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34화 (34/250)

34화

미성의 피드백은 정갈하면서도 확실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에 큰 그림이 있는 듯.

미성의 설명은 한 편의 동화를 듣는 것처럼 흥미로우면서도 철저하게 계산된 숙련도가 엿보였다.

그녀는 이 곡이 인간의 감정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단조에서 느껴지는 암울함은 비애라는 이명과 어울릴 정도라고.

나 또한 그것에 초점을 맞춰 곡을 해석했었지.

“이안 씨의 연주는 본래 곡에 깃든 감성을 충분히 표현한 것 같아요. 하지만 뭐랄까.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뜻인 것처럼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으면 좋겠어요.”

미성의 피드백은 굉장히 구체적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추상적인 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곧은 평이었다.

내 머릿속 준비된 여러 가지 해석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자리 잡은 것들이니까.

‘이중성’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름과 동시에 뇌리에 박힌 악보가 순식간에 변화한다.

인간의 감정을 이중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우울한 현악 선율과 달리 피아노는 밝게 하길 원하시는 거죠?”

끄덕끄덕.

내 말에 미성은 격한 동의를 보내왔다.

내가 생각해둔 여러 가지 해석 중의 하나였다.

모차르트가 생전 쓴 협주곡은 모두 27개.

그중 20번은 그중 단 두 개에 불과한 단조로 이뤄진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에서는 기존의 품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밝은 사람은 슬퍼할 때도 그 슬픔을 내보이지 않지.’

나도 고민이 있을 때 애써 숨기지 않았던가.

모차르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D단조의 선율에서 이어지는 1악장.

강렬하게 내딛는 현악기와 관악기. 그것을 통제하는 팀파니의 웅장함.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상징하듯 낮으면서도 울림 있게.

그 사이에서 치고 들어오는 피아노의 선율은 같은 단조임에도 비교적 밝다.

그래서 기존에 있던 관현악이 안개에 쌓인 것처럼 약해지는 것이겠지.

마치 밝은 피아노 음색으로 암울한 느낌을 잠재우려는 듯.

그것이 ‘숨겨진’ 비애이리라.

“그럼 2악장은 반대로 로망스임에도 진중하게 하면 어떨까요?”

나는 함께 본래 했던 해석을 덧붙여 전달했다.

미성은 악보를 슬쩍 바라보더니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해석이네요. 1악장과 반대되면서도 도리어 그 간극이 좁아져서 더욱 매끄럽게 느껴지겠어요.”

미성은 단원들을 향해 내 설명을 덧붙인 컨셉을 설명했다.

로망스.

우아한 선율로 행복감이나 활기참을 나타낼 때 쓰는 형식.

웅장하면서도 우울한 1악장과 대비되는 선율에서 관현악은 더욱 밝은 기운을 펼친다.

그에 따라 피아노도 동일하게 명랑하게 주행한다.

하지만, 단순히 명랑한 느낌이 아니라 진중함을 섞는다면?

소위 말하는 ‘괜찮은 척’.

감정을 감추듯 숨겨둔 웅장한 선율이 3악장에서는 다시금 어두운 악상과 함께 돌아온다.

그렇다면 청중은 다시 돌아온 선율에 반가움을 느끼겠지.

단원들도 미성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악보에 메모를 더했다.

“그럼 2악장으로 들어가 보죠.”

컨셉을 숙지하던 단원들이 빠르게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갔다.

모두 아까와 같은 결연한 자세를 보이자 미성이 나를 쳐다봤다.

어떤 해석이라도 가능하리라.

자신감 어린 눈빛을 맞이한 그녀가 미소를 보이며 지휘봉을 흔들기 시작한다.

Romance.

가면으로 이뤄진 행복감에 대한 이야기가 수많은 악기들로 재탄생한다.

***

미성의 손과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바삐 움직인다.

밝은 피아노의 걸음으로 시작하는 2악장.

