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39화 (39/250)

39화

‘꼭 직접 연주해보고 싶다.’

처음 이 곡을 떠올렸을 때 든 생각이었다.

기억 속 전생은 수없이 연습하여 암보했으면서도 악보를 놓지 않았다.

이안 로크실트의 인생이 녹아 들어간 곡.

악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전생의 인생 곡선이 펼쳐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렁였다.

우울과 환희, 슬픔과 기쁨을 넘나드는 감정의 흐름들.

독주회 제의를 받고 뛰는 가슴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지.

게다가 고전주의 시대를 보냈던 전생이 썼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표현이 다채로웠다.

엄격의 시대.

지금 클래식의 정수로 불리던 수많은 형식들을 정립한 시기 아니었던가.

그런 엄격한 규칙들을 지키되, 섬세한 감정들이 녹아 들어간 곡.

어쩌면 그의 사조를 알게 된 누군가가 낭만주의를 발현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곡을 매만지는 나의 심장도 덩달아서 뛰었다.

마치 가사를 붙인 것처럼.

음표들이 나타내는 특이점을 찾아 더욱 강화시켰다.

화음을 더한 선율이 분명한 색깔을 드러낸 채 드러났다.

누군가 왜 진작에 공개를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대답할 테다.

“콩쿨에서 자작곡을 연주할 수 없으니까요.”

지극히 현실적인 정답.

기교와 해석, 곡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를 판별하는 콩쿨에서 자작곡을 연주할 순 없었다.

아무리 자유곡이라고 해도 제한이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다른 이유는 전생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들려주기 위한 곡.’

처음 피아노를 잡았을 때의 신비함과 공포.

점점 실력이 상승하면서 느꼈던 쾌감.

그리고 베일 뒤에서 연주를 하고 박수갈채를 받았을 때의 환희.

그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은 곡을 통해 전생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단 하나였다.

‘우리 모두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해보라고 격려를 하듯.

마치 내가 피아노를 잡으려고 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도전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없다는 듯 울리는 선율.

나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전생이 떠오른 덕도 있겠지만, 그것을 활용하여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나의 힘이리라.

내 연주에 위로를 얻었다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

고민이 되어도 해보라고.

망설이는 사람에게 확신을 줄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싶었다.

영상으로 올렸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더욱 빨리 느낄 수 있었겠지만.

이 이야기만큼은 직접 하고 싶었다.

온전히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독주회에서.

전생 때는 이루지 못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다는 생각에.

‘과연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까?’

미성을 이곳으로 초대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녀의 귀를 매혹시킬 수 있다면 청중 모두에게 가능한 일일 테니까.

다행히 연주는 성공적인 듯했다.

청악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가 말을 잇지 못하다가 박수를 쳤으니까.

***

Presto.

쏜살같이 뛰어가는 화음의 연속.

피아노 앞에 마호가니 느낌의 갈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듯 초췌한 몰골인데도 그녀의 연주에는 힘이 가득 담겨있었다.

마치 잡념을 떨쳐내려는 듯.

손끝에는 옅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운동을 한 사람처럼 한창 땀을 흘리고 있을 찰나.

금발 머리 사내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요한나, 여기 있었군.”

“마에스트로. 어쩐 일이십니까.”

“지휘자가 수석 피아니스트를 보려는데 일이 필요하겠나.”

요한나 켈러.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비엔나 필하모닉의 수석 피아니스트.

자비로움을 상징하는 세례명을 받았음에도 그녀의 전성기 시절 별명은 악마였다.

‘피아노계의 파가니니’.

폭풍처럼 몰아치는 트릴과 트레몰로에서 그녀의 선율은 자비가 없었다.

사람을 홀릴 정도의 빠르기에 숙련된 연주 솜씨.

지금은 무대에 오르기보다는 제자를 양성하는 데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짙어진 다크서클의 원인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소 힘들어한다는 얘기를 들었네.”

“... 솔직히 조금 지칩니다.”

말을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처음은 즐거움이었다.

이름 따라 살아간다는 말이 있던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빈필 안에서 어머니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던 그녀였기에.

견습 단원들의 실력이 점차 늘어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어느 시점 즈음부터인가 단원들의 실력 상승도 점차 느려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사람마다 한계치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 이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기존을 뛰어넘는 열정이 필요했다.

개인만이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애석하게도 요한나는 그 탓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저는 좋은 선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최악의 타이밍에 찾아온 회의감이었다.

단원들의 성적은 부진하고, 노쇠한 자신의 손가락은 점차 느려지기만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

자신감을 잃어버린 그녀였다.

남들이 보면 여전히 파가니니라는 별명을 부르짖을 실력이지만, 자존감이 떨어진 그녀의 눈엔 그저 떼를 쓰는 어린아이의 연주 같았던 것.

고민을 내려놓는 그녀를 보는 레오의 눈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회의감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런 삶의 일부일 테지. 자네도 수석에 오르기 전까지 숱한 의심을 했지 않았나. 하지만, 파가니니라는 별명을 가졌던 자네를 기억하게. 그대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이기 전에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말이야.”

레오의 말은 마치 현자가 하는 것처럼 묵직했다.

한 명의 철학가 같은 눈빛을 하며 내뱉는 격려의 말.

애써 힘내라는 말이 아닌 자신 그대로를 바라보라는 말에 요한나가 잠깐 피식 웃었다.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지.

