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41화 (41/250)

41화

‘보이지 않기에’ 피아노 연주 담당한 박이안 피아니스트. 독주회에서 연주 펼칠 예정.

1년 차 피아니스트, 박이안. 박수철 피아니스트의 피를 이어받았나.

그의 가능성은 어디까지? 강예진 감독, 다음 영화에서도 함께하자고 밝혀 화제.

영화 시사회가 끝나기 무섭게 보도자료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킨 것.

대중들의 관심이 단숨에 이안의 독주회에 집중됐다.

오죽했으면 기획팀장이 흥분한 채 전화를 걸어왔을까.

-이안씨! 신인 연주자의 독주회가 매진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에요.-

커진 목청에서 그의 기대감이 잔뜩 묻어났다.

게다가 미리 더욱 큰 콘서트 홀을 빌린 것이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직접 보라며 예매 사이트 링크를 보내왔다.

매진.

며칠 전만 해도 세 자리 수 넘는 좌석이 남아 있었는데.

순식간에 몰린 관심에 좌석이 모두 팔린 것이었다.

아마 영화가 직격타를 날리지 않았을까.

유튜브에 올라온 VIP 시사회 후기 영상에서도 많은 댓글이 달렸지만, 예상보다 조회 수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올린 유튜브 홍보 영상 조회 수가 더 높은 정도.

하지만, 영화 시사회 관련 기사는 앞선 것들보다 훨씬 월등한 효과를 보였다.

공중파 방송의 대중성을 무시할 순 없겠지.

게다가 영화의 대중성 또한 큰 몫을 발휘했으리라.

특히 클래식에 관심이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연령층은 유튜브보다 영화나 뉴스를 통한 홍보가 더욱 빛을 발했을 테지.

다시금 유명 매체의 광고성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영화가 많은 도움이 됐나 보네요.”

-아닙니다, 이안 씨. 연주가 좋아서 그런 거죠. 사람들의 기대평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아마 최 팀장은 수화기 너머에서 손사래를 치고 있으리라.

그는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번 독주회를 주최한 청악 악기사에도 문의 연락이 쇄도한다고.

영화에 나온 피아니스트 독주회가 진짜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미 매진된 표를 구할 방법이 없겠냐는 질문도 들어온단다.

이번에 가장 큰 콘서트홀에서 진행을 하기로 했다며 기대를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수많은 사람이 몰린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야겠지.

휴대폰을 든 손이 묘하게 떨렸다.

“그럼 리허설 때 뵙도록 하죠.”

희망찬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의식하진 않았지만, 가슴 한 켠에 기대감이 물씬 풍기는 듯 심장 박동이 거세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올까.

그 사람들이 내 연주에 어떤 반응을 보내올까.

수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내가 지금 할 일은 단 하나.

그들에게 제대로 된 감동을 선사하는 것.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피아노 연습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43 505 81 90

난데없는 국제번호에 망설이던 찰나.

무언가 모를 본능이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

설마.

강한 예감에 나는 수신 버튼을 눌러 수화기를 가져다 댔다.

-구텐 아브츠. 박이안의 전화 맞나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독일어.

독일어로 전화를 할 사람은 지금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단 한 사람이리라.

이미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자연스레 독일어를 내뱉었다.

“구텐 모르겐. 그곳은 아침이죠?”

레오는 내가 독어를 알아들을 줄 알았다며 몇 마디를 보탰다.

자신의 말을 듣는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선생님과 독어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빤히 보는 내 모습이 독어를 아는 눈치라고 했다.

유려한 독어 솜씨에 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척이나 유창하군요.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믿을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전생에게 독일어는 모국어였을 테니까.

머릿속에서 배우지도 않은 독일어가 순식간에 정리되더니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직접 연락을 다 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냐는 질문에 레오는 차근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대의 독주회가 얼마 남지 않았지요?-

아마 아버지나 선생님을 통해서 들은 것이겠지.

레오는 내 독주회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아 보였다.

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치는 내 모습은 환상에 가까웠다고.

꼭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독주회라는 좋은 기회가 있어서 기쁘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의 용건은 단순히 연주를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저희 피아니스트들을 대동하려고 합니다. 이안의 연주를 들으면 그들도 자극을 받을 것 같았거든요.-

레오가 내 연주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통해 독주회를 꼭 보러 오겠다고 연락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피아니스트들을 데려올 정도로 각별하게 여길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빈 필하모닉에서 자라나는 새싹들.

견습 단원들에게 내 연주를 들려주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빈필의 명성을 잘 아는 나이기에, 전화에서 들려오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거대 오케스트라의 새내기들이 마에스트로와 함께 한국으로 간다.

아마 빈필의 움직임에 과도한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염려하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독주회의 주인공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투에서 정중함이 묻어나왔다.

진심으로 연주를 듣고 싶다는 듯.

빈 필하모닉 정도면 자존감을 세우면서 올 법도 한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합니다만 레오. 이미 표가 매진되어서 제공할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이미 독주회 자리는 매진된 지 오래.

그가 얘기한 피아니스트들의 자리는 고사하고 레오의 자리마저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레오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듯 난처한 숨소리를 보내왔다.

하긴.

나도 이번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방법이 없겠습니까? 백스테이지에서라도 볼 수 있다면, 아니 단지 그대의 연주를 들을 수 있으면 됩니다!”

어느덧 그의 목소리 톤이 높아져 있었다.

마치 내 연주가 무척이나 간절하다는 듯.

절실한 마음이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

콘서트홀이라고 했을 때 예상은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장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무려 3층에 걸쳐 펼쳐진 붉은색 좌석들의 향연.

