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32화 (32/250)

32화

“빈 필하모닉이요?”

아버지는 내 말에 긍정하듯 눈을 깜박이셨다.

오늘 선생님을 만나고 오신다고 들었는데.

설마 선생님께서 그런 제안을 하셨을 줄이야.

비엔나 필.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있었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된 오케스트라.

서양 음악사를 통틀어 콘서트 오케스트라의 모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곳 아닌가.

무려 국가의 지원으로 움직이는 국립 관현악단.

서양 피아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리라.

내가 이미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고 판단하셨는지, 아버지는 빠르게 상황을 나열해주셨다.

“오스트리아에 자리가 있다는구나. 수습 막내에서 시작하지만, 이안이 너 정도면 누구보다 빠르게 올라갈 수 있을거야. 선생님은 1년 안에 네가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 확신하시더라.”

1년.

혹자에겐 긴 시간처럼 보이겠지만,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통으로 본다면 무척이나 빠른 시간이었다.

본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습 기간은 2년이었으니까.

빠르게 실력을 인정받은 선생님도 1년 8개월 만에 정식 단원으로 승격되셨다고 했지.

그 사실에 빗대어 생각해본다면 선생님이 나를 인정하는 수준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신 계산이기에 그렇다 하면 딱 그 정도 걸리겠지.

직접 몸담았던 분이시기에 더욱 정확할 것이다.

오스트리아라는 말에 전생의 심장이 열기를 내뿜는다.

당장이라도 가자고 소리치듯.

진한 울림이 온몸에 퍼져나간다.

분명 지금껏 들어온 제안 중에서 가장 달콤한 것은 사실이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현재까지도 동양인 단원이 손에 꼽을 정도.

그곳에서 인정을 받는다면 세계 어디에서든 인정받을 수 있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제가 갈 곳이 아니에요.”

왜?

아버지의 얼굴에 말하지 못한 의문이 떠올랐다.

단호한 내 대답에 아버지는 적잖게 당황하신 듯 얼어붙었다.

전생 또한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 불규칙적인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나 내 심장은 어느 때보다 정갈하게, 규칙적으로 뛰었다.

아버지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미 머릿속에는 결론이 나 있었으니까.

‘나는 내 연주를 하고 싶어.’

내 다짐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나의 의지이자 전생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

분명 빈필에 들어가면 피아니스트로서 커리어에 좋은 영향을 주리라.

클래식 전공생이라면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인 명실상부 최고의 자리니까.

하지만 동시에 내 연주를 하기 힘든 자리이기도 했다.

관현악단.

사람들이 각국의 빼어난 오케스트라를 선망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웅장한 음색과 개개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교의 아우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과거 귀족들이 선점하려고 애를 쓴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이지.

그러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나에게는 관현악단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말 그대로 ‘관현’.

관악기와 현악기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선율에 피아노가 낄 자리는 많이 없었다.

실제로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교향곡들 중에서 피아노가 없는 곡이 더 많으니까.

즉,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더라도 매번 내 무대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내 무대가 없는 곳에 발걸음을 옮기고 싶지 않아.’

아무리 빨라도 1년이었다.

월 단위가 아니라, 연 단위.

그 1년이라는 시간도 선생님의 예측.

여러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보다 긴 시간을 소모해야 할 테지.

그사이에는 연습만 줄기차게 해야 하리라.

이미 그것이 나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 않은가.

의무감에 사로잡혀 바이올린을 잡았던 그때.

정식 단원이 되기 위해 홀로 연습만 한다면 과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전생이 떠오른 나는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연주를 들려주고 싶은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음악이란 연주를 통해 이야기를 건네고, 듣는 이들이 그것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소통의 산물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홀로 연습을 하라고?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과정이 조금 오래 걸리고 힘들더라도 내 무대를 가지며 성장하고 싶었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면 도리어 빈 필하모닉이 협주 제의를 하겠지.

1층부터 올라가는 것보다 헬기를 타고 옥상에 착륙하는 게 더 멋질 테니까.

그 생각을 나는 아버지께 당차게 얘기했다.

“지금 저에게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거든요.”

***

음악 영화계의 거장.

강예진 감독님의 작업실은 영화감독의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벽지에 붙은 방음판과 나열된 악기들.

도리어 음향 감독의 작업실이라고 해야 신빙성이 있을 것 같았다.

커다란 고화질 모니터와 작업 스테이션이 영화감독의 방이라고 항명하듯 놓여있었다.

“이안 씨. 촬영 편집본이 나와서 불렀어요.”

감독님은 긴 설명을 하는 대신 곧바로 영상을 틀었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들어있다는 듯, 그녀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영화관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스크린에 피아노가 담긴다.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겨우 피아노에 앉는 시혁.

케인을 접는 모습에 사람들이 술렁이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귀를 클로즈업하여 보이지 않는 시혁의 관점을 제대로 보여주는 영상미에 나는 감탄을 아낄 수 없었다.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카메라 워크.

그녀가 왜 음악 영화로 세계를 흔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음악은 말이야. 이야기야.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

시혁의 스승이 말했던 대로.

시혁의 독백이 조그맣게 흘러나온다.

순간,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만 울릴 뿐, 객석의 소리는 점차 옅어진다.

스포트라이트만 펼쳐지는 무대 속.

이내 관객들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시혁만 자리에 남았다.

