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37화 (37/250)

37화

후원.

전생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후원을 받고자 전생의 도움을 청했던 귀족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음악가라면 응당 연주에 하루를 매진해야겠지만, 단순히 연주를 한다고 해서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반해 레슨비, 악기 수리비, 의상값 등 나갈 돈이 많으니…

과거나 현재나 음악이 돈 많은 집의 전유물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후원이 있다면 그런 걱정 없이 오롯이 연주에만 집중할 수 있으리라.

‘부럽다…’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강산을 바라보는 단원들의 모습.

그들의 반응을 보면 음악가에게 후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분명 나쁜 제안은 아니리라.

무려 청악 악기사의 후원이 아닌가.

유명 악기사의 후원이라면 다른 후원보다 훨씬 전문적일 테지.

원한다면 악기도, 독주회도, 연주회까지 지원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의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거절 의사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단체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산도 지금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이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나 음악계 후원의 민낯을 잘 아는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원은 단순한 적선이 아니다.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맺는 계약.

그리고 계약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마음껏 연주를 하고 무대에 서게 해줄 테니 원하는 것을 이뤄줘야 하겠지.

청악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지금 내가 만들어둔 유명세이리라.

그걸 활용하여 홍보를 한다면 청악의 매출이 엄청 뛸 테니까.

그러나 내 명성은 남이 사용하기 좋으라고 쌓아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이미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있다.

아버지.

아시아의 바흐라고 불리는 거장 피아니스트가 나의 아버지인데, 후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이상의 후원은 불필요하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에게 후원은 선택사항이다.

“독주회 관련 이야기는 누구와 나누면 될까요?”

이어진 내 말에 정신을 차린 듯 강산이 곧 사람을 불러주겠다고 했다.

이때 임원진들을 뚫고 나온 미성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와 함께 나누시죠, 이안 씨.”

그녀의 발언에 단원들을 물론 강산까지 움찔거렸다.

나도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출연이었다.

보통 이런 독주회 디렉팅은 기획팀에서 맡거나, 피아니스트와 함께 곡을 선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물론 안 된다는 법은 없겠지.

하지만 한 오케스트라의 수장이 나설 정도는 아니었다.

상황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임원들의 무리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최선우 기획팀장이 나를 향해 조그맣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를 발견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미성도 몰래 윙크를 보냈다.

‘두 사람 작품이구나.’

선우와 미성.

둘이 만들어낸 합동 작전은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오히려 나는 그녀의 합세가 반가웠으니까.

그녀의 안목은 지금껏 만난 클래식 아티스트 중 최고에 가까웠으니까.

기준을 두지 않고 자유로운 해석, 개인의 표현력을 어떻게 하면 더욱 크게 만들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함께 독주회를 구상한다면 그 시너지는 무척이나 클 테지.

미성 또한 그 시너지를 기대하는 듯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해석에 대해 피드백을 건넸을 때처럼.

새로운 보석을 발견했다는 듯 눈망울에 기쁨이 차 있었다.

“그럼 미팅 날짜는 언제로 할까요?”

***

아침부터 감독님의 스튜디오가 분주했다.

업라이트 피아노에 그랜드피아노까지.

작중 시혁이 쳤던 피아노가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촬영에 사용된 실제 피아노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했던가.

총 6개의 곡.

상황과 환경에 맞춘 소리를 위한 모든 준비가 마쳐져 있었다.

그 중심에는 당연하게도 강예진 감독님이 있었다.

“소리는 괜찮니?”

감독님의 질문에 건반을 만지던 내 손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후시 녹음을 위해 감독님이 보낸 음원들을 모두 점검한 상태.

성훈의 조언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직접 후시 녹음 현장에 나설 정도로 그의 열의는 대단했다.

마지막 점검을 하려는 듯 감독님이 악보를 톡톡 두드렸다.

“포인트는 발현되지 않은 재능이야. 그 부분을 살려줬으면 좋겠어.”

