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에 선우는 굴하지 않았다.
도리어 신이 난다는 듯.
그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저희는 이안 씨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에서 독주회까지 겸하시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의 태도는 믿기 힘들 정도로 진지했다.
처음에는 이게 가능한 일일까 싶었지만, 선우가 제안서를 내밀자 현실감이 밀려왔다.
청악 악기사 후원 독주회.
본래 콩쿨 우승자를 대상으로 연주회가 열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독주회를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청악 그룹의 모태가 되었던 악기사의 후원.
예상치 못한 거물의 등장에 사뭇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납득하지 못했다.
아무리 콩쿨 2회 우승자라고 할지라도 거대 악기사에서 후원을 할 정도의 스펙은 되지 못한다.
명문대를 나오고 수없이 콩쿨에 우승을 한 사람도 독주회 기회는 흔치 않았다.
게다가 나는 지금 한국대까지 자퇴한 상태이지 않은가.
학교에서 개최하는 독주회도 될 리 만무.
그렇게 생각한다면 클래식으로서 내 프로필은 콩쿨 우승 2회와 큰아버지가 주선한 애피타이저 무대가 전부.
그 정도 커리어로 후원 독주회 제안을 받기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선우는 내 예상을 일축시키려는 듯 곧바로 설명을 이어갔다.
“악기사 임원분들께서 이안 씨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게다가 저희 측 전문가들도 이안 씨가 독주회를 충분히 운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고요.”
그의 입에서 내 프로필이 술술 나왔다.
두 번의 콩쿨 우승으로 실력은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수석님 방송과 유라의 앨범 대박으로 내 채널도 엄청난 인기를 몰아가고 있으니까.
그에 따라 덩달아 성장한 개인 유튜브 채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편집자가 들어오면서 평가도 무척이나 좋아졌으니까.
음질이 좋지 않아 아쉽다는 평들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니까.
편집자 잘 뽑았다며 댓글에서도 칭찬이 올라왔었지.
“유튜브에 업로드하신 곡을 활용하시거나 게스트를 모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선우의 눈이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음악적 소양은 물론이고 이를 통해 발생할 경제적 이익까지 계산하는 것이겠지.
그의 말을 들으니 충분히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유명세, 즉 화제성은 이들에게 좋은 홍보 수단이 되리라.
특히 대중들에게는 그 방법이 잘 먹힐 테지.
유명 영화도 작품성을 논하기 전에 ‘재미있다’라는 소문이 퍼지면 예매율이 현저하기 올라가니까.
아마도 청악 악기사에서는 내 명성을 활용해 일반 대중들을 붙잡을 모양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야 땡큐지.’
고민이 끝난 내 머리도 비상하게 돌아갔다.
콩쿨 다음으로 피아니스트에게 가장 큰 커리어라고 한다면 단연 연주회리라.
리스트에 올라갔다는 것만으로도 실력은 증명되는 것이었으니까.
하물며 독주회는 어떤가.
10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오롯이 혼자 연주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만 가능한 것.
그만큼 피아니스트에게는 큰 도전이자 엄청난 커리어였다.
게다가 청악 악기사에서 주최한 독주회라면 더더욱일 테지.
클래식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청악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후원사 안목은 곧 독주회를 진행하는 연주자의 급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메일로 숱한 연주회, 독주회 제의가 들어왔지만 청악만큼 높은 인지도를 가진 곳은 없었으니.
내가 아는 독주회 중에서는 가장 높은 급에 속하는 독주회이리라.
이런 좋은 제안을 마다할 수 없지.
“한번 자세히 얘기해볼까요?”
빙긋.
미소 짓는 내 모습에 선우가 밝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
팅.
도자기로 된 술잔이 청명한 소리를 낸다.
산해진미를 앞에 둔 두 거장이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고 했는데 이제야 뵙네요.”
“껄껄. 바쁠 수 있지. 오히려 그게 좋은 일 아니겠는가.”
인삼주를 따르며 오가는 대화가 정중하다.
신선로를 중심으로 펼쳐진 수십 가지의 반찬들.
한식을 좋아하는 스승의 취향을 고려한 수철의 선택이었다.
종수 또한 음식과 술이 입에 맞는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둘은 그간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차근히 내려놓았다.
과거 수철이 종수 아래서 수학했었던 이야기.
연습량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을 나갔다가 현철에게 붙잡혀 종수 앞에 내던져졌던 이야기.
그 이후로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라는 마음으로 연주에 임했던 이야기까지.
사뭇 민망할 수도 있었던 기억들이 추억으로 보정되어 펼쳐졌다.
“네 아들을 생각하니 딱 너 어릴 때 같더구나.”
둘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이안에게로 옮겨갔다.
종수와 수철은 이미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이안의 얘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묵직해졌다.
마치 거대한 대서사시의 시작을 장식하려는 작가의 마음처럼.
둘의 의견 교환은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지난번보다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
수철은 휴대폰을 꺼내 영상들을 재생시켰다.
콩쿨에 함께할 때마다 찍었던 영상들이 종수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들의 연주를 녹화한 이유는 실전 피드백을 위함이었다.
자신도 연습에서 잘하다가 실전에서 실수를 하거나 분위기를 놓친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수철은 연습보다 실전 때 연주 영상을 중요시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이안의 연주 영상을 찍으면서도 평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미 이안의 실력은 그의 예상 밖을 넘나들고 있었고, 그 표현조차 수철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수철이 이안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을 정도.
“가히 초월적이라 할 수 있겠구나.”
