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50화 (50/250)

50화

‘설마 우신 거야?’

아마 최근 겪었던 일 중에 가장 놀라운 일이지 않나 싶다.

연주를 마치고 평을 듣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객석에 앉은 두 거장의 눈길이 미묘했다.

거리가 있어도 큰아버지의 얼굴은 또렷하게 보였다.

엄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큰아버지 눈 속 실핏줄이 길게 뻗어 나와 있었다.

진해진 눈시울과 붉은 기가 도는 코, 목이 잠긴 듯 연신 헛기침을 하는 모습까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정황이 한 가지 사실로 모이고 있었다.

계속해서 말을 아끼는 큰아버지의 모습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내 시선은 옆에 나를 빤히 바라보던 선생님에게 옮겨갔다.

“어떠셨습니까.”

“솔직하게 얘기해주랴?”

선생님의 눈길이 무척이나 매서웠다.

이미 할 말을 한 아름 들고 있으신 듯.

큰아버지가 할 말도 대신하겠다는 기세였다.

하지만, 이내 편안한 미소를 보이는 선생님.

여유로움 이상의 만족감까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흠잡을 데 없구나. 잘 들었다.”

선생님은 작게 박수를 치며 뜻을 전했다.

무척이나 훌륭한 구성이라고.

스케르초 특유의 화려한 기교를 맘껏 보여주면서도 그 속에 낭만파적 심리를 잘 녹여냈다고 했다.

<염라>라는 이명에 맞게 강렬하게.

하지만 단순히 강렬한 것으로 끝나지 않은 것이 매력이라고 표현했다.

“염라는 발설지옥의 죄인들의 혀를 뽑아 그 위에 밭을 간다지.”

10분 내내 강렬한 음색만 내비친다면 재미가 없으리라.

게다가 내리치는 음들만 계속 나오면 그것은 더 이상 웅장하다는 의미를 잃을 터.

웅장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위해선 군데군데 얕은 음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큰아버지가 했을 고뇌를 상상하며 펼쳤다.

큰아버지라면 그런 고민이 생겼을 때 무척이나 신중했을 테니까.

몇 번이고 이성을 붙든 채 판단하고 자신의 소신껏 행동을 이어간다.

그것이 큰아버지가 ‘염라’로 살아온 인생일 테니까.

그래서 더욱 공감이 되었다고.

마치…

“내 손으로 현철의 일기를 훔쳐본 것 같은 기분이구나.”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었지만, 말의 무게는 무척 무거웠다.

이윽고 평정심을 되찾은 듯 큰아버지도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말을 잇지 않았지만, 다시금 힘이 돌아온 눈빛에는 강한 믿음이 어려 있었다.

곡의 주인이 인정을 했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나 또한 만족스러움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자작곡 독주회 생각은 어찌 되고 있느냐.”

선생님이 궁금한 듯 질문을 덧붙였다.

전화 너머로 선생님께 당찬 포부를 밝히지 않았던가.

언젠가 자작곡으로 된 독주회를 열고 싶다고.

그러니 또 다른 곡을 만들면 선생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려 확인받고 싶다고.

내 포부에 무척이나 흥미로운 듯, 즐거운 목소리를 내셨던 선생님이었다.

어떤 곡이든 가져와 보라고.

그 말이 어찌나 든든했는지.

하지만 지금은 독주회에 채울 곡들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큰아버지의 연주회에 집중할 때.

그리고 새로운 발돋움을 준비할 때였다.

“아마 콩쿨 준비 때문에 당분간 늦어질 것 같습니다.”

“아시아 월드 말이냐.”

곧장 대회 이름을 말하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도 알고 계실 정도로 큰 규모의 대회.

게다가 대회명을 듣던 선생님은 곧바로 내 다음 계획을 눈치채신 것 같았다.

“쇼팽 콩쿨에 출사표를 던질 생각이구나.”

역시.

선생님이라면 피아노 콩쿨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을 줄 알았다.

이번 콩쿨이 쇼팽 콩쿨의 자격 요건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계신 듯.

선생님의 표정에 더 많은 기대감이 떠올랐다.