아이러니한 감독님의 말에 옆에 있던 성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체념한 표정으로.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본에 적힌 내용 것도 있었지만, 전생과 더불어 이제는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

작중 시혁이 처음으로 연주를 펼치는 장면.

나는 전생이 떠오른 후 처음 피아노를 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걱정보다는 신비한 느낌으로. 하지만 부족한 연주 실력이 여지없이 드러나야 하죠.”

“그래. 너무 완벽하면 안 돼. 어디까지나 시혁의 초창기 연주니까.”

성훈과 감독님이 서로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성훈은 자신이 촬영했을 때가 기억난다는 듯 몸서리쳤다.

가능할까.

성훈의 얼굴에 우려감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없었다.

이미 느껴본 바이지 않은가.

머릿속에는 전생의 실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손이 그걸 따라주지 못했던 기억.

아마 작중 주인공도 같지 않았을까.

뛰어난 청음력으로 곡을 떠올리지만, 눈이 보이지 않아 건반을 보지 못했기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남아 있을 테지.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연주가 포인트였다.

주인공이 그렇듯, 나는 차근히 눈을 감았다.

오늘 녹음해야 할 6개의 악보들이 허공에 형형하는 기분.

그중 나는 첫 곡의 악보를 상상 속에서 복기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자! 시작해봅시다!”

감독님의 구령과 함께 장내가 빠르게 고요해졌다.

오직 피아노 소리만 담기 위해.

감독님 마저 숨을 죽인 채 손짓만으로 시작 사인을 보냈다.

신호가 오기 무섭게 건반에 올라간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생기있게.

비바체의 선율 아래에서 연주가 이어간다.

물론 처음에는 틀린 부분도 많다.

잃어버린 시각 때문에 건반의 위치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틀리게 연주할 부분까지 악보에 빨간 음표로 기입할 정도로 감독님의 설계는 섬세 그 자체였다.

“원곡과 틀리더라도 강하게 눌러줘야 해.”

사전에 그녀가 주문한 내용이었다.

시각장애인이라면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자신의 연주가 잘못되었는지 모르지 않겠냐며.

그에 맞춰 나도 강렬하게 건반을 누른다.

그제야 틀린 것을 알고 소극적으로 건반을 누를 때는 여리게.

다시금 연주가 흘러가면 자신감 있게.

연주가 이어지며 후반부로 갈수록 악보 속에서 빨간 음표는 점차 줄어든다.

이쯤 되면 틀리는 것은 문제가 아닐 테지.

곡이 완성되어가면 갈수록 연주는 선명해지고, 실수 같이 튀던 음표마저 의도처럼 매끄럽게 화음을 이뤄낸다.

‘잘 치는 것은 아니지만, 기대감이 들도록.’

악보와 선율에서는 충분히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철저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점차 완성되는 음악을 연주하는 시혁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내가 할 것은 그 곡에 웅장함을 덧붙여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것.

작중 주인공도 천재라면 뉘앙스의 차이를 느낄 테니까.

여유롭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따라 강세가 달라진다.

음원에서 나아가는 음표들의 강세 차이를 몸을 느끼듯.

내 몸도 덩달아 크고 작은 움직임으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서스테인 페달을 밟으며 음에게 지속력을 주고, 그 사이에서 연주를 펼쳐간다.

최대한 페달을 늦게 떼어 웅장함은 더하되, 화음이 깨지지 않도록 정확하게.

음악을 듣는 관객들이 소리만으로 매료되도록.

이제 겨우 하나의 연주곡을 녹음했는데도 어느덧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녹음이 끝나기 무섭게 감독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만족스러운 박수를 보냈다.

“브라보. 이대로만 가자.”

옆에 있던 성훈은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때문에 감독님의 미소가 더욱 두드러졌다.

성훈은 피아노로 차근히 다가와서 나와 피아노를 번갈아 봤다.

