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35화 (35/250)

35화

팀장 직급을 단 지 어언 7년 차.

청악 오케스트라에 몸담았던 것까지 계산한다면 10년 이상을 청악에서 보냈으리라.

지휘자가 바뀌는 것은 물론, 연주자의 은퇴로 새로운 단원을 모집하는 것까지.

청악오케스트라의 모든 실무를 함께한 그였기에.

최 팀장은 누구보다 청악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였건만, 지금 펼쳐지는 광경은 그의 음악 인생을 통틀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지휘자가 연주자에게 피드백을 건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콩쿨에서 우승한 사람들 대부분이 협주 경력이 전무한 루키들이었으니까.

베테랑 지휘자인 미성의 손길을 거치면 초보적인 연주가 말랑하게 변했다.

오랜 시간 갈라쇼를 진행했던 그녀였기에.

루키들을 다루고 오케스트라에 잘 스며들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매번 피드백을 하는 입장이었던 미성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리어 미성이 피드백을 받고 있었다.

이어서 펼쳐지는 선율에 선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존에 권 선생님이 만들던 사조가 아니야!’

같으면서도 다른.

미성이 의도했던 중의적인 선율이 연습실을 가득 채운다.

바이올린 부의 향연과 그에 뒤따라 오듯 펼쳐지는 관악기의 울림.

최 팀장이 기존에 몇 번이나 들었던 협주였다.

처음에 그는 무엇이 바뀐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언가 오래 바꾸는 눈치였는데, 모두 자신의 착각이었던가.

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날수록 그는 곡에서 느껴지는 묘한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오래 악기를 놓은 탓일까.

그는 변화된 선율에 대해 선뜻 변화된 점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향연에 귀가 점차 적응하자 선우는 기묘한 흐름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었다.

‘클래식인데… 가사가 있는 것 같아.’

문득 선우는 평소 연습에서도 미묘한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을 참다가 터진 것처럼.

미묘하게 튀어나오는 화음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지.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튀어나오는 음색이 선명해질뿐더러 더욱 풍성해졌으니까.

‘마치 합창단이 곁에 있는 것 같아.’

선우는 이안이 노린 부분을 정확히 받아들였다.

이안이 영화 대역으로 했던 연주에서 착안한 기법.

의도적으로 내세운 불협화음들이 또 다른 화음을 이루게 만드는 일.

피아노 하나로 만들었던 것을 오케스트라로 만들어내는 것은 의외로 더욱 쉬운 일이었다.

파트가 나눠진 바이올린에서 그 화음을 만들어내면 그만이었으니까.

그 덕에 따로 떨어진 별빛이 별자리를 이루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튀게 만든 선율이 마치 가요의 가사처럼 흐르고 있었다.

설마 이 모든 것이 이안의 설계였을까.

최 팀장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청악 오케스트라 창단 이래에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연주에 연주자의 해석이 들어가듯,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해석이 깃든 음악을 연주한다.

그렇기에 같은 곡을 연주해도 오케스트라마다 다른 색채가 드러난다.

수많은 악기들을 모두 아우르는 마에스트로의 영역.

그 거대한 영역을 이제 막 새로 발돋움한 신인이 눈치채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안은 신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미성의 특이점을 알아챈 듯 설명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미 미성이 그려놓은 그림이 어떤 것인지 모두 파악한 듯.

미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안에게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독주회를 준비하면서 이안에 대한 수많은 미담들을 알아봤던 그였다.

단 몇 달 만에 두 개의 콩쿨에서 우승한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대중가요와 클래식을 오가는 얼리어답터.

그러나 아무리 그럴지라도 세계를 무대로 움직이는 청악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보다는 훨씬 아래에 있으리라.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최 팀장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예상 밖이었다.

‘지휘자님이 저렇게 받아들이시는 것도 신기하네…’

선우가 아는 미성은 친절하지만, 심지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실눈이지만, 그 속에 세계를 담았다는 듯.

행여 단원이 곡 해석에 의문을 제기해도 그것을 단박에 설득시킬 정도로 섬세한 준비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곡도 완벽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을 터.

하지만,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미성이 이안의 간언에 악보를 손수 고치고 있었다.

저리 갑작스레 악보를 변경하면 단원들도 혼란스러울 텐데.

