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루키의 무대라곤 믿을 수 없는 정도군.’
백스테이지에서도 느껴지는 압도감.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았다.
은근한 열기에 레오의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
숱한 루키들의 독주회를 가봤던 레오였지만, 이번만큼 큰 스케일의 독주회는 본 적이 없었다.
오케스트라로서 무대에 설 때 볼 법한 거대한 스테이지.
그 또한 내한 공연을 왔을 때 섰던 그 무대였다.
곁에 있던 요한나 역시 독주회 규모라고는 믿기지 않는 듯 미간을 좁혔다.
“마에스트로. 독주회라고 하지 않았나요?”
“나도 신기할 지경이라네.”
레오는 손에 들린 팸플릿을 살폈다.
장소에 대한 정보와 연주곡 리스트, 간략한 설명이 담긴 내용까지.
모든 것들이 이안의 독주회라고 가리키는 것들뿐이었다.
곡 리스트를 바라보는 레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1부와 2부에 걸쳐 펼쳐지는 선율.
1부는 대부분 레오가 아는 곡들이었지만, 2부에서 연주하는 곡은 레오가 알 수 없는 곡들투성이였다.
레오가 곡에 대한 정보를 묻자 기획팀장은 자랑스레 설명을 곁들였다.
“2부에는 이안 씨가 참여한 현대곡들이 연주될 예정입니다.”
선우의 설명이 더해질수록 레오와 요한나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이제 피아노를 잡은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 않았던가.
1년이라는 세월이 절대 짧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유명 가수의 곡을 편곡하고, 두 개의 작곡에 참여하며, 더 나아가 영화의 피아노 대역을 모두 소화할 정도로 완숙미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레오와 유한나의 눈에 이제는 경외감이 어렸다.
그리고 연주곡 리스트의 마지막.
작곡가 란에 ‘Unknown’이라고 적힌 곡.
“마지막은 이번 독주회에서 처음으로 공개하는 이안 씨의 자작곡입니다.”
꾸깃.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팸플릿의 귀퉁이를 구겨버렸다.
연주뿐만 아니라 곡을 만들어내는 능력까지 있었던가.
성장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 것이지.
어서 연주를 듣고 싶다는 마음만 커져갔다.
하지만, 무대를 바라보는 레오의 시선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반쪽짜리 무대를 선보이는 것이지?’
절대 이안의 실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장 그대로 ‘반쪽’짜리 무대.
레오의 눈앞에 펼쳐진 무대는 커다란 무대를 반만 사용하고 있을 정도였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버건디 컬러의 커튼.
이안은 커튼을 등지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레오는 그 모습에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독주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독주회라 함은 모름지기 무대 중앙의 피아노로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 보이는 것.
하지만, 이안의 무대는 일반적인 독주회와 다른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던 터였지만, 무대가 시작되었기에.
그는 욕심을 내려놓고 연주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에튀드의 연속이군.’
레오의 눈앞에 곡들의 정보들이 스쳐 지나갔다.
슈만의 에튀드와 쇼팽의 에튀드, 거기다 바흐의 클레이버까지.
모두 피아노 연주의 베이직을 담당하는 곡들이었다.
시작을 에튀드로 하는 것은 관객들을 위한 애피타이저이자, 연주자의 손을 풀기 위한 방법.
하지만 이안의 연습곡들은 특별했다.
허투루 하지 않고 강단 있게, 해석이 곁들어진 에튀드.
슈만의 것에서는 피아노에서 얼핏 관현악단이 나오는 것 같고,
쇼팽의 겨울바람에서는 활기마저 느껴지고,
바흐의 클레이버는 정갈하면서도 봄의 관록이 펼쳐진다.
그런데 에튀드를 마친 이안이 관객 앞으로 나서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무대를 가리는 커튼이 닫혀버린 것.
‘이게 무슨 상황이지?’
수십 년을 음악계에서 활보했던 레오조차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레오는 물론 요한나, 피아니스트 단원들까지 당황하던 찰나.
무대를 가로지르는 커튼 너머에서 또 다른 선율이 들려왔다.
급히 반대편 백스테이지로 향한 레오는 그제야 커튼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왜 독주회에서 피아노를 두 대나…”
요한나가 이해할 수 없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레오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피아노를 두 개나 사용해서 연주를 선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의구심이 드는 사이, 이안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그가 본선에서 연주했던 슈베르트 소나타 20번.