사전답사를 위해 온 것일 뿐인데도 그 압박감이 강렬하게 전해진다.

“가장 크다고 했던 것이 과언이 아니네요.”

넌지시 던진 말에 최 팀장이 자연스레 웃었다.

청현 극장 콘서트홀.

청악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최대규모의 극장.

대규모 오케스트라나 콘서트를 목적으로 만든 극장이건만.

이번에는 나 혼자서 이 무대를 채워야 했다.

객석 수만 1천.

그 많은 자리가 모두 매진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스테이지에 올라 바라본 객석은 그 끝이 흐릿할 정도.

이 수많은 자리에 사람들이 빼곡히 찰 생각을 하니 마음 한 켠이 뜨거워졌다.

“아드님이 정말 잘 크셨네요.”

조율사가 한창 피아노를 매만지며 말했다.

조율사의 칭찬에 아버지가 멋쩍은 듯 작은 웃음을 내뱉었다.

아버지의 전속 조율사이자, 집에 와서 내 피아노를 조율했던 프로 조율사.

내가 원하던 선율을 정확히 짚어낸 그의 손길이 빠르게 공연장 피아노에 닿았다.

튜닝 해머를 든 손이 바삐 움직였다.

이미 한 번 해본 경험이 있던 터라 피아노는 빠른 속도로 내가 원하던 음색을 펼치기 시작했다.

1시간 남짓이 지났던가.

건반을 몇 번 누르던 그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 조율이 끝났습니다.”

“집에서 하던 대로더구나.”

아버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펼쳐진 고전파 시기의 음색.

이번 독주회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줄 요소 중 하나였다.

건반에 올라간 손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겨울바람.

처음 콩쿨에 나서 예선에서 펼쳤던 에튀드가 펼쳐진다.

집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음색으로.

하지만, 콘서트홀에서 펼쳐지는 소리는 사뭇 다르게 진행된다.

콘서트홀 벽에 부딪힌 소리가 더 큰 진동을 일으킨다.

마치 공연장 전체에 매서운 바람이 일렁이는 것처럼.

웅장함이 배가된 소리가 휘몰아친다.

마치 전생의 기억이 현생에 현현하는 것처럼.

만족스런 선율의 흐름에 가슴 한 켠이 북받치는 듯했다.

담담하게 펼친 연주에 선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미 선율을 들어본 아버지와 조율사는 알고 있겠지만, 선우에게는 처음 듣는 음색일 테니까.

그는 신기한 물건을 쳐다보듯 피아노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런 소리는 처음이라고, 이번 독주회에서 이 소리로 연주할 거냐며 기대감 어린 시선을 보냈다.

연주를 차근히 지켜보던 조율사가 신기하다는 눈치로 나를 바라봤다.

“어쩜 저보다 소리를 잘 듣는 것 같습니다.”

그는 소리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 자연스레 펼치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일반인은 크게 느끼지 못할 미세한 차이겠지만, 평생 피아노를 잡은 사람에게는 사뭇 어색할 수도 있다고.

그러나 나는 그것을 오히려 즐기는 듯 보인다고.

맞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전생의 기억에서 비롯된 시도였지만, 지금은 오묘한 음색에 매료되어 다른 곡들도 그에 맞춰 소리를 내보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이 오묘한 선율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조율사를 초빙한 것도 그 때문.

하지만, 조율사를 함께 데려온 것은 단순히 피아노 조율을 부탁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선 그의 능력이 필요했다.

그전에.

기획팀장에게 내 생각을 얘기하는 것이 먼저겠지.

“최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선우는 무척이나 궁금한 듯, 생기 있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된다는 눈치.

지금껏 이것저것 내 제의를 적극 반영해준 고마운 사람이 아니었던가.

사전답사를 요청하고, 무대에서 사용할 그랜드 피아노를 본래 날짜보다 빨리 도착하게끔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선우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사안이 아니었다.

“곡마다 조율을 달리하고 싶습니다.”

날벼락을 맞은 듯 선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건 옆에 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물론, 조율사도 의아함을 넘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 가능할까요?”

최 팀장이 아버지와 조율사를 바라보며 의구심을 표했다.

베테랑인 아버지도 이번 상황은 쉽지 않다는 듯 난처한 기색을 엿보였으니까.

프로 피아니스트들이 조율사를 대동하거나, 본인의 피아노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있는 일이었다.

각자의 스타일에 따라 조율을 의뢰하는 것도 다반사.

하지만, 한 공연에서 곡마다 조율을 달리하는 것은 나도 들은 바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지금까지 그런 연주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시도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

‘아마 어려운 도전이 될 테지.’

그러나 내가 원하는 음색, 내가 전달하고픈 이야기를 모든 곡에 통틀어 전달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어렵다는 듯 굳은 표정을 한 사람들에게 나는 천천히 내 생각을 말했다.

내 말에 아버지는 기특하다는 듯 미소를.

최 팀장은 상상된다는 듯 감탄을.

조율사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선우는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긍정적인 소식을 알렸다.

“사측에 연락해보니 이틀 안에 가져올 수 있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미리 준비를 해두도록 하죠.”

“가능하시겠습니까?”

선우의 질문에 악의는 없었다.

도리어 기대된다는 듯.

만약 가능하다면 지금껏 있었던 연주회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모습이 펼쳐질 것이라고.

선우는 물론 아버지의 눈가에도 기대감이 물씬 느껴졌다.

둘의 눈길에 조율사는 조율 장비를 꺼내며 거침없이 피아노로 다가갔다.

“충분합니다! 한번 해보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