레오 특유의 격려법을 아는 요한나였다.

뾰족한 해답을 주진 않지만,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끔 하는 화법.

그녀는 감사의 의미로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레오의 용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선물을 꺼내 보이듯 조심스럽게, 레오가 말문을 열었다.

“함께 한국에 다녀오자고 물어보려고 왔네.”

한국?

요한나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멈칫하던 그녀는 곧바로 마에스트로가 천재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 동양으로 갔다는 것을 떠올렸다.

평소 칭찬에 인색하던 그였기에.

요한나는 질문의 목적이 궁금해졌다.

“내 가슴도 뛰게 만드는 피아니스트였네. 하물며 피아니스트인 자네는 어떻겠나.”

천재 중의 천재를 발견했다는 레오의 말에 그녀는 눈을 번뜩였다.

요한나는 레오가 가진 천재관에 대해서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녀 또한 레오처럼 비엔나에서 날고 기는 인재들을 만나 닳고 닳은 상태.

마에스트로의 특색을 잘 아는 요한나이기에.

그가 만났다는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와 동시에 가슴 한 켠에서는 견습 단원들에 대한 애정이 샘솟았다.

“그런 천재라면 견습 단원들도 다 함께 마주하는 것이 좋겠네요. 새로운 영감을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흠… 피아노 견습 단원들까지 움직이면 그쪽에서 부담스러워하지 않겠나.”

클래식계의 거장이라는 이름 탓에 빈필의 모든 것은 언론의 물살을 탔다.

새로운 단원을 기용했다는 소식부터 어느 나라에 간다는 이야기까지.

오케스트라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대서특필 되는 곳이었다.

하물며 오케스트라의 별들과 새싹들까지 움직인다면 빅뉴스로 전파를 타리라.

독주회의 주인공이 버젓이 있는데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은 민폐이지 않은가.

하지만 요한나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그는 실망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대신 레오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독주회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연주회 리스트도 최대한 내 의견을 반영하되,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기획팀장과 미성의 조정이 더해졌다.

클레이버 전주곡에서 시작하여 쇼팽 에튀드로 넘어가자 겨울바람이라는 이명이 더욱 진해졌다.

왼손을 위한 녹턴에 이어 슈베르트 소나타를 연결하자 퍼포먼스와 자욱한 선율을 자연스레 이을 수 있었다.

거기에 베토벤 교향곡이 가세하자 1부의 웅장함이 더욱 두드러졌다.

미성의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안 씨가 원하는 성장하는 연주를 보여주기 위해선 초반에 약세를 두고, 후반에 강세를 두는 게 좋아요. 강세에서도 깊이 차이를 주어서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내는 것이 좋을 거예요.”

천천히 속도를 올리며 달리기를 하듯.

점진적으로 진행된 곡조에 매끄러운 것은 물론 곡들의 분위기가 풍부해졌다.

다음의 연주를 예상할 수 있게 하면서도, 그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도록.

그 사이 간극을 좁히는 데 큰아버지의 조언이 이어졌었지.

“다른 곡이라도 똑같은 습관으로 연주하면 연주가 밋밋하게 보일 수 있다. 다음 연주를 할 땐 이전에 느꼈던 감정은 잊어. 자연스럽게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네가 다른 연주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선택과 집중.

화려한 연주를 연속적으로 선보이되, 섞이지 않도록.

대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답게 큰아버지는 각 곡의 특색을 살리는 법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일종의 기승전결을 보여주라는 말에 크게 동감했지.

미성과 큰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건넸지만, 단연 최고는 아버지였다.

“예전에 들었을 때보다 훨씬 기교가 좋아졌구나. 하지만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렴. 오히려 그러다가 해석이 흐트러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리고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해. 자칫 격앙된 감정 때문에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나머지 연주를 이어가는 데 힘들어.”

현직 피아니스트에다 독주회 경력자라서 그런가.

아버지의 조언은 특히 많은 도움이 되었지.

기교에 대한 세세한 조언과 독주회에 올라갈 때의 마음가짐.

체력 보존을 위해 과도하게 들어가는 힘을 뺄 수 있게 만드는 스킬까지 알려주셨다.

어깨에 손을 올리는 아버지의 손길이 무척이나 따스했지.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준비해서 그럴까.

처음 맞이하는 독주회인데도 긴장감보다는 자신감이 어렸다.

게다가 기대감도 들었지.

-매번 저를 놀라게 하시네요. 벌써 티켓이 반 이상 나갔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선우가 긍정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독주회는 보통 매진이 잘 되지 않는다고.

루키라면 더더욱.

청악에서 주최한 독주회 역사상 가장 빠른 판매율을 달리고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대로 가다간 내일이면 매진을 노려도 되겠다고.

내일?

작은 의문을 품은 사이, 선우의 말이 곧장 답을 알려주었다.

-’보이지 않기에’ 말이에요. 내일 강예진 감독님 영화 개봉하는 날이잖아요. 그거에 맞춰서 무대 홀도 저희가 제공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곳으로 잡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 시사회구나.

독주회 준비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고 있었다.

내가 얕은 탄식을 보내자 그것을 들은 최 팀장이 설마 하며 말했다.

-이안 씨? 본인이 나온 영화 시사회 일정도 잊으신 거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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