또한 선생님의 눈빛에는 또 다른 의중이 숨어 있는 듯,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묘했다.

아카데미 초청도 거절하고, 악단의 소속도 뿌리치고, 대학의 그늘 아래에서도 벗어났으면서도 콩쿨을 계속해서 하는 이유.

“너는 가르침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구나.”

선생님은 이미 내 머릿속을 꿰뚫은 듯 차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르침.

누군가 이미 이룩해온 정보들을 답습하고, 잘할 수 있는 노하우를 받아들이는 것.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내가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연주를 느끼고 감상하는 법.

어떻게 하면 더욱 이야기가 담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어떤 표현을 해야 생동감이 느껴지는지 등.

직접 경험해보고, 들어보지 않고서는 체득할 수 없는 감각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깨우치고 몸에 받아들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

하지만, 그 편이 좋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의지를 눈치챈 듯.

선생님이 빙긋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못할 선택이긴 하지. 너만 할 수 있는 시도 같구나.”

***

<염라>는 어느 정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물론, 단원들도 좋은 것 같다며 칭찬을 늘어놓았지.

시작부터 강렬한 이미지를 고수한 탓에 전후로 전개된 관현악의 분위기를 망치면 어쩌나 했는데.

뇌리를 스쳐 가는 악상들은 그 부분까지 고려한 것인지 완만하게 흘러갔다.

덕분에 소리가 울리는 극장 내부에서도 과하지 않게, 강렬하기에 더욱 서글픈 음색이 퍼져나갔다.

큰아버지에게 건넬 <염라>의 악보는 이제 완성.

펜을 놓음과 동시에 머릿속에 자꾸만 새로운 악상들이 떠올랐다.

눈길이 자연스레 미우의 콘티로 향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영상이 펼쳐지고, 이야기가 떠오르는 미우의 그림들.

콘티들을 지긋이 보고 눈을 감으면 그 즉시 오선지와 음표들이 떠오른다.

마치 음표와 오선지, 그로 인해 피어난 선율이 그림을 그리려는 듯.

나는 그것들이 악보로 형형했을 때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이걸 제대로 만들면 얼마나 파급력이 클까.’

무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대중성은 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다.

이미 전 세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니까.

그 속에 들어있는 음악은 항상 화제를 몰았고, 각국 오케스트라들이 앞다퉈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내가 손댔던 여타 작업물들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칠 테지.

게다가 이번 애니메이션은 카타리네 스튜디오에서도 특히 관심을 두고 있었다.

전체 수작업이라는 초강수를 둔 작품.

지금까지 만든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가장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고 자명하지 않았던가.

이번에 미우가 칼을 갈고 만들고 있다고 했으니 그 스케일이 남다를 터.

또한 이번 작업에 내가 더욱 관심이 가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자유로움.’

상상 속에서는 모든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것이 카타리네 스튜디오가 가진 본질.

그렇기에 그 속에 들어가는 음악 또한 지금껏 내가 맡았던 매체들보다 훨씬 자유로우리라.

영화에서는 차마 실패하는 장르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성공하는 일이 다반사니까.

한계치가 없다는 것.

그것이 나를 가장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악상을 가장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을 테니까.’

콘티에서 주어진 이미지를 떠올리자 곧바로 악상이 머릿속에 맴돈다.

쫓기는 듯한 이미지와 장엄하게 펼쳐지는 카타리네 스튜디오풍 자연을 펼치는 이미지.

그런데 오늘은 <환생>과 <염라>를 작업할 때 느끼지 못했던 감성들이 피어오른다.

‘음표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

악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음표를 따라 건반을 누르면 그 선율이 나아가 그림을 그리듯 펼쳐진다.

마치 미술가가 데생을 하는 것처럼.

때로는 곧은 직선을, 때로는 유려한 곡선을 그어대며 선율이 전개된다.

그림을 그리듯 곡이 진행되자 디테일이 더욱 가미되고, 더욱 생동감 넘치는 곡이 펼쳐진다.

머릿속에 생각하는 그림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손가락이 보다 빨리, 정확하게 건반을 타건한다.

‘마치 뛰어오는 발걸음처럼.’