마치 첫사랑을 떠올리는 소녀의 마음처럼 간지럽게.

은은하게 펼쳐지는 선율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와 동시에 관현악이 펼쳐지기 직전, 급속도로 낮아진 선율과 함께 이안의 연주가 끝나고 관현악이 피아노에 화답하듯 청량한 음색을 띤다.

청량한 물속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듯.

이안의 피아노 선율이 똑똑 떨어진다.

‘선우 씨가 왜 그렇게 기대를 했는지 알겠군.’

연습을 하기도 전부터 이안에 대한 칭찬을 들었던 그녀였다.

최 팀장이 몇 번씩이나 찾아와 이안에 대한 브리핑을 늘어놓고 갔으니까.

하지만 미성은 최 팀장의 말 대신 자신의 눈을 믿기로 했다.

선우의 청음 실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악단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에서 이미 실력은 증명된 것.

하지만 그녀는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었다.

‘제대로 연습해왔군.’

이안의 연주에 대한 미성의 첫 평이었다.

그는 연주를 할 때마다 중요한 부분이 어딘지 안다는 듯.

손가락뿐만 아니라 팔, 더 나아가 몸통을 활용하여 연주를 이어갔다.

넓은 옥타브를 넘나들며 할 때는 여유롭게 몸을 펼치고, 세밀한 트레몰로에서는 시계공이 태엽을 보듯 집중하여 손가락을 움직인다.

단순히 악보에 따라 연주를 선보이는 것을 넘어선 수준.

해석이 가득 담긴 연주에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연주 실력과 해석력은 합격.

하지만 관건은…

‘이 속에서도 자신의 페이스를 맞춰갈 수 있을까.’

그동안 여러 루키들과 무대를 함께한 미성이었다.

그렇기에 처음 협주곡을 연주하는 초보 연주자들의 가장 큰 계륵을 알고 있었다.

바로 협주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

혼자 연주를 할 때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면 끝이다.

하지만, 협주는 본인의 것을 모두 보여주되, 그것이 단체에 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미성은 무엇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잘 잡아내는 사람이었다.

실눈으로 웃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 담긴 눈빛은 누구보다 매서웠다.

현과 활이 마찰하는 순간의 차이, 현악기 연주자들의 숨소리까지.

곡에 온전한 해석을 담기 위해서 사소한 차이를 신경 써야 했다.

그것을 모두 잡아내고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

미성이 젊은 나이임에도 한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는 마에스트로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이안의 연주는 더욱 기대 이상이었다.

게다가 그의 적응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

‘피드백을 이렇게 빨리 적용시킨다고?’

대개 처음 협주 연습을 하면 루키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피드백이 오케스트라와 관련된 것이 많다 보니 평소 피드백과 다르기 때문.

다른 악기들의 선율이 진해지고 옅어짐에 따라 피아노 선율도 자연스레 섞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때문에 피아니스트는 연주 방식을 다시 설계해야 하고, 그것을 다시금 체득해야 한다.

연습에만 수십 시간이 사용되는 이유는 그 때문.

그러나 이안의 속도는 이미 오랫동안 협연을 해왔던 파트너 같았다.

연주에 집중하면서도 미성과 시선을 맞추며 강세를 조절하고, 관현악단을 흘겨보며 앞으로 있을 연주를 예측한다.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알아맞히듯 말을 하는 것은 물론, 그에 따라 2악장의 방향까지 제시하는 것까지.

만난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이안은 그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청악 오케스트라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번 연주회가 잘되면 독주회까지 진행한다고 했던가?’

미성은 선우가 말했던 제안을 떠올렸다.

처음 그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콩쿨에서 연주를 하는 것과 2시간이 넘는 독주회를 온전히 연주로 채우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안의 연주를 듣고는 그 생각이 바뀌었다.

도리어 2시간이 어떻게 채워질지.

궁금증에 미성의 가슴이 오랜만에 빠르게 뛰었다.

