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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48화 (48/250)

48화

똑똑.

연주를 멈춘 사이, 어머니가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왔다는 말에 1층으로 내려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강 감독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내 덕분에 영화가 무척이나 흥행하고 있다고.

자신의 최고 기록을 이번에도 경신할 것 같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하지만, 내 눈길은 어느덧 그 옆에 있던 사람에게 향했다.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

간담회에서 마주쳤던 백발의 사내였다.

“이안아. 이분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 나카무라 미우 선생님이시란다.”

나카무라 미우.

나 또한 아주 잘 아는 거장이었다.

내 또래는 물론 부모님 또래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감성적인 애니메이션 영화의 감독이자 제작자였으니까.

전자기기 보급이 활발한 21세기임에도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장.

하지만, 그것이 고집이 아니라는 것을 그대로 증명한 거물이기도 했다.

콘티만으로도 완성작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세심함이라고 했으니.

바닷속 물고기,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조각, 땅에서 솟은 풀잎 하나하나까지.

문명의 이기를 간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의 철학은 완고했다.

그 덕에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 나왔지만.

‘게다가 항상 애니메이션 OST가 큰 화제를 몰았지.’

거장의 애니메이션 속 선율은 일본의 뉴에이지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불편함 없이 깔끔한 화면과 잔잔한 선율.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에 빨려 들어간다는 착각을 일으킨다는 평이 있을 정도이니.

피아노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의 영화 음악을 듣고 한 번쯤 쳐보겠노라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그런 거장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단순 관광이 목적이 아닐 테지.

나를 향해 일본어를 연발하는 미우의 눈에 진지한 기색이 어렸다.

“이안 씨에게 애니메이션 장면 속 OST를 의뢰하고 싶대요.”

사뭇 신기함에 동공이 커진 것을 본 것일까.

그가 자신의 신작에 대한 정보를 몇 마디 떨어뜨렸다.

환상화(幻想花).

전설의 꽃이라고 불리는 꽃을 찾으러 나서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고.

수많은 탐험가들 사이에서 호기롭게 환상화를 찾으러 떠나는 주인공.

무시도, 멸시도 받았지만 결국 그것을 찾아내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했다.

가히 어른들의 동심을 자극한다고 했던가.

잠깐 꺼낸 이야기에서 미우의 이야기 속 의중을 알아낼 수 있었다.

“경쟁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군요.”

냉철하게 내뱉은 말에 예진이 통역을 담당했다.

미우는 내 말에 사뭇 놀란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전체 스토리가 아닌 작은 단락을 말해 주었는데도 어떻게 알았냐며.

이유는 당연했다.

나도 그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온 사람이었으니까.

‘카타리네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은 현실 동화를 만든다.’

그들이 만드는 영화는 환상 그 자체였다.

동화를 연상케 하는 밝은 색채, 그리고 상큼한 노래.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색채는 어두워지고 그 환상들이 사실 현실을 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색채의 차이와 선율들의 변화가 무척이나 명료해서.

일반 대중들도 쉽게 느끼는 것이겠지.

단번에 자신의 의중을 파악한 것이 신기하다는 듯.

미우의 입가에 더욱 확신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제게 원하는 것은 주어진 악보를 연주하는 것인가요?”

“... 아니래요. 독주회에서 들은 이안 씨의 자작곡을 들으셨거든요. 어찌나 칭찬 일색이시던지.”

그는 나를 향해 생동감 넘치는 연주를 선보인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원하는 음악도 그런 것이라고.

슬로 모션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처절하게.

몰아치는 선율을 자아내고 싶다고 덧붙였다.

마치 방금 연주했던 것처럼.

“이안 씨. 나카무라 선생님이 방금 노래는 무엇이냐고 물으시네요.”

내 대답을 무척이나 기대하는 듯.

미우의 눈길에는 호기심이 가득 찬 모습이었다.

마치 아이의 눈망울을 보듯.

왜 카타리네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애니메이션들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펼치는지 알 수 있는 법한 대목이었다.

게다가 내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미우뿐만이 아니었다.

통역을 하던 감독님도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듯.

하지만, 나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제목만 툭 던질 뿐.

“<염라>. 곡의 제목입니다.”

***

미우 또한 염라대왕을 아는 눈치였다.

예진의 통역에 무척이나 흥미로운 듯.

하지만 여기서 그 이야기가 튀어나올 줄 몰랐다는 이야기였다.

“이안 씨. 불교에서 지옥 신화에 나오는 염라대왕을 말하는 건가요?”

끄덕.

긍정의 표시에 미우가 반가운 이야기라며 말을 이었다.

작품에 대한 영감을 받기 위해 조사를 하던 중 무척이나 흥미롭게 본 설화라고.

죄인의 혀를 뽑아 그 위에 과수원을 지을 정도로 냉혹한 존재.

미우의 설명이 곁들여지자 순식간에 세 사람의 입이 다물어졌다.

마치 이야기와 곡을 비교해 보는 것처럼.

아마도 위층에서 연주를 하고 있을 때 곡의 일부를 들은 모양이다.

가장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어머니였다.

“큰아버지의 인생사를 곡으로 표현한 거구나?”

어머니가 작게 미소 지었다.

생각만 해도 큰아버지가 생각난다는 듯한 표정.

그의 성정을 무척이나 잘 녹였다며 작은 칭찬을 곁들였다.

우리의 모습을 보는 예진과 미우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가득 퍼져 있었다.

아직 은퇴 연주회 소식을 모르시는 것일 테지.

“이번에 저희 아주버님 은퇴 연주회를 하거든요.”

아주버님?

