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마에스트로 레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레오와 아버지는 구면이었다.
아버지 또한 빈 필하모닉에서 협주를 해보셨기에.
선생님께서 통역을 자처한 덕에 둘은 오랜만에 회포를 이어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나를 향해 선생님께서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이안아. 이 친구는 빈 필하모닉 지휘자, 레오 앤더슨이란다.”
선생님께서 간단한 소개를 하자 레오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레오 앤더슨.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관현악단,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장.
손길 한 번에 수십 개의 현악기와 관악기를 통솔하는 마에스트로였다.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존재.
오스트리아의 별 중 하나인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이다.
악수를 청하는 레오의 눈빛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의문으로 가득 찬 내 눈과 달리.
‘저 사람이 왜 온 거지?
설마.
비행기를 타고도 10시간이 넘는 거리.
오케스트라 입단 거절 의사를 밝힌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사뭇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보신 것인지, 선생님이 부연 설명을 건넸다.
“네 연주 영상을 한번 보여줬다.”
레오는 기다렸다는 듯 독일어를 쏟아냈다.
선생님의 해석을 통해 들은 바로는 그가 내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나의 빠른 성장세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독특한 스킬이 엿보이는 기교에 농익은 해석이 곁들여진 연주.
내가 피아노를 수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감탄했다.
특히 그는 본선 연주곡이었던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칸타빌레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은 것 같다는 해석.
“Ich wollte es selbst hören. Weil der Senior meinte, es lohnt sich, 11 Stunden zu fliegen.”
“...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왔다는구나.”
마지막 말까지 건네고 나서야 레오는 만족스러운 듯 악수를 멈췄다.
반면 선생님은 잠깐 멈칫하시더니 통역을 이어갔다.
마치 무언가 감추시려는 것처럼.
하지만 선생님께서 모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전생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이라는 것.
이미 레오와 아버지의 담소에서부터 그가 내뱉는 독일어를 이해하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아버지를 초청하고 싶다는 말부터 내 연주가 기대된다는 평,
그리고 선생님께서 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일부러 번역하지 않은 마지막 말까지.
“직접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11시간이나 날아올 가치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클래식계에 몸을 담은 지 어언 수십 년.
비엔나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음악천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연주를 선보이는 신동도 보았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노련함을 보이는 노장도 보았다.
천재.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말은 비엔나에서 통하지 않았다.
모두가 예상보다 위에 있는 실력을 가졌으니까.
너무 흔하게 천재들을 마주했던 레오였기에.
처음 이안의 연주를 보았을 때는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유려한 연주를 할 줄 아는군.’
이안의 연주를 본 첫 소감이었다.
완성도 높은 연주 실력, 곡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해석 능력, 거기다 연주를 즐기는 듯한 제스쳐까지.
꽤 높은 경지에 오른 수준이었으나, 그 정도는 빈필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종수의 한마디가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스물까지 바이올린만 잡던 아이였네. 지금 피아노를 제대로 수학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네.”
다른 이가 말했다면 허풍이라며 넘겼으리라.
자존심 높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허풍은 농담으로 받아넘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레오가 아는 종수는 이런 사안에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종수의 한 마디는 그를 더욱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네. 끝없이 자라는 바오밥나무처럼.”
그는 천재가 가진 가장 큰 단점을 알고 있었다.
슬럼프나 벽이 등장하면 그것을 넘지 못한다는 것.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자들은 쉬이 자만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압도적인 벽을 만나면 넘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리는 것.
자신의 천재성만 믿고 간 사람들의 말로였다.
그러나 종수가 말하길, 이안은 지금도 자신의 연주를 펼치며 나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천재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성장하는 천재야말로 완전한 천재라고 할 수 있지.’
성장형 천재.
자신이 아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김종수가 인정한 사람.
그 가능성만으로도 지구 반대편, 동양으로 날아올 명분은 충분했다.
이안이라는 천재를 만나러, 레오는 청악 빌딩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지금.
연주회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한 이안의 연주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Verborgenes Leid.’
숨겨진 비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이름처럼 암울한 멜로디가 퍼지기 시작한다.
일제히 펼쳐지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현악기들의 선율이 안개처럼 쌓인다.
빗발치는 현악 사이에서 뚫고 오는 관악의 선율들이 새소리처럼, 비를 피하기 위한 사람들의 발걸음처럼 펼쳐진다.
장엄하고 낮은 음색 사이에서 튀어나온 피아노는 그들처럼 어두운 색채를 가지면서도 묘한 백색을 띤다.
마치 중도를 지키려는 듯.
‘밝은 1악장과 어두운 로망스 2악장이라.’
레오가 흥미로운 듯 금빛 눈썹을 들썩였다.
20번 협주곡은 이미 레오도 수십 번씩 지휘를 했던 곡이었다.
밝은 모차르트의 성품에서 나왔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단조의 곡.
