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독주회를 마친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부모님은 독주회까지 했는데 조금 쉬어도 되지 않겠냐고 하셨지만, 내 태도는 강경했다.
“다른 콩쿨을 나가보려고요.”
처음 우려의 뜻을 보낸 어머니도 혀를 내두르셨지.
특히 독주회의 피로감을 아는 아버지도 이번에는 쉬라고 당부하셨지만, 내 손은 어느덧 콩쿨 정보를 찾고 있었다.
콩쿨들의 정보를 찾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쇼팽 콩쿨이 지명한 콩쿨인가.’
2년 뒤로 다가온 쇼팽 콩쿨.
콩쿨 중의 콩쿨이라는 표현은 과언이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콩쿨인 만큼 예선도 남달랐다.
콩쿨 위원회가 지정한 콩쿨에서 2회 이상 우승을 하여야 예선의 자격이 주어진다.
아직 쇼팽 콩쿨이 지목한 콩쿨에서 수상을 하지 않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노릇.
그렇기에 이번에 도전하는 콩쿨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
쇼팽 콩쿨이 인정하는 최고 수준의 아시아 콩쿨.
이름에 걸맞게 아시아의 천재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대한민국은 수상자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대회.
그 이름을 올리겠다는 다짐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내 최고 목표는 오직 하나.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
경쟁.
요한나가 데려온 단원들과 대화를 하며 더욱 그 감각이 와닿았다.
단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거나, 단원들이 응용하는 연주를 듣는 것뿐이었는데.
단순히 다른 거장들의 연주를 듣는 것과는 미묘한 감각이 몸에서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에 와서, 잠을 자기 전까지.
수많은 생각에 거듭되어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경쟁심을 가진 자만이 끝없이 발전하고, 그들에게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 뛰어난 연주가가 되겠다는 다짐과 세계에 존재하는 라이벌을 향한 경쟁심.
단원들의 심장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자신의 색깔을 더한 현대 사조를 찾아냈고, 그것을 연주에 반영시켰다.
고전의 사고가 현대에 접어들어 새롭게 탄생하는 전율.
그 전율을 알았기에.
내 속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싶다는 갈망이 올라왔다.
이미 가요와 영화 삽입곡까지 녹음해본 나였으니까.
형식미와 주제 의식이 대두되던 고전파를 지나 낭만파에 가까운 사조.
인간의 심리를 담는 선율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럴까.
내 심장에서는 새로운 소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더 많은 자작곡을 만들고 싶다.’
악상은 <환생>을 완성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일상 속에서도 곡조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다양하기에.
머릿속에서 더 많은 생각들이 악보처럼 변해 떠올랐다.
이번에 완성한 <환생>이 전생의 기억에서 시작하여 그가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곡조로 표현했듯.
수많은 감정들을 오선지에 담을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유라의 곡을 손댈 때나, 피스와의 작업을 할 때처럼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오랜 고민과 노력을 더해 만들어낸 음악.
특히 <환생>이 전생의 기억과 나의 경험을 닮았듯, 한 사람의 정수가 가득 담긴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떠올린 악보를 다듬고, 또 다듬어서 하나의 곡으로 만들어 낸다.
‘이러한 시도들이 하나둘씩 쌓이면 자작곡으로만 이뤄진 연주회도 가능하겠지.’
<환생>에 이어 다른 곡들을 만든다면 그 또한 나의 기록이 될 것이다.
그러한 기록들을 한데 모아 독주회를 연다면.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뒷덜미에 짜릿한 느낌이 올라왔다.
그러나 독주회에 올리기에는 수많은 작업을 거쳐야 할 터.
곡들의 구상이나 흐름을 검토하는 것은 물론, 완성된 곡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할 사람도 필요했다.
‘누가 좋으려나…’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 아니면 큰아버지?
피아노곡인 것을 감안한다면 수석님도 나쁘지 않을 테지.
아니면 대중성을 생각하여 강 감독님을 떠올려야 하나?
단순히 ‘봐 줄 사람’ 정도로 생각해선 안 됐다.
누구보다 명확한 피드백을 건네고, 그 이름만으로도 증명이 되는 사람.
