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44화 (44/250)

44화

빈 객석을 바라보는 요한나의 눈에 추억이 어렸다.

자신도 이렇게 큰 무대에서 연주를 선보일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려놓은 자리.

더 이상 연주가로서 선보일 수 있는 면모는 다 보여줬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안의 연주를 들은 그녀의 가슴 한 켠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마에스트로가 말한 것이 진짜였네.”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진짜 천재.

비행기에 올라 콘서트홀에 와서까지도 그녀는 이안이 그저 리틀 보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거대한 제안을 놓친 애송이.

빈필 단원 제안을 거절했다는 말에 도리어 그녀가 더욱 성을 내었으니까.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를 마다할 만큼 그리 실력이 뛰어날까.

마에스트로의 말이 있었으니 믿음은 갔지만, 빈필이라는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생각에 요한나의 가슴 한 켠에 묘한 적대감이 어렸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안의 독주회가 시작하기 무섭게 달아났다.

‘이게 1년 차의 연주라고?’

요한나는 그동안 자신을 스쳐 지나간 천재들이 1년 동안 어떤 성장을 해왔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천재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뛰어난 실력.

그리고 그들은 1년 동안 그 실력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실력을 여지없이 보여준다고 해서 그 실력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도리어 실력의 발전이 없음을 깨닫고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대다수.

하지만.

‘저 정도 실력이면 출발지가 어디라는 것일까.’

그녀 또한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온 수재였지 않은가.

요한나는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하농과 체르니를 빠르게 넘기고 전공자들이 한다는 에튀드를 어릴 때부터 섭렵했던 천재.

“그대가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는다면 피아노계의 파가니니가 되겠군.”

콩쿨에서 만난 한 거장은 요한나의 <겨울바람> 연주를 듣고 이렇게 표현했다.

그 말이 현실이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였다.

자신도 그렇게 긴 세월을 보냈는데, 단 1년 만에 이러한 성장을 만들어냈고, 더 나아가 앞으로도 더 성장할 인재라니.

‘빈필이라는 거대한 항아리로도 담을 수 없는 사내.’

그녀는 물끄러미 피아노 곁에 모여있는 단원들을 바라봤다.

자신의 휘하에서 수학하고 있는 임시 단원들.

이안이 맘껏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하고 갔기에.

단원들이 서로 앞다퉈 피아노를 만져보고 있었다.

그들 또한 독특한 음색을 알아차린 듯 여러 곡들을 연주해보며 신비함을 체감하고 있었다.

일부는 악보 없이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연주는 아까 들었던 이안의 <환생>과 닮아 있었다.

‘역시 천재 아니랄까 봐.’

그들 중 대부분이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연주의 일부를 외우고 있었던 것.

몇몇 단원들은 어느덧 챙긴 오선지에다 <환생>의 일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가르치는 것이 힘들었지만, 열의를 가지고 음악을 수학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이 느꼈던 감동을 그들도 느꼈던 것일까.

그녀의 가슴 한 켠이 아련해졌다.

이안에 대한 감사.

자신이 주지 못했던 감동을 대신 줬다는 생각과 동시에 자신에게도 감동을 선사했다는 마음이 혼재했다.

한창 단원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단원 하나가 오선지를 들고 요한나에게 향했다.

“선생님, 이 부분은 어찌 해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요한나는 애써 미소를 머금은 채 단원이 건넨 오선지를 받아 들었다.

그녀 또한 이안의 연주를 들었기에, 단순한 흥얼거림만으로도 어느 부분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화려한 선율이 특징인 스케르초의 도입부.

악상이 고스란히 떠올랐지만, 요한나는 차마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내가 말한 것이 제대로 된 해석이 맞을까?’

악보를 붙잡은 요한나의 손이 옅게 떨렸다.

그녀는 살면서 한 번도 자신의 음악적 해석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맞지 않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음악은 본래 계승해온 후대가 당대의 특징을 살리면서 스스로의 생각을 담아두는 것이었기에.

이미 수많은 곡들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제시하곤 했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함부로 이안의 곡을 말할 수 없다는 생각과 지금 자신이 이안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이 곡을 해석할 자격이 없어.’

툭.

요한나의 손에 잡혀 있던 악보가 바닥에 떨어졌다.

요한나의 머릿속에 후회로 만들어진 파도가 밀려왔다.

그동안 자신이 해온 것은 모두 회피에 불과했구나.

과거의 향수에 사로잡혀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멈춰버린 자신.

그렇기에 저 멀리 나아가고 있는 이안의 곡을 차마 멋대로 해석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안이 직접 해줬으면 하는 바람.

더 나아가 이안에게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일렁였다.

***

“실례가 안 된다면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요?”

요한나가 단원들을 데리고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레오의 추천을 받아 연주를 들으러 왔노라고.

하지만, 단순히 감상의 영역을 아득히 넘은 선율에 감탄을 그치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단원들이 모두 내 말을 직접 듣고 싶다고 전했다.

자신 또한 별다른 해석을 덧붙이기보다 내 본연의 의미를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아이라기엔 무척이나 성숙한 것 같은걸요?”

나는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요한나가 ‘아이’라고 표현해서 그렇지 대부분 스물이 넘은 성인들이었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

이미 전공을 비롯하여 오랫동안 피아노를 배워왔던 사람들이겠지.