이번 또한 유려한 이안의 연주가 듣기 좋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번 연주에서 레오는 이안이 왜 피아노를 두 개나 사용했는지 알아챘다.
무척이나 미세하게 떨리는 차이.
연주를 듣던 요한나도 차이점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게 가능한 것입니까? 마에스트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표정.
임시 단원들은 두 거장의 당황한 면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10년 이상을 피아노만 잡은 수재들도 알아채지 못하는 선율.
그제야 깨달은 레오가 혼란과 경외감으로 헛기침을 토해냈다.
‘조율이 다른 피아노라고?!’
***
‘아무도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주리라.’
이번 독주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연주는 어떤 것일까.
그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나의 장점.
‘나만이 펼칠 수 있는 음색.’
고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만 표현할 수 있는 색채.
소리의 차이는 곧 감성의 차이로 이어진다.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피아노로 치는 것과 실로폰으로 치는 것은 다를 테니까.
물론 피아노 조율의 차이는 피아노와 실로폰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리라.
그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글썽이는 곡이 있지 않은가.
본능적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소리.
나는 그 미세한 차이로 사람들의 본능을 이끌어 내고 싶었다.
밝은 곡에는 청명한 소리로, 어두운 곡에는 우울하면서도 짙은 소리로.
마음에 떨림을 주는 곡을 펼치고 싶었기에.
조율이란 요소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곡에 어울리는 음색으로 연주하고 싶습니다.”
당찬 내 말에 아버지, 선우, 조율사까지 난처한 기색을 보였지.
조율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말을 내뱉었다.
“가능은 하겠지만, 조율하는 데 시간을 소비하면 곡마다 텀이 너무 길어질 겁니다.”
일반적으로 피아노를 조율하는 데 30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내 피아노는 무려 3시간이나 걸렸었지.
소리를 확인하고 조정하는 세밀한 작업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소리를 미리 확인하고, 조정할 양을 정해둔다면?
“모든 건반을 할 필요는 없어요. 최소한의 조율로 가능할 수 있게끔 알려드릴게요.”
곡이 바뀔 때마다 모든 건반을 고칠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것은 내가 칠 건반들.
연주를 하는 도중 다른 건반을 치면 모르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제대로 된 타건을 위해 몇 날 며칠을 연습했는데.
하지만, 조율사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남았다는 듯 묵직한 숨을 토해냈다.
“20분. 아무리 짧아도 그게 한계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피아노가 두 개라면요?”
예상치 못한 답이라는 듯.
조율사가 숨을 헙하고 삼켰다.
그의 표정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었지.
가능할 것 같다는 조율사의 말에 선우는 곧바로 악기사에 지원 요청을 했다.
피아노를 한 대 더 올릴 수 있도록.
기획을 진행하던 선우는 감탄을 참지 못했다.
클래식계는 물론 음악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신선함과 파격적인 행보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라고 확신했지.
나 또한 자신하는 부분이었다.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단순히 ‘잘 친다’가 아니라 그 차이를 직감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철저한 계산과 피나는 노력을 통해 펼쳐졌다.
각 연주마다 타이밍이 맞게 곡을 알맞게 배치하고, 내가 연주를 하는 동안 조율을 끝낼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가.
그리고 지금.
그 일련의 과정들을 증명할 나의 독주회가 시작된다.
나의 첫 독주회 무대가 펼쳐진다.
‘가장 최적의 조율로.’
에튀드.
콩쿨 예선을 주행하게 해준 곡과 큰아버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처음으로 연주했던 심포닉 에튀드.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안단테의 선율이 콘서트홀에 울려 퍼진다.
연습곡이라는 특성에 맞게 빠르게 질주하는 선율들.
피아니스트의 기교적 기량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중의적이면서도 밝은 음색으로 조율을 마쳐 그 산뜻함이 배가되는 연주.
관객들에게 산뜻한 애피타이저로 제공하기 좋은 소리였다.
짤막한 에튀드들을 끝내고 일어서자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인사를 건네기 전에 커튼으로 가려진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연주를 했던 피아노가 커튼으로 가려진다.
반대로 기존에 쳐져 있던 오른쪽 커튼을 걷자 새로운 피아노가 나타난다.
또 다른 그랜드 피아노.
예상치 못한 장면에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더욱 커진다.
나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아 다음 곡을 연주한다.
<소나타 20번>
첫 콩쿨 본선에 올라 쳤던 곡이 펼쳐진다.
잔잔하면서도 통통 튀는 것이 매력인 곡.