같은 피아노에서 다른 소리가 난다는 게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어떻게… 감독님이 말씀하신 느낌 그대로예요. 뭔가 조금만 더 하면 완벽한 연주가 될 것 같다는 아쉬움이 느껴지면서도 앞으로가 기대되는 연주.”

내 연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훈의 표정이 다소 격앙되어 보였다.

그 또한 뮤지컬을 하면서 음악을 배운 사람일 테니까.

성훈은 새로운 경험에서 실마리를 찾았다는 듯 밝은 모습이었다.

“이안 씨 연주를 보니 이번에는 제가 역할에 덜 몰입했던 것 같아요.”

성훈은 반성적인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연주는 인물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데만 급했다고.

악보를 따라 하는 식이라 잘 치는 연주는 맞지만, 인물의 직감을 나타내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빨간 음표가 틀린 것을 알면서도 거침없이 치는 내 손길에 그 자체에 믿음이 실린 것 같다는 평을 했다.

성훈의 평에 감독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큰 차이라고.

곧바로 재능을 알아차렸다기보다는 그 재능을 본인도 신기한 듯 생각하게.

그러면서도 그 재능을 즐기는 모습이 엿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쭉 이어가 보자!”

다음 연주에 대한 디렉팅을 하는 감독님의 표정이 유난히 밝았다.

성훈도 내 연주가 도리어 기대된다는 듯.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

“자네, 빠뜨린 것은 없나?”

“이안 씨에게 빼앗긴 마음만 빼면 없는 것 같습니다.”

레오가 농담투로 말했다.

줄지어진 비행기가 이륙을 기다리고 있는 곳.

짧은 여정을 온 레오가 이제는 다시 빈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레오는 이안이 나오지 않은 것에 다소 아쉽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직접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나 마음이 들었던가?”

종수가 너털웃음을 선보이며 말했다.

그 또한 레오가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인 것을 처음 보았다.

천재들 사이에서 더 이상 천재는 없다고 말하곤 했던 사람 아니었던가.

종수의 말에 레오는 가당치 않다는 듯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누구보다 천재라고 불린 자들을 많이 만난 그였다.

그중에서도 이안은 범상치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피아노를 손에 잡은 지 1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수십 년을 한 사람보다 더한 경지라는 것에서 이미 천재성은 확보된 셈이었다.

건반을 아우르는 손길과 레가토를 유려하게 잇는 스킬.

힘을 줄 때는 어깨를 비롯한 몸통에서 힘을 주듯 역동적인 선율을 선보이고, 그렇지 않을 땐 계란을 만지듯 섬세한 선율을 그리는 모습.

거기에 레오가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씨앗이 있다고 해서 꽃이 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레오의 비유적인 표현에 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이안에게 도화(桃花)라는 표현을 썼지 않았던가.

레오는 이안의 부모에 대한 칭찬까지 늘어놓으며 그의 천재성이 개화된 것이 다행이라며 덧붙였다.

비엔나 거리에서 악기 케이스를 열어놓고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은 보였지만,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이 많을 테지.

천재들이 모이는 비엔나에는 그렇게 모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천재성은 충분하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

레오는 이안이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종수는 그의 말에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떠오른 생각을 하나 던졌다.

“혹시 모르지 않겠나. 지금의 모습도 아직 만개(滿開)하기 전일 수도 있지.”

편하게 내려놓는 종수의 말.

그러나 그것은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앞으로 가능성이 더 보인다는 표현과 함께 종수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이를 아는 레오도 그 마음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트리아행 비행기가 곧 떠난다는 말에 그는 출국 게이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심사대를 통과하며 레오는 종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덕분에 좋은 영감을 받고 오스트리아에 돌아가는군요. 저희 피아니스트도 다음에 이안의 연주를 들을 수 있도록 데려오겠습니다.”

떠나는 발걸음인데도 레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벌써부터 이안의 독주회를 보러 갈 생각에 들뜬 듯 보였다.

게다가 자신이 이안의 연주에 큰 활기를 되찾았듯이.

자신과 함께 한 피아니스트가 이안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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