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촤라라락.
세찬 셔터음이 몰아친다.
처음 맞닥뜨린 셔터 세례에 눈이 자연스레 감겼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꼿꼿하게 눈을 뜨고 있는 성훈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
강예진 감독의 신작 영화, ‘보이지 않기에’의 시사회 현장이었다.
우리 집으로 날아온 초청장은 2장이었다.
2장밖에 없다는 것에 어머니가 꽤 의아해하셨지.
“이안이 초청장이 왜 없지?”
나도 대역을 맡아 연주를 선보였기에.
감독님은 나를 VIP 관람객이 아닌 제작진 측으로 섭외했다.
“곡에 대한 해석은 나보다 이안 씨한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대기실에서 감독님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지.
영화에 깃든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강 감독님이었기에.
성훈은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이라며 장난스런 말을 덧붙였다.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질문 폭탄이 쏟아질 수도 있다고.
아마도 그럴 테지.
나는 강예진 감독님의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선택된 대역 참여자니까.
“‘보이지 않기에’의 시사회에 참여해주신 관람객 및 내빈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시사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자의 소개에 나는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작게 손을 흔드는 어머니와 아버지.
옆에는 여러 영화계의 거물들이 앉아 있었다.
성훈과 친분이 있다고 소문난 배우들부터 시작하여 다른 영화감독들까지.
특히 수염이 두드러진 인물은 내 기억이 맞다면 일본 영화계 거장이었다.
감독님처럼 음악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감독.
그들의 눈길은 단순함 관람 의지가 아니었다.
영화에 대한 기대는 물론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듯.
진지한 기색이 엿보였다.
진행자가 문답을 진행하는 동안 그들은 감독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공감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 영화의 주제를 꼽자면 무엇일까요, 감독님?”
“아무래도 소통이라 할 수 있겠죠? 시각이 단절된 아이가 세상을 보는 법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감독님의 언변은 카리스마가 넘쳤다.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듯.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철학에 관객들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관람 포인트를 꼽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시혁이라는 인물의 성장에 관심가져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따라 변화는 피아노 선율이 특징인 영화거든요. 그리고 영화 속 연주는 무척 특별한 분이 해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께서 감상하는 데 무리가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맞아요… 특히 이번 영화는 감독님의 불문율을 깨신 것으로 유명하죠? 처음으로 대역을 사용하셨다고.”
진행자의 말에 관객석이 술렁였다.
모두 감독님의 성정을 아는 모양.
앞에 있던 VIP들도 놀라움에 움찔거렸다.
이내 감독님이 배턴을 넘기듯 시선을 보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그에 맞춰 MC도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박이안 피아니스트님. 영화 녹음은 처음이신 걸로 아는데, 기분이 어떠셨나요?”
“무척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익숙한 클래식 곡들이었는데, 감독님께서 해석이나 스토리를 넣으시면서 곡이 더 풍성해진 것 같았거든요.”
나는 자연스레 영화의 공을 감독님에게 돌렸다.
이어서 해석을 어떻게 했는지 묻는 질문에 간결한 대답과 설명을 이어갔다.
“감독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재성이 드러나지 않은 천재’를 보여드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연주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그리고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게끔.
감독님의 디렉팅에 대한 이야기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주에 임했는지.
과도한 설명은 삭제하고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제된 답변.
진행자는 물론, 감독님도 이 정도로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입술을 오므렸다.
“정말 말씀을 잘해주시네요. 혹시 영상을 이미 보셨나요?”
“아뇨. 저도 오늘 처음 봅니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됩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곡만 좋은 게 아니라, 모두 합쳐졌을 때 제대로 된 맛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사실이었다.
감독님의 영상미에 특히나 매료됐던 나였으니까.
클라이막스 영상은 본 탓에 나머지 곡들이 어떻게 영상에 입혀졌을지 더욱 관심이 갔다.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무언가 준비했다는 듯.
진행자의 질문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럼 혹시 강예진 감독님이 차기작 녹음을 제의하시면 받아들일 의향이 있으신가요?”
짓궂은 기자의 질문에 나는 잠깐 멈칫했다.
이번이 어쩔 수 없는 경우라 그렇지.
감독님은 본래 대역을 사용하지 않으니 다음은 없지 않을까.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감독님의 시선이 남달랐다.
… 왜 나보다 눈을 반짝이는 거지?
***
120분.
영화는 그사이에 사람들을 홀려야 한다.
빼어난 스토리로, 배우의 연기로, 여러 방법이 있겠지.
감독님의 편집은 그것들을 한군데로 모으는 것 같았다.
스토리에 따라 깊게 물든 배우들의 연기를 가까이, 때론 멀리서 조명하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만드는 영화.
기가 막힌 편집에 사람들이 단숨에 영화에 매료된다.
특히 장송곡이 펼쳐지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지.
‘시혁의 스승이 죽고 연주하는 피아노.’
건반에 올린 손이 멈추지 않는다.
빗소리를 뚫고 관객에게 전해지는 장송곡은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손길에서도 슬픔이 묻어나올 정도.
음악과 장면이 전환될수록 어머니를 비롯한 관객들이 다른 반응을 보였다.
미소를 머금은 채 연주를 하는 시혁의 모습에 사람들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짓고, 우울한 선율이 눈물을 흘린다.
그 반응들을 몸소 느끼고 있자니 새로운 깨달음이 들어오는 듯 머릿속이 환해졌다.