그 또한 단원으로 활동해봤기에 중도에 악보가 바뀌는 것은 굉장히 큰 사안이었다.

한 부분이 바뀌면 그것에 따라 전체 오케스트라의 색깔이 바뀌니까.

수많은 대안들을 모두 숙지해야 되는 상황.

이미 경험해본 선우는 과거 트라우마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 켠으로는 묘한 기대감이 어렸다.

이제 고작 1악장이니까.

‘어떻게 바뀔까?’

최 팀장 역시 청악 콩쿨 본선에서 이안의 연주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합창 교향곡을 혼자서 소화해내면서도 웅장함을 농축시킨 그의 연주.

그런 스타일의 연주가 이번 협주 전체에 퍼진다면.

그 생각이 번뜩 떨어지니 선우의 머릿속은 깨끗하게 비워졌다.

걱정들은 사라지고 그저 연습실에 울려 퍼지는 선율에 집중할 뿐.

단지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안 씨 독주회 대박 나겠다.’

미성이 하듯, 오케스트라 전체의 소리를 듣고 더 나은 길을 찾는 면모.

만약 그것을 실제 이뤄냈다면 그는 피아노를 넘어서 지휘에도 도전할 수 있으리라.

그러한 실력자가 펼쳐내는 2시간짜리 독주회라니.

선우의 손이 절로 떨렸다.

그 2시간이 어떤 음악으로 채워질지 가장 먼저 알게 될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절로 전율이 일었다.

본래 다른 업무를 하러 나가봐야 했지만, 선우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듣고 싶었으니까.

조금만.

그 말을 수없이 반복한 탓에 선우는 연습 시간이 종료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서 있던 그를 향해 연습을 마친 이안이 다가왔다.

“괜찮던가요?”

말이라고?

선우는 미칠 듯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평을 늘어놓았다.

환상적이었다고.

첫 연습이 이 정도인데 본 무대에서는 어떨지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무대 이야기와 더불어 둘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홍보 방법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그에 대해 이안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유튜브에 홍보 관련 영상을 업로드하려는데, 괜찮죠?”

안 그래도 영상 홍보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청악 악기사 공식 유튜브 계정의 구독자는 고작 2만 명.

홍보 효과를 보기엔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안의 유튜브 채널을 떠올리니 최 팀장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구독자 57만.

구독자 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

더 많은 인원을 유치하는 것.

홍보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다.

그 간단한 것이 나에겐 무척이나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가장 큰 홍보 수단, 유튜브를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기존 구독자들에게 자연스레 연주회의 존재를 알릴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 청악을 아는 이는 갈라쇼라는 이름을 보고 새로운 구독자가 될 수도 있겠지.

유튜브를 활용한 홍보가 얼마나 대단한지 몸소 체험한 사람이 나였기에.

주 수석님 방송에 출연한 것으로 지금의 구독자 초석이 만들어졌으니.

이번 연주회에 대한 기대감을 올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미 그 방법은 유라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조회 수 75만 회.

댓글 개수 700여 개.

유튜브에 올라온 유라의 곡, 세레나데의 티저 영상의 성과였다.

영상이 공개됨과 동시에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나왔는지 아직도 선명했다.

아마 티저와 함께 피네 엔터에서 움직여줬겠지.

만약 내가 티저 영상을 올리고, 이에 대해 청악 측에서 나서준다면 그 시너지는 엄청나리라.

선우에게 제안을 하자 그는 곧장 오케이 사인을 했었지.

“그럼 업로드 날짜 나오면 연락 주십쇼.”

감사하다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에 힘이 엄청 들어갔었지.

감사는 내가 해야지.

연주회에 이어 독주회를 진행할 수 있게끔 만들어준 곳이니까.

이 정도 호의는 새 발의 피일 것이다.

앞으로 독주회까지 하게 된다면 청악이라는 이름에 힘입어 내 연주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

내 본연의 모습, 본연의 연주로 만들어진 유명세.

이번 홍보는 그 초석을 다지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일정들을 유튜브를 통해서 공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내 연주를 들으러 오고 싶은 사람들이 곧장 참여하려고 들 테니까.

앞으로 독주회, 더 나아가 다른 일정에 대한 시너지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콩닥.

전생의 심장이 기대된다는 듯 박동을 보냈다.

순식간에 파생된 인기를 실감하고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악보를 살피는 눈이 바삐 움직였다.

