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허허.
매번 인자한 미소를 내보이는 종수였지만, 그의 인정은 누구보다 박했다.
이미 국내 최고 피아니스트인 제자에게도 수시로 조언을 던지는 그였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그 제자가 데려온 아들은 신비를 넘어 초월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렇기에 더욱 관심이 갔을 테지.
일찌감치 서양의 음악 교육법을 익힌 그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땅은 우물 그 자체였다.
그런 실력자를 이곳에서 썩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를 보고도 모른 체한다면 그것은 선배 피아니스트로서 해서는 안 되는 죄악이리라.
그래서 염치를 불구하고 오래된 인연의 도움을 받으려 했건만…
‘거절을 할 줄은 몰랐군.’
이안의 거절은 예상 밖이었다.
콩쿨과 무대를 종횡무진하려는 모습에 당연히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거늘.
자신에게 설명을 늘어놓던 제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기억났다.
아쉬운 일이지만, 당사자의 의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종수는 그저 흐뭇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띠링.
컴퓨터가 화상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알림음을 내뱉었다.
본래라면 둘이서 그를 맞이하려 했건만, 종수는 홀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바뀌자 간드러진 금발의 백인 남성이 등장했다.
흐릿한 웹캠에서도 날렵한 콧날과 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를 자랑하는 남자.
오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잘생긴 외모는 그를 훨씬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종수는 그 모습에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나, 레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선생님.”
유려한 영어 발음이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레오 앤더슨.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종수 또한 수석 피아니스트와 명예 단원을 겸임하며 그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품이 있는 면모.
가련한 것 같으면서도 지휘봉을 잡으면 순식간에 튀어나오는 강인함.
종수의 안목에 들어온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선생님께서 먼저 단원 추천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선생님께서 주시하고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실력은 보증이 된 것일 테죠.”
“허허.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안타깝게 함께 자리하지 못했네.”
종수는 에둘러 이안이 자신의 제의를 거절했음을 밝혔다.
종수 특유의 언변을 알아챈 레오가 사뭇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빈 필하모닉.
18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오케스트라.
클래식을 수학하는 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 아닌가.
단원이 되고 싶은 자들을 줄을 세우면 만리장성만큼 긴 줄을 이룰 테지.
바닥에서 시작하더라도 빈필에서 수학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클래식 전공자들에게는 큰 커리어가 되리라.
그런 자리를 거절했다는 말에 레오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얼핏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감을 예술가의 덕목으로 아는 리틀 보이군요.”
대단한 예술가들은 자신의 고집을 절대 꺾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해외 순방을 갈 때 그랜드 피아노를 옮겨간다지 않는가.
하지만 레오가 생각하기에 이안은 그런 거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리틀 보이’.
한국어로 직역하면 애송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레오는 이안을 그저 그런 애송이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레오의 생각과 달리 종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 덕목을 누구보다 잘 활용하고 있는 친구이기도 하지.”
이번에는 종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듯.
레오가 의문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종수는 그에 대해 말 대신 파일 하나를 보냈다.
수철에게서 받은 영상 파일.
이안이 청악 콩쿨 본선에서 연주를 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레오가 파일을 켠 듯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곧장 노래를 온몸으로 느끼듯 눈을 감고, 고개를 움직였다.
손가락으로 박자에 맞는 지휘를 그리는 그의 손이 사뭇 진지했다.
레오 또한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의식적으로 캠을 바라보았다.
마치 종수와 눈을 마주치려는 듯.
레오의 청안(靑眼)을 보는 순간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왜 추천해주셨는지 알겠군요.’
흥미롭다는 표정.
도입부의 선율을 듣는 레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좋은 인재를 발견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곡이 펼쳐질수록 레오의 표정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흥미로움에서 신비함으로.
종수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레오는 영상에 집중했다.
기다리던 종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기대 이상인가?”
“해석이 무척이나 독특한 친구군요. 저희 임시 단원들의 수준보다 조금 위인 것은 맞지만, 초월적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
레오는 짧은 평들을 늘어놓았다.
몸에서 박자를 받아들이는 면모가 느껴지며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인다고.
아마 정식 단원 투표를 하면 반절이 투표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듯.