연속되는 스타카토를 표현하기 위해 백조의 발길질처럼 빠른 속도로 손가락이 움직인다.
밝음에 분위기를 한 스푼 더하듯.
고전 시기의 선율로 조율한 음색이 묘하게 흡수된다.
에튀드처럼 몰아치지 않는 대신 그 고요한 느낌이 더욱 배가되어 관객석에 퍼진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은 관객들이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아쉬움이 그득한 느낌으로 건반에서 천천히 손을 떼고 나서야 나는 무대의 중앙에 나와 인사를 건넸다.
“브라보!”
객석 어느 한 곳에서 시작한 축하 인사가 전체로 퍼져간다.
그 인사에 호응하듯 내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간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니까.
***
‘참. 다시 봐도 기똥차구먼.’
VIP좌석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
조율사의 손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흐릿한 빛에 의지하여 조율을 이어가야 하는 고난이도의 작업.
게다가 작은 소리도 울리는 콘서트홀의 특성상, 소리가 맞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오직 손의 감각과 약속된 조율만 진행해야 하는 작업.
50년 조율 인생에서도 처음 맞이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조율을 이어가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저 이어서 이 피아노를 연주할 이안을 응원하고 싶었고, 다음에 자신이 해야 할 조율이 기대될 뿐.
‘단순히 좋은 귀를 타고났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군.’
수철에 이어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노를 조율해온 그였다.
국내 유명 피아니스트는 물론, 내한 공연 소식만으로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해외 유망주들까지.
수백의 피아노를 만나 조율을 해봤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곡마다 조율을 달리 해달라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이안만 빼고.
독주회를 이어갈수록, 점차 선율이 늘어날수록 조율사마저 신기하여 헛숨을 들이켤 정도였다.
‘소리를 아는 것도 특이한데, 이 소리에 매번 적응을 한다는 게…’
대부분 피아니스트는 자신만의 색깔을 닦아 나가기 마련이다.
연주에서 성격이 드러나듯, 그 성격을 온전히 스타일로 정립해 나가는 것.
그래서 로맨티스트의 연주는 사랑으로 가득하고, 카리스마의 대가는 선율마저 압도적이다.
그런 이들의 색깔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 조율의 역할.
50년 경력 조율사에겐 흔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요청은 그런 그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곡마다 다른 선율이라니.
어쩌면 자신만의 색깔은 이미 찾은 지 오래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변환을 선보이는 것처럼.
이안은 매번 달라지는 조율에 금세 적응했다.
활기찬 선율에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밝은 선율을 이어가는가 하면.
어두운 선율에는 순식간에 이별을 맞이한 사람처럼 침울한 표정에 낮은 선율을 펼친다.
그사이 크고 작은 제스처의 차이로 감각을 키우는 것은 덤.
‘새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했거늘.’
숱한 세월을 지내왔던 조율사였기에.
그 또한 음을 즐기던 때가 있었으나 이제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내려놓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신기한 조율법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나 그뿐.
그것으로 항상 끝이었다.
그러나 이번 독주회에서 보인 이안의 모습은 한창 쪼그라든 늙은이의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피아노를 오가는 퍼포먼스와 그 사이 손색없는 음악적 해석.
게다가 매번 무대 아래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것과 달리 조율사도 음악가가 된 것 같은 박수갈채의 향연.
마음 한 켠에 고마움이 감돌았을까.
조율사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어서 일을 마무리하고 주인공에게 자리를 양보해야지.
이번 연주가 클라이막스이자 대미를 장식할 무대였으니까.
“긴 시간 동안 연주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와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커튼 너머로 이안의 멘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곧장 마이크를 고쳐잡은 이안이 다음이자 마지막 무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마지막은 부족하지만 제 자작곡, <환생>으로 장식해보았습니다. 부디 즐겁게 감상해주시길, 돌아가시는 길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조율사는 이안의 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백스테이지 뒤로 모습을 숨겼다.
커튼으로 흐릿하게 비치는 이안의 인형(人形)이 비쳤다.
방금 전까지 조율사가 매만졌던 피아노.
이안은 묘한 온기를 느낀 것인지 커튼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 보이지 않을 텐데, 조율사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는 착각에 휩싸였다.
피아노계의 대부가 왔을 때도 긴장하지 않던 그였건만.
꿀꺽.
조율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마치 조율사의 침 삼킴을 시작 사인으로 들은 듯.
Allegro.
박이안 독주회의 마지막 무대, 마지막 곡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