처음 예진은 어머니의 부연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우리 가족들을 떠올린 예진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퍼졌다.

대한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

무려 수십 년간 홀로 대한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은퇴 연주회도 그 명성에 걸맞은 스케일이 되지 않겠냐며 기대감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래서 저희 가족 모두가 조금씩 준비하고 있어요.”

가족들이 총출동한다니.

예진의 얼굴에 연주회를 상상하는 듯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피아니스트와 플루티스트가 독주를 준비한다는 말에 놀리기도 하고,

큰아버지가 직접 쓴 피아노 협주곡을 공개한다는 말에 기염을 토했다.

수십 년간 지휘봉을 잡은 마에스트로의 회한과 노하우, 그와 비롯된 모든 이야기가 담길 곡일 테니.

내가 그 협주곡의 피아노 파트를 맡게 됐다는 말에 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충분히 그 자리가 어울린다는 듯.

도리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이어진 말에 그녀는 다시금 입을 쩍 벌렸다.

“아주버님께서 협주곡의 3악장 작곡을 이안이에게 맡겼나 봐요.”

감독님 또한 클래식을 잘 아는 사람이니 어머니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테지.

예진이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고양된 듯.

뜨거운 열기마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미우가 답답한 듯 예진의 어깨를 두들기자 그제야 열기를 거두고 통역을 이어갔다.

대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가 은퇴를 한다는 이야기, 그 은퇴 연주회에 내가 참여한다는 이야기.

더 나아가 곡의 한 부분을 내가 작곡하게 되었다는 소식까지.

일본어를 모르는 나도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시각각 미우의 표정이 변해갔으니까.

아마 대한 오케스트라가 일본에서도 몇 번 공연을 한 적이 있었기에.

그 또한 대한 오케스트라를 아는 듯했다.

그런데 미우의 표정에는 기대감과 함께 옅은 울상이 맺혀 있었다.

우려가 잔뜩 담긴 일본어가 들렸다.

“이안 씨. 그럼 은퇴 연주회 이후의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

“아마 콩쿨 합격 연락이 오면 콩쿨을 준비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국제 콩쿨이라는 말에 예진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

지역 예선전은 연주 영상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손과 얼굴, 피아노 건반이 모두 뚜렷하게 나와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꽤 고생을 했지.

모든 영역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평소 피아노 위에 휴대폰을 세워놓던 것만으로는 부족했으니까.

예진을 통해 알게 된 유튜브 촬영팀을 생각해낸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덕분에 멀끔한 연주 영상을 준비해 주최 측에 보내둔 상태였다.

아마 한 달 안에 연락이 오겠지.

예진의 통역을 듣던 미우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무언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듯, 그는 다시금 같은 질문을 내뱉었다.

“그 이후 일정은 따로 있나요?”

“아마 독주회를 준비할 것 같습니다. 자작곡으로 구성한 독주회를 생각하고 있거든요.”

자작곡?

내 대답에 예진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아졌다.

벌써 독주회를 준비하고 있냐고.

더군다나 자작곡으로 구성할 거라는 말에 큰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미우 또한 이야기를 듣던 중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그 또한 자작곡이라는 말에 큰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훨씬 밝아진 그의 표정에서 묘한 희망감이 느껴졌다.

예진을 재촉하듯 미우가 그녀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선생님이 독주회 곡이 모두 정해졌냐고 물으시네요.”

“아니요. 하나씩 채워보려고 합니다.”

독주회에 주어지는 시간은 대략 2시간가량.

그 시간을 자작곡만으로 독주회를 진행하려면 최소한 8개 이상의 곡이 필요할 테지.

이제 겨우 하나만 채웠을 뿐이다.

이번에 염라를 완성하면 2개째.

점진적으로 그 수를 늘릴 계획이었다.

주제가 다 정해진 것이냐는 질문에도 내 대답은 모호했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앞으로 주제를 생각해보며 곡을 써 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자작곡을 더 쓰고 싶다는 말에, 어떤 곡을 쓸지 생각 중이라는 말에.

미우의 눈망울에 담긴 희망감이 더욱 가득 찼다.

간절함이 물씬 풍기는 기운.

그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이 여기에 찾아온 진짜 목적.

“이안 씨에게 애니메이션에 나올 곡을 의뢰하고 싶으시대요.”

예진의 입으로 전해 들은 미우의 이야기.

이번 애니메이션은 미우가 무척이나 총력을 가하고 있다고 했다.

예산도 여태껏 나온 애니메이션들 중에서도 최고.

완벽한 자연스러움을 위해 CG도 내려놓고 전면 수작업으로 할 정도라고.

그에 발맞춰 음악도 가장 완벽한 수준으로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그러다가 생동감 넘치는 내 연주를 보았노라고.

“이안 씨의 연주가 마치 한 마리의 연어 같았대요.”

산란기를 맞아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2층에 있던 자신을 향해 음악이 뛰어 올라오는 것 같다고 전했다.

낮은 데서 시작하여 환호하듯 펼쳐지는 멜로디는 마치 사람의 인생을 표현한 것 같다고.

자신에게도 그런 표현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게다가 신작의 스토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의중을 알아차린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 안목에 더욱 믿음이 갔다고.

내 연주가 가미된다면 애니메이션이 몇 배나 높은 완성도를 이룩해낼 것이라며 덧붙였다.

게다가 이것은 좋은 기회 아니냐고.

미우의 마지막 말을 번역하는 예진의 동공이 무척이나 커졌다.

“자작곡 독주회에 이안 씨가 만든 애니메이션 곡을 올리는 건 어떻냐고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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