내 손가락이 낮은음에서 스타카토를 연발한다.

약하게 누르던 건반에 힘이 들어가자 거리가 가까워진 듯 묵직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낮게 깔리는 베이스를 타고 오른손이 높은음을 펼친다.

발랄하게 펼쳐지는 음이 대신 날카로운 선율이 덮인다.

마치 따라오는 자들이 위협을 가하듯.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장면에 소리가 입혀지자 벌써부터 두근대기 시작한다.

‘장엄한 자연을 펼치는 곡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덧 나는 두 가지 곡을 모두 하기로 결정한 듯.

자연스럽게 다음 곡에 대한 악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말한 적 없지만 자연스럽게.

마치 내게 주어진 숙명처럼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 날아온 문자 하나.

그 문자는 내 운명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

Thanks to your participation.

You’re allowed to Final stage.

.

.

Place : Japan, Tokyo.

.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 예선 합격 문자.

이번 콩쿨 본선 무대는 일본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

“나카무라 선생님. 한국에서 온 연락은 있습니까?”

직원 하나가 날렵한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카타리네 스튜디오.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던 미우의 꿈이자, 이야기꾼이 모여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애니메이션의 획을 그은 것은 물론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장르를 개척했다고도 과언이 아닌 곳.

그 중심에는 항상 나카무라 미우가 있었다.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며 외신의 타박을 받곤 했지만, 도리어 전통을 고수한 덕에 그 특색이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지금도 미우 특유의 수작업 애니메이션의 세세함은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세상은 점차 빨라졌고, 현실적이고, 기계적으로 변해갔다.

“재촉해서 받을 필요 없네. 그저 기다리게.”

“선생님, 미리 확증을 받아둬야 편하지 않겠습니다. 조건도 그쪽에서 섭섭하지 않게끔 맞춰뒀는걸요.”

미우이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40년째.

처음에는 열댓 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종이에 펜을 긋는 작은 스튜디오였건만.

이제는 300명을 앞둔 거대 기업으로 큰 상태.

그 때문에 모든 일 처리는 빠르게, 낭만 없이 진행됐다.

미우는 항상 그것이 불만이었다.

“자네. 여기 일한 지 얼마나 되었지?”

“올해로 2년입니다. 선생님.”

“계약서로 사람을 움직이려 하면 안 되네.”

난데없는 미우의 말에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미우 또한 알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지.

여든을 넘긴 나이에 여전히 만년필을 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때론 환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젊은이들의 기술력을 놀라울 정도였으니까.

먹물이 나오지 않는 펜을 그으면 다채로운 색채가 펼쳐졌다.

펜을 바꾸지 않아도, 붓을 꺼내 물을 묻히지 않아도.

버튼만 몇 번 누르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면모에 그 또한 흔들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연주를 들으니 흔들리던 생각이 곧바로 바로 잡혔다.

‘그는 클래식의 정수를 연주했었지.’

생동감이 넘치는 연주가 전부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클래식을 듣고 자라온 그에게 클래식은 안타까운 친구와도 같았다.

어렵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낙후되어 가는 존재.

마치 자신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안은 그리 어려운 클래식을 스물하나의 나이에 펼쳐내고 있었다.

그제야 미우는 과거 자신이 처음 펜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환상만을 좇았던 그때로.’

그는 여태껏 현실을 꼬집기 위해 환상을 활용한 적이 없었다.

그저 생각하던 환상을 펼쳤지만, 그 속에서 결국 현실이 나왔던 것일 뿐.

등장인물이 펼치는 에피소드도 결국 생명이 살아가는 이야기, 즉 인간의 이야기일 테니까.

그런 보석 같은 이야기가 바로 예술적이라 생각하는 그였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환상 속에서 주제가 발견되고, 현실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나온 예술적인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고리타분하다는 말 대신 ‘웰메이드’라는 이름으로.

‘이안이라면 음악만으로도 우리 작품이 떠오를 정도의 선율을 구상할 수 있을 거야.’

거장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음악은 마치 턴테이블 위에 올라온 LP 같지 않았던가.

고전의 정수를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즐길 수 있는 음악.

미우가 원하는 연주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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