나지막한 진행에도 모차르트의 성격이 드러나듯 밝은 기운이 샘솟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지금껏 그가 들어왔던 연주와는 다른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이점을 고뇌하던 그의 앞에 역동적인 악기들의 향연이 쏟아졌다.
3악장, 빠르게 진행되는 불협화음 속에서.
1악장과 2악장의 흐름을 반복하는 것 같으면서도 발전한 양식의 3악장을 듣자 레오는 자신이 느꼈던 특별함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선율에서 또 다른 선율을 탄생시키다니.’
레오는 옅은 기염을 통했다.
낭만파 음악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곡이 현대 음악가들의 손에서 재탄생되고 있었다.
이미 베토벤이나 브람스 같은 거장들이 카텐차를 펼쳐낸 곡.
처음 들어보면 향연에 레오는 새로운 방식의 카텐차를 본다고 느꼈다.
불협화음들의 선율을 모아 새롭게 창조된 화음이 즉흥곡처럼 흘러간다.
그 카텐차의 큰 부분을 이안이 차지하고 있었다.
Allegro assai.
매우 빠르게라는 말에 걸맞게 이안의 손가락이 질주한다.
여린 셈을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역동적인 그의 손길에 펼쳐지는 음색은 다채로웠다.
빠르게 훑는 트레몰로가 특징인 곡 속에서도 이안은 거침이 없었다.
이제 겨우 콩쿨 두 번 나갔다는 종수의 말에 의구심을 품고 싶을 정도로.
이안의 연주는 레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완성형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레오가 비행기에서 기대했던 것이 실제로 이뤄졌다.
‘영상에서 봤던 것보다 더욱 발전했군.’
실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영상에서도 봤던 실력은 지금과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마에스트로인 그는 알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담는 힘의 차이가 어떤 시너지를 이뤄내는지.
때론 관현악단과 대립하려는 듯 역동적이고 강렬하게.
그러다 다시금 함께하려는 듯 차분하면서도 부드럽게.
현악기와 관악기가 펼쳐놓은 불협화음을 이안의 연주가 가지런히 모아주고 있었다.
마에스트로를 넘어서 관현악단을 감싸는 그의 선율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연주가 끝나간다는 것이 아쉬울 지경.
그러나 레오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빛을 발했다.
이안이 만약 이보다 성장한다면 어떤 연주를 펼쳐 보일 수 있을까.
그라면 자신이 아는 경지 중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눈망울이 푸르게 빛났다.
***
끝을 알리는 커튼이 드리워졌는데도 커튼 너머로 박수 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베일 너머에서 박수 소리를 듣던 전생의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박수 세례.
도리어 연주를 끝낸 심장이 따스하게 뛰었다.
‘최선을 다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마음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와 반대로 단원들은 진이 빠졌다는 듯.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레오의 등장 때문이겠지.’
오케스트라 단원이면서 비엔나 필의 명성을 모른다면 간첩이리라.
미성마저 그의 등장에 열을 불태웠을 정도이니.
기별 없이 등장한 거장의 등장에 단원들은 묘한 긴장감을 내보였다.
하지만, 연주가 시작되자 긴장감은 기대감으로 바뀐 듯 더욱 웅장한 선율이 라운지를 휘어 감았지.
아마 거장에게 연주를 선보인다는 생각으로 단원들의 사기가 더욱 오른 듯했다.
그저 나에겐 한 명의 관객에 불과했지만.
나에겐 레오라고 해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그저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다는 것뿐.
그에 대해 더욱 열을 더해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내 할 일이리라.
단원들이 정리를 하고 있는 사이.
가장 앞줄에 있던 임원진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젤을 발라 광이 나는 머리칼.
날렵하게 뻗은 정장이 그의 성품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좋은 연주 잘 들었습니다. 이안 씨. 저는 청악 악기사의 대표 이사, 이강산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번 연주회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는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웃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한 마리의 하이에나처럼 강렬한 기색을 내뿜고 있었다.
“덕분에 연주회의 격이 더 높아진 기분입니다. 비엔나의 마에스트로께서도 방문하시고 말이죠.”
확신에 가득 찬 눈빛.
강산은 레오의 방문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한 듯했다.
연주자의 배후를 알려면 내빈을 보면 된다고 했던가.
무려 오스트리아의 별을 오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그는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독주회도 무척이나 기대가 됩니다. 이안 씨만 수락한다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꾸려보도록 하죠.”
“과찬이십니다. 대표 이사님께서 직접 기대가 된다고 말씀하시니 제가 더 감사하죠.”
오호라.
유려하게 말을 내뱉는 내 모습에 이사는 더욱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였다.
청악 악기사의 수장인 그의 앞에서 이러한 당당함을 내비친 사람은 몇 없을 테니까.
그것도 아직 경험이 없는 젊은 청년이 말이다.
하지만 강산은 그것이 싫지 않은 듯 보였다.
오히려 그 패기를 높게 사고 싶다는 듯.
그가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내뱉는 말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래서 말입니다. 박이안 씨. 저희 청악 그룹에서 이안 씨를 정식으로 후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