그동안 어떻게 연주를 해서 감동을 전할까 생각했던 나였다.
해석을 달리도 해보고, 압도적인 연주 실력을 선보이기도 해보았다.
그것이 무대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
하지만, 오늘로 알 수 있었다.
무대는 음악으로 감동을 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무대, 영화. 매개체가 다를 뿐 음악의 감동을 전달하는 방식은 다양하구나.’
유튜브에도 여러 사람들이 댓글을 달지 않았던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내려놓는 사람들.
내가 이야기를 건네면 그들은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일 테지.
묘한 기대감에 빙긋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덧 영화는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가 가장 기대하는 부분.
처음 연주를 맡은 하이라이트 부분이었다.
숱한 노력을 통해 남들과 동일한 콩쿨 무대에 선 주인공의 모습이 영상 속에서 피어난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감동이 떠오르는 듯 손이 옅게 떨렸다.
두웅.
낮은 음색을 시작으로 차근히 올라가는 화음.
소심하게 펼쳐지는 선율에 낮은음이 더해지자 소리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진다.
관객들도 그 조심스러움에 매료된 듯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연주를 이어가는 시혁의 어깨너머로 아이의 모습이 나타난다.
점차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과 격렬해지는 선율.
자신감을 되찾은 듯 뻗어가는 선율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한다.
게다가 원테이크로 촬영된 장면은 이미 본 나도 소름이 끼칠 정도.
끝까지 유지되는 심리묘사와 선율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면이 끝나고, 이어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은 그제야 힘을 뺀 듯 숨소리를 냈다.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마치 무대를 끝낸 피아니스트를 향해 박수를 치듯.
사람들의 감탄이 시사회장을 가득 메웠다.
***
은희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무대에서 배우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인사를 건네는 아들에게.
그녀의 박수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한데 모여 녹아 있었다.
처음에 전공을 바꾼다고 했을 때 어찌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거기다 덧붙여 자퇴 의지까지 밝혔을 때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다행스러움과 대견함, 더 나아가 자랑스러움까지.
바이올린을 잡고 깔깔대던 아이가 언제 저렇게 건장한 청년이 되었는지.
미묘한 감정에 눈물이 맺혔다.
“울면 안 돼. 카메라에 안 이쁘게 잡혀.”
남편의 장난에 은희는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포토존 앞에 마련된 인터뷰 룸.
은희는 수철과 함께 인터뷰 차례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사회 초청된 VIP 손님들의 감상평.
전문가들의 생각이 들어간 인터뷰인 만큼 그 효과가 더 좋으리라.
아마도 제작진 측에서도 그것을 예상하고 진행한 것이겠지.
부부의 앞에서 인터뷰한 사람들은 영화가 기대된다며 좋은 감상평들을 내려놓았다.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음악을 이렇게 활용할 수 있구나.”
국내 영화계의 획을 그은 감독의 말이었다.
“정말 감동적인 영화였어요. 특히 울음을 참으면서 연주를 하는 모습은 저도 덩달아 눈물이 나고 코가 찡하더라고요.”
성훈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배우의 평이었다.
이어서 올라온 VIP들도 배우로서 성공한 사람들이나 영화감독들이 대부분.
하나같이 명망이 높은 것은 물론 일부 감독들은 국제 상까지 받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은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수염 난 사내였다.
“저분…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아니신가?”
수철의 질문에 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물론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유명 거장.
그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OST는 개봉과 함께 항상 화두에 올랐다.
거장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수철은 궁금한 듯 고개를 뺐지만, 일어를 모르는 탓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제 절친이자 뉴에이지의 거장인 사내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은희도 세계를 종횡하는 플루티스트였다.
그녀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은 각국의 지휘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일본어 또한 그녀가 아는 언어 중의 하나였던 것.
거장의 말에 숨을 죽였다.
그녀 또한 자라나면서 몇 번이고 봤던 애니메이션 감독이었기에.
묘한 긴장감과 함께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 다음 차례 들어오세요.”
어느덧 은희와 수철의 차례.
은희는 멋쩍은 듯 머리를 정리하며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듯한 은희의 모습에 촬영 스태프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굉장히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어떤 인물이 음악으로 삶을 극복한다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그 극복에 대한 딜레마, 슬픔, 역경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 것 같아서 무척이나 현실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은희의 생각은 분명했다.
기존의 영화가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끝나 아쉬웠던 그녀였으니.
그러나 은희는 이번 영화에서 그런 기분은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무렵 새로운 역경과 적응 과제가 주어지며 스토리가 반전됐으니까.
미리 성공의 달콤함을 맛본 탓에 더욱 크게 무너지는 주인공의 모습에 은희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도리어 그 덕에 인물이 회생할 때 오는 쾌감이 좋은 것이겠지.
자연스레 말을 이어놓는 은희의 모습에 촬영 스태프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해주실 말씀 있나요?”
“연주가 무척이나 좋으니 영화관에서 직접 보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수철의 소감은 무척이나 간결했다.
촬영 스태프도 이에 동의하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름지기 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선 영화관에 오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러나 수철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박이안 피아니스트가 이번 독주회에서 영화에서 나온 곡들을 선보이는데. 거기서 들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못 말려.
영화 시사회에서 독주회 홍보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은희는 남편을 말릴 수 없었다.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수철의 표정.
그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아이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둘은 미처 알지 못했다.
시사회 현장은 단순히 영화인들이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수철의 말 한마디에 기사 내용이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