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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51화 (51/250)

51화

대한 극장의 로비.

커다란 돔 형태의 건물은 마치 파티장을 연상케했다.

극장의 입구에는 큰아버지의 은퇴를 축하하는 화환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나란히 서 있었다.

모두 큰아버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큰아버지는 그들 모두에게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듯 내 어깨를 잡은 채 끊임없이 이동했다.

“여기가 제 조카이자 피아노 유망주인 박이안입니다.”

무척이나 단단한 목소리.

하지만 그 사이에서는 묘한 기대감과 흥분감이 내비쳤다.

마치 그가 쌓아놓은 인맥, 인프라들을 물려주려는 듯.

연주회 시간이 점차 다가올수록 사람들을 지나치는 큰아버지의 속도가 빨라져 갔다.

그중에는 내가 떠나온 학교의 학장도 있었다.

“안녕하셨어요 학장님.”

“이게 얼마 만이야 박스타~”

여전히 능청스러운 목소리.

큰아버지의 앞에서도 특유의 뺀질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밉지 않아 보이는 것이 그의 장기였다.

활약상을 잘 보고 있다고.

독주회도 보러 갔는데 무척 인상 깊었다고 답했다.

“이참에 초대 교수로 모셔야 하는데.”

“... 농담이시죠?”

학장님의 표정은 생글했지만, 분명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반응이 시원치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빠르게 거절 의사를 읽어냈다는 듯 포기한 표정이었다.

지금 학교에 나만 한 인재가 없다고.

이러다가는 정말 ‘한연’이라고 불리던 음대의 계보를 ‘연한’이라고 바꿔야겠다며 능청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그리 간단한 수준이 아니지 않나?

결국 이야기가 길어지자 그는 묘한 아쉬운 티를 냈다.

“아휴 자퇴서만 안 냈어도 우리 학교 간판스타로 만드는 건데.”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셔도 돼요?”

“아무도 안 말릴걸?”

이번에는 전혀 농담인 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진심인 말투.

나 또한 가능성이 없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1년 동안 이뤄낸 일들이 많으니까.

가요 제작에 참여한 것은 물론 영화음악, 유튜브 흥행으로 대중성은 사로잡은 지 오래.

게다가 콩쿨 2회 우승과 연주회, 독주회까지 거머쥐었으니.

학장님은 조심스레 모델 제안이라도 해볼까 하는 식으로 입맛을 다졌다.

큰아버지의 붙들림으로 못했지만.

이번에 찾아간 사람은 이전과는 달랐다.

각자 보디가드로 보이는 검은 양복의 사내를 하나씩 대동하고 있는 세 사람.

생김새는 일반인과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기묘한 위용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 또한 범상치 않았다.

“건설사 상장이 이번 달이었던가요?”

“아마 늦춰질 겁니다. 기존에 잡아뒀던 2조 규모의 계약이 무마되었거든요.”

“이번에 다른 곳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군. 우리도 건설사 매출이 하락하는 바람에 골치 좀 먹었지.”

억대 규모가 아닌 조 단위의 금액이 오고 가는 말.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혀를 내둘렀을 터.

하지만, 재벌가인 저들에게는 평소와 같은 익숙한 대화일 테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떤 사람들인지 알 것 같았다.

‘왼쪽은 제온 그룹의 배태진 대표, 오른쪽은 화정 그룹의 은주린 이사였던가?’

모를 리 없지.

심심하면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인데.

대한민국 경제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

전생의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재벌들은 항상 예술에 욕심을 내곤 했다.

때론 막강한 부로 예술가를 후원하거나 자제들을 예술의 길로 안내하면서.

이미 그들의 자녀들 또한 예술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였다.

덕분에 묘한 익숙함이 그들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배성호와 정우식의 부모.’

두 콩쿨에서 만났던 청년들.

태진은 성호의 부친, 주린은 우식의 모친이었다.

그리고 그 둘의 중간에 있는 사내.

회색빛 정장을 멋들어지게 입고 있는 남자는 얼핏 보면 50대라고 믿을 수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나 또한 잘 아는 남자였다.

“오랜만이구나 이안아.”

“안녕하셨어요, 회장님.”

“회장님은 무슨, 예전처럼 아저씨라고 부르렴.”

서천 그룹.

한국의 가전제품 상당수를 만들어내고 있는 공장의 소유자.

그룹의 총 매출이 나라의 세금과 비슷하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로 막강한 곳이었다.

그곳의 수장이자 회장, 서필무.

지현의 아버지였다.

어릴 때 지현과 자주 만나면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

매번 지현을 못살게 구는 어머니, 선미와 달리 그는 무척이나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지현이 악독한 선미를 닮지 않고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

젠틀한 표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오늘 연주회의 한 장면을 장식한다고 들었는데, 기대해도 되겠니?”

“최선을 다할 뿐인걸요. 큰아버지 은퇴식이기도 하니까요.”

당찬 내 대답에 필무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큰아버지도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한 숨을 쉬었다.

이제 더 인사를 할 겨를이 없었다.

곧 무대를 앞둔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큰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볼 사람이 있다는 듯 나를 무대로 데려갔다.

무대에는 한창 준비를 앞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가장 앞.

비워져 있어야 할 지휘자 연단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나를 이어서 대한을 책임질 친구다.”

나와 큰아버지가 무대로 올라가자 그는 인기척을 느낀 듯 뒤돌았다.

흑발에 검은 눈.

누가 봐도 동양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서양인 같은 체격을 가지고 있는 남자.

“다니엘. 내 조카이자 피아니스트, 박이안이다.”

“반갑습니다. 이안.”

영어와 한국어 발음이 적절하게 섞인 말투였다.

다니엘 최.

오늘 처음 공개되는 염라의 후예이자, 클래식계의 신예.