‘이때부터 시작.’

뒷모습부터 시작하는 연주.

나는 직감적으로 그 장면 속 시혁이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간의 CG를 입혔는지 도저히 나라고는 예상할 수 없을 지경.

연주를 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상황들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피아노와 내가 앉은 모습 너머로 새로운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며 아이가 나타난다.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아역 배우가 피아노에 손을 댐과 동시에 놀라 자빠진다.

한참 망설이는가 싶더니 다시금 피아노를 더듬거리며 본능적으로 건반을 찾아낸다.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아이의 미소가 클로즈업되다가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다시금 카메라가 나를 비췄다.

‘아이를 시작으로 일대기가 펼쳐졌지.’

대본에서 숙지했던 내용들이 고스란히 영상으로 피어난다.

스승처럼 등장하는 성훈과, 이에 맞춰 등장하는 또 다른 아역 배우.

스승의 죽음에 오열하는 시혁과 다시금 일어나는 모습까지.

피아노를 중심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카메라와 줌을 당기고 풀어가면서 만들어낸 화면.

성훈이 자리에 앉아 연주를 진행하는 모습으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까지 어느 한 점 편집된 곳이 없었다.

소리와 영상미, 배우들의 연기까지.

삼위일체를 이룬 감독님의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고작 5분 정도의 영상이 이리 아름다운데, 전체 영화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영화가 개봉되면 당장 예매해야겠다는 생각이 감돌았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나와 달리 도리어 감독님의 표정은 어두웠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듯한 표정.

“감독님. 영상에 문제라도 있나요?”

어쩌면 음악이나 영상에서 내가 찾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셨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불려온 이유가 어쩌면 그것 때문이겠지.

하지만, 감독님은 영상에는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도리어 내 연주가 완벽했다고 다시금 칭찬할 뿐.

그녀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사실, 이것 때문이에요.”

감독님은 영화의 한 부분을 재생시켰다.

시혁의 연주를 들은 스승이 시혁의 가능성을 평가하는 부분.

성훈의 손가락이 자연스레 건반을 훑었다.

뮤지컬을 배우면서 함께 배운 것인지 그의 연주는 꽤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영상을 들으면서 나는 감독님의 고민을 단박에 알 것 같았다.

“선율의 차이 때문이군요. 마니아들은 물론 일반 관객들도 이질감을 느낄 것 같아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감독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연주를 했으니 연주에서 들리는 느낌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

연주에는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깃든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컨셉상 시혁이라는 캐릭터가 피아노를 배우기 전이라 해도 곡에서 흘러나오는 뉘앙스가 너무나도 달랐다.

아주 사소한 차이였지만, 내가 느꼈다면 감독님도 느끼셨겠지.

그리고 우리가 느꼈다면 관객들 중 상당수는 단박에 알아채리라.

게다가 감독님 영화의 고정 팬층은 청음력이 더욱 높을 것이다.

마니아들이 지금 이 차이를 듣는다면 누구보다 크게 이질감을 느낄 테지.

대역을 쓴 여타 음악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 감독님이 만든 영화는 여타 ‘음악 영화’와 비견할 수 없었다.

이제야 감독님이 나를 부른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후시 녹음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완벽을 중요시하고 대역을 쓰지 않는 감독님의 신조에는 맞지 않는 일이겠지.

하지만 영화에 내 연주를 입히는 작업이 더욱 자연스럽다고 느끼신 듯했다.

나 또한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성훈의 연주를 며칠 정도 들으면 그 속도를 알 수 있으리라.

이미 찍어둔 영상 속도에 맞춰 연주를 하되, 그 깊이감을 내가 채우면 되리라.

그러나 지금은 어려운 일이었다.

“제가 연주회를 앞두고 있어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 기억 속에 전체 영화에서 등장하는 피아노 연주는 총 6곡.

한두 곡 정도였다면 중간에 짬을 낼 수 있겠지만, 여섯 개나 되는 곡을 모두 녹음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단순히 악보를 보고 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내가 허락하지 않을뿐더러 감독님도 원하지 않으시겠지.

감독님이 원하는 것은 이미 내가 연주했던 곡처럼 섬세하고 깊이감이 느껴지는 연주일 테니까.

그런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내 대답은 평소보다 신중했다.

게다가 이번 연주회는 오스트리아행을 포기한 만큼 중요한 무대.

혼자 연주하는 무대는 물론,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까지 잡혀있었다.

독주 연습은 밤을 새워서라도 하면 되겠지만, 청악 오케스트라와 협연 연습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연습에 걸리는 시간만 한 달 정도로 계산해둔 상태였다.

잠시 생각을 갖는 듯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심각해진 표정 사이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영화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선 전체적인 후시 녹음이 필수였다.

분위기를 비롯해 내 연주가 더욱 완벽하게 들리기 위해선 앞선 연주들의 빌드업이 중요하리라.

게다가 나도 내 연주가 더 완벽해지기를 바라듯, 감독님도 자신의 영화가 완벽해지길 바라시겠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나와 생각이 같은 듯, 감독님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폭탄선언을 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듯 그녀의 표정은 굳건했다.

설마.

스태프들은 벌써 감독님이 어떤 말을 할지 아는 듯 입을 벌렸다.

빗발치는 독촉과 항의 전화를 떠올리는 듯.

그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개봉을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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