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왜 그렇게 생동감을 강조했는지 알 것 같네.’
내 손에는 미우가 두고 간 콘티 사본이 들려있었다.
거장이 직접 쓴 그림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그 속에 들어간 세밀한 묘사와 설명들이었다.
보통 콘티라고 하면 영상 촬영을 위해 촬영 각도와 위치, 어떤 액션이 들어가는지 적혀있는 것이 대부분.
어디까지나 계획을 써놓는 것이기에 장면을 자세하게 그리기보다는 개괄적인 형태만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야 빨리 작업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거장의 콘티는 달랐다.
당장 만화책으로 낸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밀한 묘사들.
‘이래서 애니메이션이 극찬을 받는구나.’
머릿속에서 애니메이션이 흐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상세한 설명들.
미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콘티에 손을 댄다면 도리어 작품이 어긋날 것 같을 정도였다.
그가 나에게 제시한 주제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주인공이 빌런들, 즉 경쟁 탐험가들에게 쫓길 때 펼쳐질 선율.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환상화를 찾아가면서 마주치는 장엄한 자연의 위용을 나타낼 수 있는 선율.
다급한 마음에 두근대는 소리와 압도적인 자연으로 관객들이 애니메이션에 잘 흡수되게끔 하면 될 것이다.
원하는 분위기를 떠올리니 머릿속에 얼핏 그림이 그려졌다.
“애니메이션 중간중간에 삽입될 배경곡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내 말에 미우가 격한 긍정의 의사를 전했지.
장면뿐만 아니라 소리로 그 분위기를 크게 살려보고 싶다고.
내 연주는 그 장면에 더 큰 생동감을 넣어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는 충분한 생각을 해보고 연락을 달라고 덧붙였다.
아직 수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라 여유가 있다고.
그러니 예정된 일정을 모두 소화하라고 말했다.
일본의 거장이면서도 최대한 나의 스케줄에 맞추려는 면모.
그의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 또한 흥미로운 도전이었기에.
콘티를 바라보는 내 눈빛에 열망이 가득 어렸다.
“둘 다 할 수 있을까?”
욕심이 났다.
마치 전생의 기억에서 음을 기억해냈던 것처럼.
영상을 본 것이 아님에도 영상을 본 것처럼 장면들이 형형한다.
빠른 속도로 쫓아오는 사람들과 고함, 그것을 짜증스럽게 보는 주인공의 눈길.
장엄한 환경은 또 어떠한가.
카타리네 스튜디오 특유의 자연 감수성이 물씬 풍기는 곡.
나 또한 보면서 자라왔던 환상이었다.
‘음악을 만들고 싶다.’
소리가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일렁이자 가슴 한 켠이 달아올랐다.
영상에 맞는 옷을 입혀주고 싶다는 생각.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이 마치 무성 영화처럼 지나가자 아쉬움은 배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성이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다.
이번 도전은 단순히 애니메이션 곡을 창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배경음은 극히 현대 사조에 가깝지.’
고전파 시대에는 영상이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음악이라는 예술은 온전히 소리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감성을 자극할 수 있도록.
수많은 곡들이 그러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의 음악은 그때와 많이 달랐다.
이제 음악은 청각을 넘어 시각을 매개체로 하여 더욱 다양한 선율을 뽐낸다.
마치 감독님의 영화처럼, 미우의 애니메이션처럼, 유라의 노래 가사처럼.
형식과 주제부, 교향곡의 형성 원리를 알아야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간 터.
그래서 내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현대 사조니까.
‘게다가 나카무라 미우의 이름이면 충분한 증명이 되겠지.’
곡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받기 위해 선생님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이번 애니메이션 곡을 맡는다면 미우가 피드백을 할 테니 본래 내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본 거장의 인정을 받은 자작곡이 무려 두 개나 만들어진다.
펼쳐나가는 가능성에 빠르게 뛰는 심장.