하지만, 나를 향한 눈빛은 처음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아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배움에 대한 갈망.

더 많은 배움을 원한다는 마음이 그 속에 서려 있었다.

오로지 나를 음악으로만 판단하고 믿는 눈빛.

요한나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나의 진가를 알아봐 준 것에 대한 답례였다.

마치 작은 세미나를 연상하게끔, 단원들이 총기 어린 눈빛으로 나에게 질문했다.

“환생이라는 곡은 어떻게 탄생한 것입니까?”

“여러 곡들을 연주하면서 제 이야기를 담은 곡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갑작스레 바이올린에 대한 회의감이 들고, 피아노에서 제 빛을 찾았던 이야기. 그것을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로 ‘환생’이라는 이름을 붙여 써보았습니다.”

단원 대부분이 회의감에 대한 감정을 느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전파 선율을 어떻게 떠올리신 겁니까?”

“그런 말이 있죠? 기본이 중요하다. 그래서 제가 연주하는 클래식들의 기본을 답습해 써봤을 뿐입니다. 뭐든 뿌리가 단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번에는 약간의 반발이 일었다.

기본을 활용한 것은 알겠지만, 단순히 활용하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섰다고.

도리어 기본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내 말을 믿지 못할 정도로 훌륭한 음색이라고 덧붙였다.

“곡마다 조율을 달리 한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착안하신 겁니까?”

“간단합니다. 교회에 갈 때 옷이 정해져 있고, 해변에 놀러 갈 때 옷이 정해져 있듯, 각 곡에 맞는 옷을 입혀준 것뿐입니다. 저는 그 방식을 조율에서 찾았을 뿐이고요.”

단원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환생>에 대한 질문은 물론, 1부에서 연주했던 에튀드와 소나타들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요한나는 한 켠에서 염려스러운 듯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사실 정확했다.

리허설과 본 무대, 간담회에 이어서 내 몸은 녹초가 되어야 정상인 상태였으니까.

그렇지만 왜일까.

‘왜 이렇게 기쁘지?’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것 같은 기분.

말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모습에 나조차 어색할 지경이다.

다소 어려운 질문에도 지친 기색 없이.

머릿속에 악보가 떠오르듯, 대답할 내용들이 본능적으로 떠올라 각자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나는 곧 이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음악으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

‘내가 음악으로 소통하고 있구나.’

유튜브를 통해, 연주회를 통해, 영화를 통해 느꼈던 감정들.

누군가와 음악을 나누고 소통한다는 기쁨.

단원들과의 대화에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의미가 내재되어 있었다.

기자들처럼 단순히 사실을 알고 싶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 위해 질문을 하고, 그것을 알려주는 것.

내 대답을 들은 단원들은 그것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말 한마디에 배움을 얻고, 의문을 피워내는 장.

왜 전생이 귀족 자제들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아는 것을 내려놓으면서도 새로운 배움을 수학하는 자리.

어느덧 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 있었다.

***

레오는 이 모든 상황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종수와의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뒤늦게 찾아왔던 터.

그 사이 단원들과 이안은 꽤 친해진 듯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 내용은 담소라고 표현할 정도로 간단히 즐길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가히 놀라운 모습이군.’

이안의 독주회를 찾아오면서 레오가 해뒀던 생각은 두 가지.

하나는 어떤 연주를 선보일지에 대한 기대감.

다른 하나는 몇 달 사이 얼마나 성장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단 두 시간 만에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지난번보다 더욱 훌륭한 연주로군.’

청악 갈라쇼에서 들었던 협주곡이 없어도 느낄 수 있었다.

이안의 실력이 더욱 올라갔다는 것을.

‘더욱’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레오의 머릿속에 감돌았다.

곡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전달하는 것은 그가 만나온 천재들은 누구나 하는 일.

하지만, 여태껏 조율사의 능력을 활용하여 연주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 활용 능력에 레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음 피아노는 어떤 음색을 낼지, 또 이안이 그 음색을 활용하여 어떻게 곡을 완성해낼지.

끊임없는 기대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여유까지.’

임시 단원.

아직 음악을 더욱 수학하여야 한다는 판단으로 정식 무대로 올라가지 못하는 단원들.

하지만 배움이 필요하다고 하여 그들이 어린 것은 절대 아니었다.

대부분 10년 가까이 전문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

아마 이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자들이 대부분이리라.

그러나 이안은 그들과 동등하게, 아니 그보다 위인 상태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조율을 적극 활용하여 연주를 하는 것은 물론, 앞서 보여줬던 개별적인 곡들의 이해와 해석까지.’

레오의 머리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여태껏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가능성을 판단하고, 그 끝을 내야 직성이 풀렸던 레오였건만.

그런 레오에게도 이안의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했다.

다만 그가 아는 한 최상의 가능성만 제시할 뿐.

수많은 조율들의 음색을 이해할 수 있는 청음 능력과 자신보다 나이 많은 단원들을 휘어잡는 실력과 카리스마.

이안의 모습에서 숱한 거장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대한 무리를 이끄는 마에스트로.

‘그가 지휘를 하면 어떤 음악이 탄생할까?’

예상이 아닌 순수한 의구심.

레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