***

‘독수리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알겠네.’

깔끔하게 연주를 마무리하는 청악 오케스트라의 모습에 경외감이 들었다.

분명 2악장에 대한 컨셉을 내가 말한 이후 추가된 것.

나야 미리 생각해둔 해석을 곧바로 적용시키는 것이겠지만, 단원들은 아닐 테지.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처럼 여러 해석을 준비해뒀거나, 다른 하나는 그 순간에 적응을 끝낸 것이거나.

어떤 쪽이든 단원들의 능력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그것을 인솔하는 마에스트로, 미성도 놀라웠다.

‘악보의 해석이 섬세하고 독특해.’

내 생각에 동의하는 듯 전생의 심장이 약동했다.

나처럼 강세와 선율의 길이조절로 감동을 이끌어가게끔 설정된 악보들.

필요한 부분을 파란색 글자로 표시한 것에서 미성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게다가 미성이 손댄 것은 단순한 강세의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지휘자님. 중간중간에 튈 정도로 강세를 넣은 건 의도된 거죠?”

자신의 의중을 들켰다는 듯.

미성은 놀라움에 숨을 헙하고 들이켰다.

연주를 이어가면서도 오묘한 느낌을 버리지 못했다.

오케스트라에서 들리는 선율은 악보에 깃든 음표들과 같으면서도 미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곡이 흘러가는 군데군데 예상하지 못한 듯 뇌리에 박힌 악보들이 꿈틀댔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그러한 선율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연상케 하듯.

암울한 음색에서 밝은 선율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대단하네요. 우리 단원들도 내가 얘기하기 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이 많았는데.”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나 또한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을 부분이었다.

푸른 글씨로 써둔 악센트와 페르마타.

스케르찬도와 잔망스러운 행복감을 나타내는가 하면, 스포르찬도로 우울감을 강조하기까지.

악상 용어로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악보에 입체감을 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해석과 강세의 차이일 뿐.

그것이 원본과 완전히 다른 분파로 나아가기엔 턱없이 작은 차이였다.

그러나 단 한 장소.

TUTTI.

모두가 함께 연주를 이어나가는 부분에서 미성의 해석이 빛을 발했다.

“사람의 감정은 완벽하지 않잖아요. 슬픈 사랑, 기쁨의 눈물처럼 이중적이고 모순적이죠.”

아무리 사람이 감정을 숨긴다 하더라도 완벽할 수는 없는 법.

그런 사람의 심리를 음악에 녹여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선택한 것은 의도적으로 튀는 음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기시감을 느끼게끔 만드는 것.

자칫 잘못하면 음악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도전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직접 연주를 이어가던 나도 불쾌감을 느끼진 못했다.

도리어 가요에 붙은 가사를 떠올리게끔 만드는 면모에 감탄했을 뿐.

클래식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그 부분을 통해 곡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 강세가 다소 약하다는 것.

아마 기존의 곡을 통째로 편곡하지 않으면서 색채를 더하고 싶은 탓이었겠지.

그러나 웅장한 선율을 이기고 나아가기엔 특색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약했다.

“의도된 것이라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드리고 싶어서요."

내 말에 미성은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나는 곧장 펜을 들어 악보에 표시를 이어갔다.

거창한 수정은 없었다. 단지 몇 가지 음을 추가로 튀게 만들 뿐.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감명받아 뇌리 속에 깃든 악보가 절로 바뀐 부분이었다.

수정을 덧붙인 악보를 건네자 미성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곧바로 그녀는 각 파트장에게 수정된 부분을 제시하고 지휘봉을 들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지휘봉에 따라 달라진 선율들이 연습실에 흘렀다.

단원들도 변화를 느꼈다는 듯 손에 들어가는 힘줄이 더욱 솟았다.

이 모든 것을 듣고 있던 미성은 감상에 젖은 듯 미소를 선보였다.

짧은 확인을 끝내자 그녀는 나를 향해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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