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침부터 내 방을 찾아온 아버지의 얼굴이 어두웠다.
소식은 무척 좋은 소식이었는데 말이다.
“큰아버지 은퇴 연주회요?”
예정된 수순이었다.
운동선수들만 은퇴 나이가 빠른 게 아니다.
음악가들도 고난도 테크닉과 화려한 스킬들을 펼치는 탓에 관절 이곳저곳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큰아버지도 열성적인 지휘를 펼친 대신 그 열정에 온몸을 바쳤겠지.
큰아버지는 수석님처럼 오래 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온 존재였으니까.
대한 오케스트라를 국내 최정상 오케스트라로 만들고, 한국에도 이러한 오케스트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린 장본인이 바로 큰아버지였다.
그런 큰아버지기에.
그의 은퇴식은 오케스트라 전체가 합세하여 화려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래. 큰아버지가 너를 은퇴 연주회에 합류시키고 싶어 하셨거든.”
아버지의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유는 충분했다.
수년 동안 나를 후원해준 후원자이자, 루키 무대를 마련해준 사람이었으니까.
내 능력을 알아보고 인정해준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무대에 오를 이유는 충분했다.
만약 큰아버지가 내가 무대에 오르길 원했다면 더더욱 기쁜 마음으로 응할 테지.
그 또한 내가 오를 수 있는 무대가 될 테니까.
그런데 왜일까.
아버지의 눈에 안타깝다는 듯한 눈길이 가득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아버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큰아버지께 연락을 먼저 하셨다는구나.”
“김종수 선생님이요?”
아버지의 말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염라’라고 불리는 큰아버지를 무려 ‘현철이’라고 부르는 분 아니셨던가.
큰아버지가 호랑이라고 한다면, 선생님의 위치는 용쯤 되리라.
“스승님이 먼저 점을 찍어버리신 거지. 이번에 네가 마에스트로를 따라 독일에 가도록 말해보라고 당부하셨다는구나.”
선생님이 먼저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아마 큰아버지의 성격상 선생님께 아무 말도 못 했겠지.
아버지만큼이나 큰아버지에게도 선생님은 대단한 존재였을 테니까.
아버지가 큰아버지에게 반항 한 번 못했듯이, 큰아버지도 선생님께 항변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수락 의사만 밝혔겠지.
그럼에도 나는 선생님의 제안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보고는 그 누구보다 인자한 성정으로 다가오셨던 분 아닌가.
앞으로 경쟁보다는 방패 같은 연주를 하라고 일러주셨던 분이.
갑작스레 큰아버지에게 선언을 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버지의 이어진 말에 나는 곧바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레오가 이번에는 지휘부 제안을 했다는구나.”
“지휘부요?”
역시.
선생님을 움직이게 한 데는 레오의 영향이 있었구나.
하지만 그의 선택 또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난데없이 지휘라니.
피아노만 잡고 있었던 나에게 온 제안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자리는 거절했으니, 새로운 자리를 건네는 것인가?
“천천히 생각해보렴. 큰아버지는 상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상관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눈빛에는 내심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분명 빈필의 위용과 내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의 이점을 알고 계실 테지.
그러나 가족으로서 형의 은퇴를 그 누구보다 축하하고 싶은 아버지일 테니까.
직접 나에게 연주를 맡기고 싶었다는 것을 보면 은퇴 전 마지막 소망이실 테지.
내 음악 인생에 큰 초석을 마련해준 큰아버지이기에.
나 또한 답례로 그 소망을 이뤄주고 싶었다.
다른 이가 그 소망을 망가뜨리게 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내가 움직여야 한다.
***
“이안.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랜드 호텔의 로비.
금빛 찬란한 샹들리에가 화려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오가는 인파들 사이, 와인색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는 사내.
청색 정장을 빼입은 금발의 남자가 푸른 동공을 움직였다.
“연락 고마워요. 자리에 앉죠.”
레오의 태도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마치 내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는 듯.