나는 심호흡을 하며 진정시켰다.
제안을 받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금 내가 먼저 할 일은 <염라>를 완성시키는 것이니까.
미우도 내 스케줄에 최대한 맞춰준다고 했으니까.
먼저 주어진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순리겠지.
‘벼락같이 펼쳐지는 선율로.’
쾅.
아까와 같이 8개나 되는 음표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뿜는다.
거대한 위용을 뽐내면서도 시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마치 큰아버지의 호통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도록.
10분 사이에 ‘염라’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큰아버지의 인생을 담기 위해.
손가락이 희고 검은 건반을 재빠르게 훑는다.
***
“대한에 10년은 더 붙어있을 줄 알았더니.”
껄껄.
쇳소리가 섞인 종수의 너털웃음이 텅 빈 극장에 울려 퍼졌다.
그 옆에 앉아있던 현철의 모습은 무척이나 각이 잡혀 있었다.
수철은 물론 현철에게도 종수의 존재는 스승 그 이상의 존재였으니까.
특히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던 현철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학생 때 모습을 잊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무심한 듯 툭툭 내뱉던 현철의 어투는 온데간데없고 예의범절이 바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 자리를 매번 꿰차고 있겠습니까.”
“정말 그뿐이더냐.”
허허.
현철도 그저 웃으며 응답했다.
그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달리 두 사람의 표정에는 묘한 기운이 흘렀다.
현철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고, 종수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풀리지 않는 듯 미간에 주름이 패여 있었다.
그러나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또 할지 알겠다는 듯.
온화하면서도 냉기 넘치는 아이러니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조심스레 현철의 입이 열렸다.
“... 힘듭니다.”
“하긴.”
종수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단 넉 자.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그 속에 담긴 의중이 훤히 보였다.
특히 오랜 시간 현철을 봐왔던 종수는 더욱 그랬다.
현철이 처음으로 음악을 수학하던 때부터 봐왔지 않았던가.
철면(鐵面).
종수는 가끔 그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쇳덩이로 만든 탈을 쓴 것처럼 표정 변화가 없었기 때문.
열 때문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는데도 음악을 수학하겠다며 온 그였다.
봉산탈을 쓴 것처럼 부리부리한 눈매가 더욱 매섭게 느껴지는 아이였지.
당대 최고의 명문 음악당을 나오더니 곧바로 유학을 떠났고, 다녀오자마자 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에 올랐다.
그런 존재였기에 더욱 말하기 어려웠겠지.
‘힘들다는 표현도 해본 양반들이 더 쉬운 법이지.’
종수가 속으로 혀를 찼다.
미련하다는 생각이 아닌 안타까움 가득한 마음으로.
평생 현철은 굳센 사람이 되어야 했다.
거대한 명망을 가진 음악가 자제이자, 장남이라는 이유로.
자리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려 왔는지.
종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승의 입장으로서 더욱 응원하고 싶었다.
자신처럼 행복한 말로를 보낼 수 있도록.
아무쪼록 은퇴 연주회가 잘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은퇴하면 무엇을 하려고.”
“새싹들 보는 재미로 살아야죠.”
“자네 조카처럼?”
현철이 스승은 못 이긴다며 눈을 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화두는 자연스레 이안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현철도 이제는 레오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자라나는 신예 연주자가 어리숙해 보여서 생기는 마음이 아니었다.
도리어 반대.
가능성이 어디까지, 얼마나 빛날까 궁금하여 계속해서 눈이 갔다.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오는 녀석이었기에.
오늘 온다는 소식에도 현철은 남몰래 뛰는 가슴을 죽였다.
“아마 곧 이안이 올 겁니다. 한번 지켜보고 가시죠.”
뭣 하러.
옅은 미소를 머금고 가려고 하던 찰나.
현철의 이어진 말이 종수의 발목을 붙잡았다.
“녀석이 그러더군요. 곡을 완성했다고.”