‘어떤 파트가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려나.’

3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우울한 선율임에도 밝은 음색을 선보이는 1악장이냐.

간질거리는 차분한 연주가 특색인 2악장이냐.

그것도 아니면 감정을 터뜨리듯 쏟아내는 가락의 3악장이냐.

기분 좋은 고민이 물씬 울렸다.

‘우선 다 연주해보고 결정해볼까?’

전생이 강한 동의의 표시를 보였다.

손가락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가지런히 내 이야기, 내 연주를 선보일 뿐.

이후에는 어떤 편집이 가미되어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촬영 버튼을 누른 손가락이 재빨리 건반에 올라 춤을 췄다.

***

한 달.

길면 길 테고 짧으면 짧은 시간.

청악 오케스트라와 첫 협주 연습을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시간은 갈라쇼 당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백스테이지에 들어간 나를 향해 선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안 씨. 한번 보세요.”

그는 나를 출입구 가까이에 데려가 가림막을 살짝 치웠다.

스카이 라운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향연.

얼핏 봐도 천을 훌쩍 넘긴 숫자.

나는 작게 의문을 덧붙였다.

“발매 티켓이 천 개가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너무 빨리 매진이 되는 바람에 몇 차례 증설을 했습니다. 총 1,600여 명. 갈라쇼 최고 기록입니다.”

선우는 대부분 관객이 내 연주를 들으러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앨범과 유튜브로 유입된 인원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고.

여전히 유튜브에는 세레나데를 커버한 곡들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홍보용으로 올린 영상도 큰 호응을 얻었다.

음원 사이트의 1분 미리 듣기처럼 각 악장을 1분씩 연주하는 모습에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게 불탔다.

기대된다는 반응도 있었고, 이렇게 애태우기 있냐며 장난스런 분노를 내비치기도 했다.

오죽하면 일일 드라마급 끊기라며 칭얼거리는 댓글이 있을 정도이니…

게다가 약소하게나마 구독자 수도 증가했다.

아마도 청악 악기사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이 구독을 누른 것 같았다.

최 팀장은 예상보다 큰 효과라며 앞으로 회사 유튜브도 더욱 활성화시켜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임원분들도 영상을 보고 무척이나 기대하고 계십니다. 한 번도 연습실에 오고 싶다고 한 적이 없던 분들인데, 방문해도 되겠냐는 말씀을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최 팀장은 임원들도 자리에 착석했다고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마 제일 앞좌석 내빈석에 차례대로 앉은 양복 차림들이 임원이겠지.

내빈석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선우는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분들이 좋게 보고 있다고.

악기 제작사라면 악기 제작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 악기의 얼굴을 정하는 것도 중요할 터.

그래야 연주자의 명성에 따라 악기사의 명예도 자연스레 올라갈 테니까.

어쩌면 이번 갈라쇼는 기회를 주는 것은 물론 훌륭한 연주자를 물색하기 위한 자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눈길은 내빈석보다는 관객석에 가 있었다.

‘독주회 때 이 정도 사람이 몰리면 어떤 기분일까.’

전생의 기억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경.

전생에는 베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보러 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히 인파(人波)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게 될 정도로 많은 사람.

독주회에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피아노를 제대로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바이올린에 회의감을 느꼈던 청년이 이제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설 정도라니.

이 연주회를 신호탄으로 독주회까지.

더 큰 무대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몸에 잔잔하게 퍼졌다.

“긴장되진 않아?”

아버지가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긴장할 일이 있나.

긴장보다는 기대감이 온몸에 돌아서 그런지 몸이 뜨거웠다.

어서 이 열기를 무대에서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할 뿐.

“무대를 기대하는 얼굴은 참 오랜만이구나.”

나는 선생님께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은 내 태도에 괜찮다는 듯 직접 몸을 일으켜 세워주셨다.

인사는 무대에서 받겠다며.

피아니스트의 인사는 그런 것이라는 말에 나는 한껏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연주회에 온 선생님은 혼자가 아니셨다.

뒤에 서 있던 백인 남성.

보석처럼 푸른 눈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설마.

머릿속에서 한 인물이 떠올랐지만, 애써 부정했다.

그는 여기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비엔나의 최정상들의 수장이자, 마에스트로계의 별이 한국에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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