체스판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처럼 레오의 얼굴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아직 출국하지 않으셨네요.”
“네. 한국이란 나라가 생각보다 좋은 것 같아서요.”
빙긋.
그는 내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여기로 나를 이끈 것만 해도 큰 수확이라는 듯.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레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지휘자를 제의했을까.
“저에게 지휘자 자리를 제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벌써 들으셨나요?”
이야기가 빠르겠군.
레오의 얼굴에 승기를 잡은 듯 미소가 펼쳐졌다.
그러나 아직 나는 그의 의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휘자라는 위치는 그리 가벼운 위치가 아니다.
말 그대로 지휘(指揮).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단체의 행동을 통솔해야 하는 일이리라.
엄청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일.
레오는 내가 그에 적합한 인재라고 말을 덧붙였다.
“이번 독주회로 더욱 확실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재능은 단순히 피아노로 끝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배출된 수많은 거장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베토벤, 하이든, 슈베르트까지.
모두 작곡가이자 자신의 곡을 지휘했던 예술가들이었다.
수많은 교향곡들과 가곡, 소나타들을 남겼던 거장들.
그들에게 피아노는 기본 소양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오는 내가 그런 거장들처럼 될 수 있다는 듯.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이안.”
레오가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향했다.
보석 같던 푸른 눈망울에 불길처럼 강렬한 기색이 일렁였다.
“그대를 우리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오케스트라 아카데미.
빈 필하모닉에서 직접 운영하는 교육 기관.
베를린 필하모닉의 카라얀 아카데미와 쌍두마차를 달리는 곳이기도 했다.
온갖 천재들을 불러모아 직접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될 수 있는 자들을 모집하는 곳.
요한나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던 이들도 대부분 아카데미 소속이었다.
음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무척이나 달콤한 제의이리라.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순간, 곧바로 임시 단원의 명찰을 달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소통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 나에게는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유수의 대학교수들은 물론, 필하모닉 수석 연주자들과 함께 배우며 의견을 나누고, 거기에서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겠지.
레오는 그중에서도 지휘자 클래스를 적극 추천하고 있었다.
“이안이 보여줬던 청음 능력과 조율법. 자신만의 선율을 만들어가는 것까지. 조금만 수학한다면 당신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을 거예요.”
“제 어떤 면을 보시고 그렇게 자신하시는 거죠?”
“Sternstunde.”
그의 입에서 유려한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별의 순간.
한국어로 표현한다면 ‘운명적인 순간’ 정도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레오는 지금 순간이 단순한 운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자부했다.
수석 피아니스트는 물론 피아노 임시 단원마저 홀릴 연주 실력, 빈필의 수장인 자신까지 인정하게 만드는 곡 해석 능력과 표현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미리 생각해둔 통찰력과 청음 능력까지.
굳이 운명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의 가능성을 표현할 문장은 많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가 그대의 재능을 못 본 채 지나간다면 그것은 죄악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고전파 시기의 거장들이 그러했듯.
나 또한 당연히 마에스트로가 되어야 할 운명이라는 듯.
레오의 눈에 확신이 가득 찼다.
그러나 내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좋은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생긋.
미소를 머금은 거절이 그대로 레오에게 꽂혔다.
아까의 여유로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거절에 레오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자꾸만 뻐끔거렸다.
자신만만한 내 표정에 더 이상 설득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조심스레 질문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레오가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단순히 큰아버지의 은퇴식 무대를 참여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레오의 말대로 내가 가능성이 있다면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되는 일.
오랫동안 빈필을 지킨 마에스트로라면 그의 안목은 충분히 믿을 만하리라.
그러나 아직 내 몸에서 웅크린 채 박동하는 심장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였다.
‘피아노.’
전생의 기억에 힘입어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
아직 피아노로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콩쿨을 나갈 때마다, 독주회를 열면서, 유라와 피스, 감독님과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았다.