레오의 표정은 강직했다.
하지만 종수의 한 마디에 레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저 친구가 피아노를 잡은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면 믿겠나?”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단단한 종수의 표정에 레오는 웃음을 잃었다.
다시금 영상을 들여다보는 듯 레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게다가 이어진 종수의 말은 레오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여태껏 바이올린을 수학하다 최근에 피아노를 잡았다고.
그 말에 레오는 흥분하여 말을 쏟아냈다.
이안의 성장이 기대가 된다며 꼭 한번 연주를 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종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수준급의 연주를 선보인 이안.
그가 1년이 지나면, 10년이 지나면 어떤 선율을 선보일지.
문득, 종수는 수철에게서 들은 거절 이유를 툭 내뱉었다.
“지금 연주회 준비를 하고 있다 들었네.”
***
스태프들이 몇 번이고 다시 고민해달라고 청했지만, 감독님의 고집은 단단했다.
차마 전화를 못 돌리겠다는 스태프의 말에 직접 수화기를 들었을 정도이니.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반쪽짜리 영화.’
곡을 연습하는 동안.
나는 꽤 많이 시혁이라는 인물에 동화되어 있었다.
전생의 기억도 있었지만, 어려움이 있어도 굴하지 않는 인물의 이야기.
나는 인물의 대사 하나가 유독 기억에 남았다.
“보이진 않지만, 들을 수 있거든요.”
성공리에 연주를 마치고 난 자리에서 한 대사였던가.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직시하면서도 피아노를 치는 데 문제가 없다는 듯 툭 내뱉는 말.
대본상에서는 단순한 문장에 불과했지만, 전체 스토리를 이해하면 그 문장의 무게가 달라진다.
호기심에 다가간 음악이었지만, 한순간에 음악에 매료된 인물.
하지만, 사람들은 안 될 거라며 선을 그었다.
끝없이 노력하면서 연습을 이어가고 될 것이라고 하던 찰나.
시혁을 끝까지 믿어주던 스승의 죽음.
사실을 들었음에도 시혁은 부정했다.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냥 하는 소리라고, 자신이 음악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런 그에게 스승의 죽음은 단순히 사람이 죽는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믿음이 사라지는 대목.
희망마저 꺼져버린 상태에서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내뱉는 말이기에 무게감이 더욱 실린 것일 테지.
내가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녀석의 감정을 느끼듯.
대본 속 주인공의 감정이 뇌리를 스치자 악상이 떠오른다.
처절함과 간절함 사이.
줄 위에 선 위태로운 감정이 이번 연주에서 나타내야 할 부분이었다.
“연주회가 끝나면 곧장 녹음하죠.”
당찬 대답에 감독님이 흡족한 미소를 보냈지.
더 이상 대역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녹음을 하러 갈 때는 금의환향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청악 연주회를 준비하는 손길이 더욱 바빠졌다.
곡이 제공되었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하나는 당연하게도 실수 없는 완벽한 연주를 보여줘야 할 테고.
다른 하나는…
‘오케스트라와 잘 어울릴 수 있는 해석을 찾아야겠지.’
숨겨진 비애라 불리는 <모차르트 협주곡 20번>.
전생의 기억이 벌써부터 샘솟았다.
그와 더불어 내가 생각해둔 해석들이 빠르게 머릿속에 차오른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관현악단과 함께 이야기를 전달하는 무대.
그렇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되, 나 혼자만 튀어선 안 된다.
그 조화가 깨지는 순간 그것은 협주의 범위에서 벗어날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지 내 연주가 전부라고 으스대는 것이 아니니까.
D단조.
암울한 선율.
비애(悲哀)라는 이명이 절로 떠오를 정도의 낮은 음색.
뇌리 속에 그려진 오선지에 서글픈 향연들이 담긴다.
눈물 같이 맺힌 음표들을 표현하기 위해.
손가락이 내 의지에 따라 가지런히 움직인다.
***
갈라쇼.
각 분야 콩쿨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무대.
현악기 우승자는 한데 모여 4중주를 이루기도 하고, 관악기 우승자는 독주를 진행하기도 했다.
피아노 우승자인 나는 갈라쇼의 대미를 장식하는 중책을 맡았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주.