재미 교포 출신인 그는 한국대를 수석 졸업하고 빈 필 아카데미에서 지휘자 클래스를 마스터하고 건너온 프로라고 했다.

해외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와중, 큰아버지의 은퇴 소식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를 자처했다고.

그런데 그를 바라보자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문제 될 것 없는 사람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문득 생각하던 와중 떠오르는 생각.

‘아, 그것 때문이구나.’

그는 마치 평행세계 속 나 같았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한 사람.

한국대를 다녔던 것도 같고, 빈 필과 큰 연관성이 있다는 것도 같았다.

다르다면 그는 그 엘리트 코스를 빠짐없이 걸었다는 것.

그는 남들이 나를 향해 해야 한다고 종용했던 것들을 모두 해낸 사람이었다.

악수를 건넨 손에 묘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나도 그 정도의 모습을 보여줘야겠지.

나 또한 큰아버지가 인정한 피아니스트였으니까.

손에 힘을 주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

지휘봉을 맡긴 다니엘이 백스테이지로 들어왔다.

그가 선망하던 박현철 마에스트로의 은퇴 연주회.

마지막까지 지휘봉을 잡겠다고 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던가.

스스로의 인생사를 담은 곡.

타인이 만든 곡으로 시작했던 인생을 자신의 곡으로 끝맺음한다.

마에스트로서의 인생 곡선으로 그보다 좋은 결말이 있을까.

다니엘은 자신도 말로에 은퇴를 하게 되면 꼭 현철처럼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백스테이지에서 바라보자 마지막 지휘를 앞둔 현철의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단원들을 바라보다가 이안에게 돌아가는 시선.

다니엘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안의 유명세를 아예 모르진 않았다.

1년 사이에 크게 성장한 피아니스트라고.

빈 필에서도 주목했지만,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는 소식은 들은 바 있었다.

예술가적 자존심이라고.

다니엘 또한 해외를 돌아다니며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자신의 음악이 최고라고 믿는 사람들.

거장이야 그 정도 할 수 있다지만, 다니엘의 눈에 이안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안의 연주를 직접 보는 순간.

<세월>을 듣는 다니엘의 머릿속에 기시감이 꿈틀거렸다.

‘... 뭐야.’

서른.

지휘자들 중에서 어린 나이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경험이 없는 나이는 아니었다.

특히 빠르게 아카데미를 이수하여 지휘자의 자격을 얻은 그에게는 더더욱.

그렇기에 수많은 피아니스트들과 협주를 하기도 했다.

그 속에는 농익은 거장뿐만 아니라 신예 피아니스트들도 꽤 있었다.

처음 그가 생각한 수준은 신예 피아니스트 정도.

자신의 색깔을 겨우 찾았지만, 아직 흐릿한 애송이들이었다.

그러나 이안의 연주는 신예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숙되어 있었다.

‘이런 표현력은 처음인데.’

어느덧 그는 이안 특유의 표현력을 감상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미소를 띤 얼굴.

자연스러운 표정을 한 채 손가락을 움직이는 이안의 모습은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었다.

선율은 또 어떻고.

곡의 이름인 <세월>과 걸맞게 유려하게 흘러가는 음색.

그에 맞춰 이안의 움직임도 무척 부드러워졌다.

마치 아이를 만지는 손길처럼.

건반을 만지는 애정 어린 손길이 곡에도 그대로 묻어났다.

세월을 사랑한 현철의 마음이 그대로 내비친 선율이었다.

이윽고 곡은 클라이막스로 치달았다.

‘3악장의 스케르초.’

이안의 독주가 시작된다.

현철의 사자후를 떠올리게 하는 음색이 한꺼번에 떨어진다.

다니엘도 놀라 움찔거릴 정도의 강렬함.

이어 이안이 보여주는 연주는 신기에 가까웠다.

넓은 옥타브를 오가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호흡.

낮은음과 높은음을 오가며 심지를 표현하는데도 이안은 즐기듯 연주를 펼쳐내고 있었다.

마치 거장이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듯.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잠깐 생각을 거치던 다니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있었다.

처음 <세월>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 했던 현철의 말.

“3악장의 피아노는 이안이 맡을 거다.”

넋 놓고 감상하다가 깜박한 사실.

거기다 현철이 표현한 ‘맡긴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피아노의 한 장면을 나타낸다는 말이 아니었다.

<세월>의 전체 부분에서 유일하게 현철이 손대지 않은 곳.

피아노 선율로만 펼쳐지는 제 3악장.

<염라>가 몰려오고 있었다.

쩌렁하게 울리면서도 시끄럽지 않게.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룬 채 진한 선율이 극장을 가득 에워싼다.

숨이 절로 막히는 선율에 다니엘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1년 차라곤 믿을 수가 없군.’

그는 어느덧 손을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정박자와 엇박자를 넘나들며 미묘한 선율을 표현하는 이안의 손길에 동화된 듯.

무대에 오르기 전, 현철이 왜 이번 무대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곡이라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그려준 피아니스트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끝까지 평정을 지키던 다니엘의 눈이 무언가를 보고 휘둥그레졌다.

아마 단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일 테다.

염라대왕 박현철 마에스트로.

그가 처음으로 지휘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굳건한 철옹성이 처음으로 문을 여는 모습에 다니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휘자와 피아니스트.

단둘이서 하모니를 만들어가는데도 전혀 빈틈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

저것 때문이구나.

자신이 존경하던 마에스트로가 웃는 것은 비단 은퇴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다니엘도 느끼고 있듯.

존경하는 마에스트로께서도 이 강렬함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영향을 받은 것은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차세대 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기 위해 첫 정기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던 그였기에.

지금껏 진행하지 못했던 안건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이안 씨가 요청을 받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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