아직 내 마음속에는 피아노로 선보이고픈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적어도 그 이야기들을 모두 내려놓기 전까지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 모든 생각들은 단 하나의 악기로 귀결되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저는 피아노를 하고 싶거든요.”
***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열기가 느껴진다.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아버지의 지휘는 여전했다.
여전히 염라라는 별명에 맞는 기색을 내뿜고 있었고, 그에 따라 펼쳐지는 성부도 화려했다.
물끄러미 연습을 지켜보는 내 귓가에 현악기의 선율과 관악기의 울림이 자연스레 나눠진다.
어쩌면 내게서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레오의 말이 허풍은 아닌 듯했다.
한 악장을 끝내고 휴식 시간에 접어들었을 즘.
나는 복도를 따라 무대 앞으로 나아갔다.
“안녕하셨어요, 큰아버지?”
평소 같았으면 호통을 치셨을 큰아버지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갑작스런 방문에 큰아버지의 동공이 심히 흔들렸다.
아마 선생님의 당부가 있으셔서겠지.
“저 빼놓고 은퇴식을 하려고 하셨어요?”
“...!”
처음 보는 큰아버지의 당황한 기색.
아주 잠깐이지만, 약간의 기쁨도 엿보인 것 같았다.
이내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는 듯, 큰아버지는 헛기침을 연발했다.
아직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은 듯.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엄한 톤이었지만, 미묘하게 조심스러움이 녹아 있었다.
“빈필의 제의는 어찌하고 온 게냐.”
“지금 거절하고 오는 길입니다.”
내 대답에 놀란 것은 큰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이야기를 듣던 대한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숨소리를 멈추며 놀라운 기색을 그대로 표현했다.
왜?
단원들을 비롯해 큰아버지까지 얼굴에서 물음표를 감추지 못했다.
마치 나에게 해명을 요구하듯.
수많은 의문 세례에 나는 담담하게 얘기했다.
“지휘봉을 잡으면 피아노를 치지 못할 테니까요.”
사람들은 내가 웃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려 빈 필하모닉.
클래식 연주가라면 누구나 가지 못해 안달인 곳 아니었던가.
내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멈춘 사람들.
하지만 내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피어 있었다.
이 표정을 보고 레오도 그리 얘기했지.
“aufgeben.”
항복.
레오는 두 손을 다 든 채 멋쩍게 웃었다.
자신의 무례를 이해해달라며.
나의 표정에는 자신보다 더욱 강한 확신이 깃들어있다고 했다.
진심으로 피아노를 사랑하는 얼굴이라고.
그 사랑의 표현 방식이 어떻게 바뀌어 펼쳐질지 기대하겠다며 돌아갔지.
단순히 피아노가 익숙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레오의 예견대로 장차 한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피아노로도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이 남았기에.
오케스트라 지휘는 피아노만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커다란 이야기를 담을 때 맡으리라.
지금 내 소명은 그러했다.
큰아버지도 내 얼굴에서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이유라면 최고구나.”
얼핏.
큰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기특하다는 듯.
그의 표정에서 은근한 따스함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은퇴 연주회에 참여하겠다는 소신을 밝혔으니, 여기에 온 다음 이유를 얘기해야겠지.
“큰아버지. 저를 은퇴식 무대에 올리려 하셨다고 들었어요.”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큰아버지는 단순히 가족이라는 이유로, 피아노를 잘 친다는 이유만으로 무대에 올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
가족이라면 아버지의 연주가 더욱 뜻깊을 테고, 헌정의 의미를 담으려면 주 수석님의 연주가 무대에서 더욱 밝게 빛나리라.
그런 와중에서 나를 부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면 나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내 질문의 의중을 알았다는 듯.
큰아버지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었다.
“독주회에서 네 자작곡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마치 개인의 음악사를 통찰하는 기분이었다고.
형식을 철저하게 지켜가면서도 사람의 감정을 토해내듯 내달리는 감정의 선율은 처음이라 답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큰아버지의 시선.
“나도 내 음악사를 펼치고 싶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