 씨를 담당하게 된 기획팀장, 최선우라고 합니다.”

그는 글자가 정갈하게 쓰인 명함을 내밀었다.

기획팀장이라는 직급과 함께 그의 연락처가 새겨져 있었다.

미팅은 곧바로 갈라쇼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됐다.

선우는 기획팀장이라는 네임에도 수준급의 클래식 정보를 지닌 사람이었다.

나의 연주에 대한 평을 하거나, 피아노의 준비 단계 등을 말하는 모습에서 전문가의 면모가 드러났다.

특히 그는 나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번 연주회는 굉장히 특별할 것 같네요. 이미 이안 씨는 무척 유명하시니까요. 이안 씨가 함께한 아이돌 앨범도 1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던데요?”

그는 내 인기가 홍보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미 홍보물 제작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는 듯.

선우의 입에서 내 유명세를 이용한 홍보문구가 쏟아져나왔다.

피아노계의 신성(新星), 완성된 새싹 피아니스트 등.

회사 측에서 이들 중 어떤 타이틀을 메인에 내걸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신나게 관련된 내용을 쏟아내는 선우의 모습을 보아하니 청악 그룹 측에서 나에게 건 기대가 얼마나 큰지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보는 선우와 달리 나는 눈썹이 움찔거렸다.

유명하다는 말이 이상하리만큼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유명하다라…’

유명세.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내가 처음으로 꼽은 것이었다.

유튜브와 유라의 앨범을 통해 빠르게 내 유명세가 올라간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영상 댓글에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댓글들이 달리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것은 잘 활용하면 좋지만 취하면 독이 된다.

내가 쌓아온 것들이 독이 되지 않도록.

유명세를 활용할 방법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이걸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 차례다.’

분명 연주자로서 유명해진 것도 맞다.

하지만 지금의 유명세는 실력보다 화제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수석님 방송에서 펼친 연주는 ‘기다려 레전드 커버곡’이라는 이름으로.

대한 오케스트라 루키 무대는 ‘대한 오케스트라 루키 무대’라는 이름으로.

심지어 최근에 유라와 함께한 곡도 ‘유라 앨범 피아노곡’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명성들 대부분이 다른 이들과의 협업이나 도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의 연주만으로 증명한 무대를 꼽자면 콩쿨 무대가 전부.

온전히 내 연주로 만들어진 유명세는 의외로 적으리라.

그렇기에 이번 연주회는 중요했다.

그동안 쌓아뒀던 화제성과 유명세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이번 무대는 ‘박이안’이라는 이름만으로 연주를 선보일 수 있기에.

‘박이안의 연주’로 유명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내 명성을 쌓겠어.’

내가 펼친 연주로 인정받고, 내 연주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무대.

스카이 라운지를 가득 채운 인파를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들을 향해 연주하기 위해서 이미 곡도 선정해뒀지 않은가.

벌써부터 몸에 힘이 들어간다.

다른 타이틀을 내려놓고 오롯이 내 이름으로 올라갈 무대를 생각하니 주먹이 불끈거렸다.

내 열망 어린 눈빛을 본 것인지, 선우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성을 되찾은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희가 이안 씨께 추가로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선우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하나 더 꺼내더니 내 쪽으로 밀었다.

봉투를 열어본 내 시선이 곧장 담당자에게로 향했다.

의문으로 가득 찌푸려진 내 미간을 보고도 선우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하다.

이미 결정은 났고, 내가 허락만 한다면 진행된다는 듯.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