피스가 참여한 유라의 곡이 단번에 1위를 하듯, 내 곡도 검증된 누군가가 참여했다는 것이 있어야 더욱 수월하리라.
기분 좋은 선택을 하고 있던 찰나.
내 머릿속에 1순위로 자리 잡았던 사람의 이름이 휴대폰에 떠올랐다.
김종수 선생님
거절 수신
***
“선생님, 이안이 지휘자를 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레오. 지금 그 말만 다섯 번째일세.”
레오는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벌써 3시간째.
둘은 호텔 로비에 만나 독주회 때 나누지 못한 회포를 풀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내용은 이안에 대한 레오의 찬양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찬양에는 굳건한 이유가 있었다.
“저 또한 상상하지 못한 방식이었습니다.”
지휘자는 단순히 청중을 향해 인사를 하고, 오케스트라를 향해 지휘봉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단원들을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쉽.
수많은 악기들의 혼선에서 잘못된 부분을 잡아낼 수 있는 청음 능력.
모든 선율을 감상하면서도 그 속에서 성부가 가진 특색을 살릴 방법을 모색하는 판단력.
마지막으로 그 모든 능력을 아우를 수 있는 여유로움까지.
레오가 지금껏 본 사람들 중 이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이안밖에 없었다.
마치 이안이라면 자신도 만들어내지 못한 선율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레오의 눈에는 총기마저 일렁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겐가?”
종수의 입가에는 어릿한 미소가 퍼져 있었지만, 말에는 심지가 가득했다.
레오는 마치 누군가 뒷덜미에 총구를 가져다 댄 듯 오싹함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것은 시험이리라.
이 시험에 통과해야지만 거장의 동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
레오는 침을 꿀꺽 삼킨 채 말을 이었다.
“이안을 저희 오케스트라에 넣고 싶습니다.”
그의 말은 지극히 직설적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가득 담긴 말.
레오에게는 커다란 확신이 있었다.
자질은 더 말한다면 입이 아플 정도.
훌륭한 연주자에게 마에스트로의 자질까지 덧입혀졌으니, 연주자들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그 이해력 하나만으로도 이안이 마에스트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했다.
누구보다 소리를 잘 컨트롤 할 수 있을 테고, 잘되지 않는 부분의 개선점을 정확히 짚어낼 테니까.
레오가 수십 년간 쌓인 노하우로 해내는 일을 이안은 단박에 해내리라.
‘게다가 사기도 고취되겠지.’
레오가 생각하기에.
이안의 존재는 빈필 전체에 제공할 수 있는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슬럼프로 밤잠을 설치던 요한나마저 이안의 연주를 듣고 회생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지금의 이안은 피아노를 전문으로 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바이올린도 했었댔지.
남들보다 더 많은 영역의 지식을 알고, 선율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오케스트라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이올린의 선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큰 장점으로 꼽히리라.
레오 스스로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감을 일으켰던 이안이 100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일으킬 수 있는 시너지는 상상을 초월하리라.
상상만 해도 벅차오름에 레오는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종수의 표정은 여전히 강직했다.
“그 얘길 나한테까지 하는 이유는 뭔가.”
“당연히 선생님보다 가까운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가깝다면 수철이가 더 가까울 테지.”
농담식으로 내려놓은 경고.
비아냥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 무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미 레오의 검은 속내를 다 보았다는 듯한 종수의 눈빛.
하지만 아무리 종수라 하더라도 레오의 생각은 꺾일 기미가 없었다.
“선생님도 이안이 잘되길 바라시지 않습니까?”
레오는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거대한 오케스트라, 최상위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빈필에서 지휘를 하는 이안의 모습을.
이안의 손길에 바이올린들이 일제히 보잉을 하고, 관악기에서 펼쳐진 울음이 터져 나온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직접 주무르듯, 이안의 지휘에 따라 곡의 색채가 변해간다.
종수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런 레오를 향해 툭.
“자네는 이안이 잘되길 바라는 겐가? 아님 빈필이 잘되길 바라는 겐가?”
거대한 철거용 레킹볼이 뒷덜미를 후려치듯.
레오는 종수의 말에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제야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깨달았다는 듯.
레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갔다.
그러나 이내 그의 마음이 다시 꿈틀거렸다.