매번 여유가 넘치던 종수였건만.
이안의 소식에 종수는 자신도 모르게 급히 몸을 돌렸다.
겨우 일주일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뛰어난 연주자라면 그 정도 시간에도 가능할 테지.
하지만, 종수의 눈에 이안은 겨우 1년 정도 피아노를 수학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 하더라도 가능할까.
종수 스스로도 의문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곡을 선보이는 대상은 염라, 현철 아니던가.
그런 그의 앞에 당당하게 내놓을 정도면 그만큼 자신이 있을 터.
독주회에서도 자작곡을 들었던 종수였기에 더욱 기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금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뒤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깍듯한 이안의 인사에 종수는 슬며시 미소를 표했다.
최대한 진정을 하며.
하지만, 종수마저도 목구멍 밖으로 기어 나오려는 마음을 멈추지 못했다.
꼭 물어보고 싶었으니까.
“곡을 완성했다는 것이 정말이냐.”
“네.”
짤막한 대답에 종수는 낮은 숨을 내뱉었다.
정말로 해냈다고 할 줄이야.
게다가 단순히 완성한 것에 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안의 표정에는 자신감을 넘어 흥분감마저 어려 있었으니.
어서 연주를 펼치고 싶다는 듯.
총기 가득한 눈망울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종수였다.
“빈필을 포기하면서까지 피아노를 잡고 싶었느냐.”
종수는 레오가 떠났던 날을 떠올렸다.
이안의 오스트리아행 티켓을 미리 준비할 정도로 강한 자신감이 있었던 그였건만.
하지만, 레오의 얼굴엔 이제 아쉬움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기대가 된다고.
다음에 만나면 얼마나 더 성장했을지 궁금하다고 덧붙였지.
“네. 피아노가 없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허허. 네 생각이 그렇다면 지켜보겠다.”
종수가 편안한 미소를 내비치는 사이.
이안은 천천히 연단 위에 있던 피아노로 다가갔다.
준비해온 악보를 펼치는 모습은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정리가 끝났다는 듯.
이안은 현철을 향해 짧은 말을 건넸다.
“곡의 제목은 <염라>입니다.”
“허어…”
‘염라’라.
현철의 별칭을 그대로 답습한 것 아닌가.
어찌 보면 그 별칭을 답습할 정도로 이야기를 잘 이끌어 내었다는 뜻이겠지.
자신만만한 이안의 태도에 종수마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차근히 눈을 감은 채.
이안의 주행을 잠자코 들었다.
‘스케르초.’
시작부터 무겁게 내리치는 낮은음들.
감상을 위해 감았던 눈을 순식간에 뜨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선율이었다.
종수는 이안의 표정에 묘한 눈길이 갔다.
마치 현철이 처음 대한 오케스트라를 맡았던 그때처럼.
깊게 팬 미간에서는 수많은 고뇌가 담긴 듯 보였다.
끝없이 나아가던 선율은 중간에서 고비를 맞이한 듯 불협화음을 토해낸다.
어긋나듯 펼쳐지는 선율에 불안감이 고조될 정도.
‘마치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는 선장 같군.’
낮고 화려한 음색 사이에서 위태롭게 펼쳐지는 높은음의 향연.
수많은 번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티 내지 않는 현철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가는 곡이었다.
현철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듯하면서도 정갈하게 나아가는 선율.
마치 앞으로의 현철은 정갈하면서도 고요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것처럼.
이것이 협주곡이라고 했던가.
여기에 관현악 선율이 더해지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묘한 기대감이 노인의 가슴팍에 피어올랐다.
‘자네 조카 참 잘 자랐…’
좀 더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고.
종수는 무심코 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 자신마저 굳었다.
찔러도 피 한 번 나올 것 같지 않던 그 ‘염라’ 현철이 울고 있었다.
마치 아득한 추억에 젖은 것처럼.
철면의 눈꼬리에서 삐져나온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