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53화 (53/250)

53화

-이안아. 너도 이제 매니저가 필요하지 않을까?-

전화를 건 사람은 아버지였다.

벌써부터 많은 일을 맡은 내가 걱정된다는 듯.

모든 것을 내가 혼자 감내하기엔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덧붙였다.

하긴.

독주회 준비 때문에 영화 시사회도 잊어버린 나였으니까.

지난번에 큰아버지의 곡 작곡 때문에 미우의 연락도 제대로 받지 못하지 않았던가.

전문 인력이 생긴다면 그런 스케줄 관리를 하기에도 용이할 터.

당장 생각만 해도 일본에서 벌어지는 콩쿨을 준비해야 했고, 미우의 애니메이션 미팅도 있지 않던가.

게다가 자작곡으로 이뤄진 독주회 준비까지.

일정 관리를 해주거나 해외 출국 준비를 해줄 인력이 있으면 연습에 더욱 총력을 가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은 매니저를 구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내 말에 동의하는 듯 긍정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관리직이 아니었다.

일정을 관리하는 것은 휴대폰에 입력하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만약 외국어가 능통하다면 좋겠지만, 그거 하나로 매니저를 두기엔 어불성설.

게다가 무엇보다 상황을 잘 판단할 수 있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다면 차후 자작곡 준비나 독주회 컨설팅에도 도움이 되리라.

그러나 세상에 그런 고품질 매니저가 있을 리 만무.

잠깐 생각을 하던 아버지는 전화를 끊기 전에 장난스런 한마디를 던졌다.

-큰아버지 요즘 쉬시잖아.-

“... 농담이시죠?”

-음… 농담 반, 진담 반.-

수화기 너머로 옅은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농담이시겠지.

무엇보다 큰아버지 성격에 남을 보필하는 일은 맞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곧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무슨.

자작곡에 대한 생각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겠지만.

‘지금껏 혼자서도 해왔는데.’

수석님 유튜브 방송을 참여하고, 유라와 피스의 곡을 매만지고, 영화 음악을 녹음하는 것까지.

그동안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크게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환생>을 시작으로 <염라>.

미우의 애니메이션에 수록될 곡을 두 개 작업한다 하더라도 자작곡 독주회를 위한 최소 8개의 곡 중 절반을 채운 상태.

독주회에 펼칠 곡을 모두 채우기까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 나아가야겠지.

새로운 곡에 대한 영감을 받기 위해선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체득해야 하리라.

콩쿨은 그 과정에 좋은 씨앗이 될 예정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곡이라…’

전생이 살았던 때보다 더욱 이전 시기.

이번 콩쿨의 1차 본선 주제였다.

기존의 르네상스를 깨고 나타난 거친 선율의 연속.

형식미 대신 즉흥이 주된 사조로 자리 잡은 덕이었다.

아주 간결한 규칙만 제외하고는 곡에 대한 자유도가 크게 부각되곤 했지.

그와 동시에 피아노라는 것이 탄생한 때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소나타의 기원을 만든 자.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건반 음악을 정립한 사내이자, 수많은 곡을 남긴 이탈리아의 음악가.

이름이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가 없었다면 고전 시대는 열리지 않았으리라.

바로크에서 고전으로 넘어가는 시기, 소나타를 정립한 장본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스카를라티의 곡들은 거칠면서도 형식미를 자랑했다.

즉흥적인 듯 펼쳐지는 선율은 전생의 기억 속, <환생>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문득, 전생의 기억이 빠르게 흘러들어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난 해외.

도련님을 보필하기 위해 예술의 산지인 이탈리아로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그에게 이탈리아풍 예술은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게 했다.

르네상스.

모든 것이 변화하고 부흥하던 시기.

전생 속에 수많은 음악 사조가 박힌 때도 그때였다.

그때의 박동이 지금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미묘하게도 타이밍이 맞지 않는가.

나도 새로운 음악 사조를 찾아 여정을 떠나듯이.

새롭게 감도는 감성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

“이번 라인업은 이탈리아의 M사를 벤치마킹하여 가변배기 시스템을 활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과시욕이 주된 소비습관으로 넘어가는 현세대 소비자를 겨냥하여…”

평소보다 더욱 힘이 들어간 발표.

여유로운 듯 보이지만, 레이저 포인터를 든 직원의 손이 옅게 떨렸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거대 그룹의 회장이 계열사 제품 광고를 보러 내려올 줄이야.

“조잡해.”

잿빛 정장을 입은 사내의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분위기가 무서우리만큼 차가워졌다.

찍소리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해진 회의실.

그 중심에는 서필무가 있었다.

서필무.

수많은 계열사를 아래에 둔 서천 그룹의 수장.

그가 손대지 않은 산업을 세는 게 더 쉽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수억대의 자산이 통장에 쌓인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그 자산으로 새로운 사업을 하는 족족 대박을 터뜨리니 다른 재벌가에서도 그의 투자를 눈여겨보곤 했다.

특히, 이번에는 국내 자동차는 멋이 없다라는 편견을 깨고 새롭게 런칭되는 자동차 라인업.

저점에 위치한 국내 자동차 업계를 부흥시키겠다는 목표도 함께 섞인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울림이 없어.’

제품은 훌륭했다.

시제품의 운전대를 직접 잡아본 그였기에, 이번에는 큰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홍보팀의 자료와 광고 기획들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소위 말하는 재벌 2세.

날 때부터 예술을 봐왔던 그에게는 모든 창작이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히 투자를 하는 것도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그 투자로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산물.