자신의 욕심이어도 좋다.
이안이 거대한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일 뿐.
그걸 위해 뭐든 하겠다는 자신감이 눈에 어렸다.
***
백발의 노인 하나가 호텔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카무라 미우.
그의 명성은 이미 세계에 정평이 난 지 오래였다.
오타쿠의 전유물이라고 평가절하 받던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킨 감독.
카타리네(語り手) 스튜디오의 수장이자 모든 애니메이션에 손을 대는 애니메이션계의 마에스트로였다.
특히 애니메이션의 음악은 일본의 뉴에이지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그의 애니메이션과 음악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이안의 연주는 신문물과 같았다.
“음악이 마치 활어처럼 생동감이 넘치는군.”
마치 심장에 직접적으로 전기 충격을 가하는 듯.
미우는 급소에서 시작된 전율이 온몸을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펼쳐지는 화음에서는 기품이 느껴졌고, 몸 전체를 활용해 연주를 하는 이안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마치 건반을 눌러 연주를 이어간다는 느낌보다는 몸을 사용하여 음악을 표현한다는 느낌으로.
그렇기에 미우는 독주회가 끝난 지금까지도 그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종이에 무심코 그린 낙서가 그 증거.
흑연이 만들어낸 선은 피아노 앞에 앉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마저도 매료시킨 청년의 모습에 이번에 작업을 시작한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그가 연주를 해주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단 말이지.”
미우의 얼굴에 사춘기 소녀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마치 누군가의 일대기를 펼쳐놓은 것 같은 이안의 자작곡, <환생>.
그러한 수준급의 작곡 실력이라면 자신의 애니메이션 음악을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미우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기자회견장에서 들었던 소식 탓이었다.
‘빈필의 사람들이 왔었다지.’
기자 간담회에 슬며시 끼어있던 그였기에.
빈필의 방문 소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안이 했던 말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연락을 주었다는 말.
빈필이라는 거물이 직접 연락을 할 정도로 핫라인을 가지고 있다면 무척이나 친밀한 사이리라.
미우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일본에도 특출난 음악 인재는 많았다.
한때는 동양에서 최고의 음악인들을 배출하던 나라였으니까.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동양이 아닌 서양행을 택한 것은 빈필의 영향도 컸다.
클래식을 수학하겠다며 떠난 일본인들이 몇이나 되는지 셀 수 없으리라.
‘클래식의 정수를 부르짖으며 보수만 고집하는 양반들.’
뉴에이지를 거니는 거장으로서 클래식을 바라보는 미우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항상 클래식 파벌들은 뉴에이지를 향해 클래식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수준 이하의 곡이라고 평가했으니까.
클래식이라는 높은 장벽 위에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자들.
미우가 생각하는 클래식 독종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런 독종들에게 이안이란 훌륭한 인재를 빼앗길 순 없지.
어찌해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더하던 미우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빈필이 왔다고 한다면 나도 못 할 것이 없겠지.’
그는 곧바로 카페에서 나와 프론트로 향했다.
미우의 전화 요청에 프론트맨이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전화기를 내놓았다.
미우가 조심스레 명함을 받아들고 그 안에 적혀 있던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뚜르르…
짧은 신호음과 함께 명랑한 여성의 목소리라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실례합니다. ‘보이지 않기에’의 감독, 강예진의 전화가 맞습니까?-
‘보이지 않기에’ 시사회에 초청받으면서 받았던 강예진 감독의 명함.
그녀 또한 수려한 일본어로 대답하면서 전화를 한 사람이 미우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예진이 자라면서 몇 번이나 들었던 거장의 목소리였으니까.
게다가 이번 이안의 독주회를 소개해준 것도 예진이었다.
“덕분에 좋은 음악을 듣고 갑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나카무라 선생님.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시나요?-
미우는 잠시 멈칫했다.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당찬 생각이었으니까.
항상 상대방의 의식을 먼저 생각하고, 예의를 중요시하는 나라에서.
이렇게 갑작스레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에 미우는 자신마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만큼 간절했다.
이안의 연주는 거장의 마음마저 흔들 만큼 강렬했으니까.
“할 일이 생겨서 며칠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전화를 드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