종수도 영상을 보면서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몇 달 전 심사위원으로 봤던 곡에서도 크게 아쉬운 점은 없었으나 아마추어의 기운은 물씬 풍겼다.
그가 방패와 같다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특한 해석의 영역.
어리지만, 어리기에 더욱 할 수 있는 과감한 해석이었으리라.
종수는 그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을 뿐, 이안이 이미 완성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클래식에 더욱 정진하여 장차 제 아비를 닮아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리길 원했을 뿐.
하지만, 수철이 보여주는 영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안의 연주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욱 완성형에 도달하여 있었고, 손목에 치중되었던 연주 습관은 이제 온몸에서 음악이 흐르는 듯 움직였다.
‘마치 제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럽군.’
영상 속의 이안은 하나같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슬픈 곡을 연주하면서 비통함에 입술을 잘근 씹기도 하고, 숨을 내려놓으며 힘을 빼기도 하면서.
그러나 모든 표정에는 자신감이 그대로 어려 있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전혀 움츠러 들지 않는 대범함.
그동안 숱한 인재들을 봤던 종수였건만, 이런 성장세는 본 적이 없었다.
초천재.
천재보다 위에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종수의 눈매가 더욱 매서워졌다.
매번 차분하게 흩날리던 하얀 머리칼이 어딘가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아비보다 아들이 더욱 높은 돌탑에 올라가 있는 것일지도…”
종수 특유의 시적 표현이 고스란히 수철에게로 향했다.
어린 아들과 비교되는 것임에도 수철의 표정은 밝았다.
이미 아들의 성장세를 응원하고 있던 터.
도리어 자신의 스승에게 아들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물 속에 두기에는 아까운 실력이구나.”
동년배의 의식을 뛰어넘은 곡에 대한 해석과 유려한 연주 실력.
그것만으로도 이미 종수의 머릿속에 이안보다 실력자는 없었다.
이대로 콩쿨을 나간다면 종횡무진하겠지만, 하수들만 있는 곳에서 고수가 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 않은가.
수철을 바라보는 종수의 눈길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바다로 향하는 물꼬는 내가 틔워주마. 오스트리아에 자리가 아마 있을 게야.”
오스트리아를 언급하는 종수의 말에 수철마저 입이 벌어졌다.
그 지역이라면 어떤 곳을 의미하는지 뻔했으니까.
그와 동시에 수철은 종수의 모습이 사뭇 낯설었다.
자신의 스승이 이리 무언가 나서서 했던 적이 있었던가.
항상 재야의 고수처럼 뒤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스승님이었다.
그런 스승님이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수철의 눈썹이 기쁨과 놀라움에 꿈틀거렸다.
***
역시 유라의 곡이 인터넷상에서 큰 화제를 모은 탓이었을까.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를 접속하자마자 메일이 쌓이다 못해 터질 지경.
한글로 되어 있는 제안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가다 영어로 된 제안서도 있었다.
연주회 초청 메일을 시작으로 앨범 협업 제안, 무대를 부탁한다는 제안까지.
콩쿨 우승 직후 날아온 러브콜과는 비교도 안 될 양이었다.
그만큼 나에 대한 유명세가 퍼졌다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나는 간단한 클릭으로 메일창을 꺼버렸다.
내가 지금 집중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니었으니까.
‘50일. 한 달 조금 넘는 기간이네.’
청악 갈라쇼까지 50일.
연습을 하려면 다른 곳에 눈 돌릴 새가 없었다.
특히 이번 연주회가 가지는 의미가 무척이나 크니까.
내 손으로 만들어낸 기회로, 내가 선보이는 무대.
그동안 다른 이의 손을 빌려 만들었던 무대 대신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만든 무대니까.
전생도 독주회까지 달려보자는 마음을 보내듯 세찬 박동을 연달아 보냈다.
마치 전생이 과거 베일 뒤에서 연주했던 때를 떠올리듯.
녀석이 가지고 있던 감성이 심장을 울리며 나도 떨리게 만든다.
지금 느끼는 환희를 곧 느낄 수 있다고 예고해주듯.
어쩐지 나보다 전생의 심장이 더 신난 듯하다.
그러나 녀석 덕에 내 열의도 더욱 불탔다.
‘독주회까지 걸려 있으니 열심히 해야지!’
팔을 쭉.
나는 손목과 손가락을 스트레칭하곤 악보를 뽑아 들었다.
선우에게서 건네받은 악보에는 수많은 오선지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 위에 적힌 굵은 글씨.
일명 ‘숨겨진 비애’라고 불리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그중 피아노라는 이름이 붙은 오선지가 내가 담당할 영역.
때론 혼자서, 때론 함께.
협주로 피어날 선율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울린다.
악보를 잘 보이게 펼쳐두고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전생의 심장도 곡을 알고 있다는 듯 옅게 신호를 보낸다.
건반에 손가락을 올리고 연주를 하려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습하려고?”
아버지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음악실에 스치는 술 냄새.
꽤 많이 드신 듯 진한 향이 퍼졌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그저 올곧기만 하다.
도리어 협주곡 악보를 차근히 살피는 아버지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욱 진지해 보였다.
놀라움과 함께 대견하다고 말하고 싶으신 듯.
아버지는 뭉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려는데, 아버지의 표정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편안하게 감상을 위한 태도가 아닌.
살짝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 표정.
무언가 말하려고 하시는 듯한 아버지를 향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정곡을 끌린 듯 아버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긴장감과 기대감이 어린 표정.
마치 등 뒤에 선물을 숨겨두고 내 반응을 궁금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선물이 무엇인지.
아버지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해보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