거대한 관현악단과 피아노의 하모니가 갈라쇼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내게 미리 악보가 제공되었듯, 관현악단도 연습이 필요할 테지.
미팅을 끝내고 3주가량이 흐르고 나서야 기획팀장, 선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관현악단 측에서 협연할 준비가 되었다는 연락을 보내왔다고.
본격적인 협연 연습.
청악 빌딩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대한이 땅을 지배하는 호랑이라면, 청악은 하늘을 호령하는 독수리다.’
청악 오케스트라.
청악 그룹의 막대한 후원을 받으면서 성장한 관현악단.
악기사가 주축이 되었던 것만큼 콩쿨과 신예 예술가에 대한 발굴이 활발하게 이뤄지곤 했다.
갈라쇼를 하는 이유도 그것에 있을 테지.
이미 숱한 연주자들이 청악 갈라쇼를 통해 발돋움을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내가 그 차례가 되었을 뿐.
“이안 씨.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이리로.”
최 팀장은 미리 마중을 나와 연습실로 안내했다.
가는 길에 그는 현재 홍보 진행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벌써부터 선예매를 신청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저도 악기를 잡아본 사람이지만, 이 정도 인기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최선우도 한때 청악 오케스트라의 일원이었다고 했다.
어쩐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에게서 깊이감이 느껴지더니.
“하지만 저는 도망쳤습니다. 더 이상 악기를 잡는 게 무서웠거든요.”
선우가 씁쓸한 미소를 내보였다.
육중한 첼로를 이고 연주를 선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고.
자신의 연주에 한계를 느껴 오케스트라를 그만두었지만, 음악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기획팀장을 맡았다고 했다.
나 또한 그와 같은 경험을 했기에.
나도 모르게 선우 어깨에 손이 올라갔다.
아버지가 내게 하셨던 것처럼, 손에 묘한 힘이 들어갔다.
선우는 내 마음을 안 것인지 잔잔한 미소를 보이곤 지휘자에게 다가갔다.
“권 선생님, 이번에 갈라쇼에서 함께할 이안 씨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 해서 큰아버지를 떠올렸었는데.
손을 내민 여성은 큰아버지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젊었다.
말끔하게 땋은 머리에 정갈한 일자 눈썹.
은은한 미소를 풍기고 있었지만,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반가워요. 권미성이라고 해요.”
권미성.
큰아버지의 모습을 염라대왕이라 한다면, 미성의 모습은 정갈한 선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명성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기 연주회 때마다 기존의 무게감을 보여주면서 매번 새로운 색채를 만들어 낸다고.
그 중심에 미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익숙했다.
내가 악수에 화답하자 그녀는 자연스레 나를 연단 위로 안내했다.
단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나는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함께 무대에 오르게 된 박이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해봐요~”
“그 친구 맞지? 주 수석 유튜브 출연자.”
“이번 연주회 핫하겠는데?”
반갑게 환영 인사를 하는 사람들 사이.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일부는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유튜브 영상이나 대한 오케스트라에서 선보인 연주를 본 사람들이겠지.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얼핏 봐도 나를 아는 눈치인 사람이 반 이상.
예상보다 많은 숫자였다.
“우선 이안 씨 연주부터 볼까요?”
그녀의 말투에는 상냥함이 가득했지만, 그 아래에 짙은 카리스마가 깔려있었다.
미성의 한 마디에 단원들이 일제히 잡담을 멈추고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치 지금이 실전인 것처럼.
연주를 듣고 피드백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그들의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그런 이들에게 화답하기 위해, 나는 건반에 손을 얹었다.
나는 미리 해둔 해석들 중 하나를 꺼내어 연주를 펼쳤다.
도입부.
관현악단의 선율에 이어 처음으로 연주를 시작하는 곳.
미성의 지휘봉을 살피며 1악장을 잔잔하게 펼쳤다.
처음 선보이는 연주는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실수 없이 진행된 선율에 단원들도 신비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성의 지휘봉이 절도있게 멈추자 단원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왔다.
하지만, 단원들과 달리 미성은 무언가 아쉽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골똘히 생각을 하던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방금 그 부분. 방식을 조금 바꾸는 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