그렇기에 단순한 디자인부터 시작하여 내부의 사정까지 훤하게 꿰뚫고 투자에 임했다.

필무가 손을 대는 사업마다 큰 성과를 이루는 것은 바로 이 때문.

그리고 필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광고였다.

‘광고는 제품의 얼굴이다.’

디자인이 제품의 얼굴이라면 큰 오산.

대중은 단순한 제품의 외모를 보고 사지 않는다.

광고를 통해서 그 외모가 더욱 빛날 방법을 모색하고, 속에 들어간 내용물이 얼마나 좋은지 대중에게 설득시켜야 물건을 판매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서천 그룹에서 나오는 모든 광고는 필무의 확인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었다.

이번 회의에 참여한 것도 그 때문.

‘배기음이 뭐.’

필무가 처음 광고를 보고 하고 싶은 말이었다.

자신이 그렇다면, 대중도 절로 똑같은 말을 내뱉으리라.

말로 열심히 포장해뒀지만, 결국 제품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배기음이 특징이라면, 그것이 왜 좋은 점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설명을 단순히 정보 전달이 아닌 젠틀한 방식으로 다가가야 한다.

게다가 고가의 외제차를 표방하여 만든 제품이기에 단순히 좋다는 것만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

해당 자동차를 살 수 있는 고객이라면 이미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해박할 터.

특별한 배기음을 살려서 광고를 할 것이었으면 그 소리에 신경 써야 했지만, 필무의 눈앞에 늘어진 시안에는 전혀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기본적인 것도 이뤄지지 않은 광고 시안에 필무의 한숨이 짙어졌다.

‘광고 또한 창작의 전유물인데.’

정보 전달만 담긴 광고는 이제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자극적인 광고가 판을 치고, 한 번쯤 클릭하게끔 소비자를 유혹하는 것이 현대의 트렌드.

하지만 필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과장 광고가 아니었다.

눈길이 가도록, 로고송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을 정도로.

농익은 노하우가 가득 담겨서 소비자들이 봤을 때 체내에서 궁금증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마치 미술품을 보며 수많은 생각에 잠기게끔 할 수 있는 광고가 목표였다.

“다음 주까지 새로 시안 짜오세요.”

더 이상 볼 가치가 없었다.

지금의 광고는 ‘아 광고네.’ 하고 지나칠 법한 수준이니까.

필무가 나가자 회의실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그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기업, 더 나아가 그룹의 회장으로서 최고의 효율을 생각해야 했기에.

이번 광고 시안은 그냥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소리라면… 이안의 연주가 참 좋았는데.’

배기음을 떠올리던 필무는 문득 이안의 연주를 떠올렸다.

현철의 일대기를 고스란히 담은 것처럼 넘실거리던 선율.

오랜 기간 예술을 탐닉했던 필무였기에, 이안의 연주가 더욱 매력적이게 다가왔다.

‘만약 그 배기음을 피아노 선율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다면.’

차량을 구매할 여유가 있다면 충분히 예술의 영역도 도달해 있을 터.

그렇다면 국내 클래식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이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은퇴 연주회를 통해 이안의 존재가 해외에도 전파되고 있는 이 시기.

국내는 물론 자동차의 해외 진출을 위해서라도 이안은 좋은 모델이었다.

필무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

‘해볼 가치가 있겠군.’

필무는 비서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전직 대한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만남을 주선해보라고, 이안도 함께 올 수 있도록.

***

쉬고 싶었다.

달려오기만 한 세월 속에서 은퇴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지휘자 자리에서 내려오면 편하게 인생을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현철을 찾는 사람들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누군가는 명예 교수 자리를, 누군가는 또 다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를.

그의 명성에 걸맞은 높은 자리들을 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그가 예상하지 않은 연락도 줄을 이었다.

‘녀석을 왜 나한테서 찾아?’

이안을 찾는 전화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일전의 학장과 종수도 그랬지 않았던가.

이안이 유명해지자 한국대에 다시 입학할 생각이 없더냐고 떠묻거나, 빈 필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옛 스승의 연락이 오기도 했지.

은퇴 연주회에서 만났던 필무마저도 이안과 자리를 주선해줄 수 있겠냐고 묻지 않았던가.

그 밖에 연락을 보낸 예술가들의 숫자를 합치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대한의 지휘자를 맡았을 때보다 더욱 바쁜 느낌이었다.

지금도 전화가 울리고 있었으니.

이제 막 아침이 지나가는 시간인데도 오늘 온 전화 중 15번째였다.

“왜 네 아들을 찾는 전화가 나한테 오는 거냐?”

동생, 수철이었다.

그는 간혹 현철에게 전화를 걸어 근황을 묻곤 했다.

음악가가 악기를 놓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였기에.

행여 형이 그런 감정을 느끼진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수철의 걱정과 달리 현철은 아주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음악에 대한 미련 따위는 은퇴 연주회에서 맘껏 내려놓고 왔기에.

지금은 그저 편하게 살길 원하고 있었다.

빗발치는 전화만 아니면 편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수철이 이상한 제안을 내려놓았다.

-형이 이안이 매니저를 맡는 건 어때?-

“... 내가 왜?”

싫증을 가득 담은 답변.

대화를 들은 사람이라면 단연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을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수철은 누구보다 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현철은 싫은 것은 무조건 싫다고 의사 표현을 하는 사람이라고.

애매하게 여지를 남겨두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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