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작부터 천재 피아니스트-54화 (54/250)

54화

건반과 연필을 오가는 손이 무척 분주했다.

준비해야 하는 곡만 3가지이기에.

피아노에서 손을 떼는 시간이 부쩍 줄어들었다.

일본에서 열리는 콩쿨곡과 미우가 부탁한 곡도 두 가지.

특히 막바지에 다다른 작곡에 손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연주를 거듭하여 만들어낸 두 가지 곡.

미우 또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서 주는 게 도리겠지.

‘... 다 됐다.’

얼마나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침을 먹고 들어왔던 것은 기억 나는데.

어느덧 시간을 저녁을 넘어 밤에 다다르고 있었다.

미우가 건넨 시안 속 세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다.

뭐 어떤가.

결과물이 만족스러운데.

완성된 선율을 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제 미우에게 보낼 일만 남았으니까.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악보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곡들.

그 속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이번 작곡이 무척 마음에 드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기분이었어.’

세세한 미우의 콘티를 보아서 그럴까.

콘티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시도 때문인지, 곡을 만들어가는 와중에도 콘티가 떠나지 않았다.

그덕에 선율이 오묘하게 뒤엉키며 연필로 스케치를 한 것처럼 표현되었지.

마치 미우의 콘티를 선율로 고스란히 펼쳐내려는 것처럼.

더욱 입체적인 선율이 풍성함을 넘어 손가락마저 차이나게 만들었다.

‘연필로 세세하게 표현하듯이.’

연필을 눌러서 선을 긋느냐, 힘을 쭉 뺀 상태로 선을 긋느냐.

손에 힘에 따라서 백지에 그려지는 선은 달라진다.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손가락에 힘을 얼마나 두는지, 손가락을 눕혔는지, 세웠는지에 따라 같은 건반을 눌러도 곡조는 달라진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OST를 연주하는 내 손가락에 연필이 쥐어진 것처럼 조심스레 나아간다.

‘첫 번째는 장엄한 자연에 대한 이야기.’

눈을 감자 미우의 콘티 속 장면들이 선명해진다.

작품 속 환상화를 찾기 위해 미지의 숲을 찾아간 주인공.

그중에서도 드높은 곳에서만 자란다는 환상화 때문에 주인공은 구름까지 뚫고 올라간다.

안개처럼 자욱하던 구름을 뚫고 만난 풍경.

환상적인 광경을 떠올리자 머릿속에 오선지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상상 속으로 그림을 그리듯.

상황들이 흑백 영화처럼 뇌리에 스친다.

‘처음에는 다소 놀라우면서도 신기하듯.’

Andantino.

건반을 누르는 손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마치 지친 주인공의 발걸음을 나타내듯.

구름이 존재하는 높이보다 더 높이 올랐을 테니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터.

하지만, 그 이후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카무라 미우의 환상 세계가 고스란히 펼쳐지는 것.

긴 넝쿨들을 헤치자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나무들의 향연.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도 망각할 정도로 펼쳐지는 압도적인 자연의 신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점차 뛰는 심장을 나타내는 선율.’

Allegratto.

이전보다 조금 더 빨라진 선율.

거기다 여러 화음이 더해진다.

마치 앞서 있던 도입부가 주인공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자연의 모든 것을 느끼도록.

바람이 스치는 소리, 그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넓디넓은 숲속에 사는 동물들이 꿈틀거리고 작게 우는 소리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다양한 화음의 추가.

느릿한 발걸음을 나타내던 낮은음이 어느덧 빨라진다.

조금씩 그 자연의 신비를 체감하듯 펼쳐지는 소리.

한두 개에 그치던 음표들은 어느덧 자라난 자연처럼 4~5개의 음표가 모여 장엄한 소리를 펼쳐낸다.

도입부의 발걸음 선율을 떼어내면 자연을 등장시킬 때마다 활용할 수 있도록.

이미 수많은 카타리네 스튜디오 작품을 봐왔던 나는 그 속에서 묘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배경곡들은 너무 큰 차이가 나면 안 돼.’

영화나 뮤지컬, 애니메이션까지.

소리가 큰 영향을 차지하는 예술이지만, 음악이 과해선 안 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너무 과한 선율은 관객들의 감각을 빼앗고 본디 집중해야 하는 것을 놓치게 만드니까.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였다.

배경 음악이 다채롭다 할지라도 통일성을 위해 기존의 곡에서 파생된 선율을 만들어낸다.

이미 미우가 건네준 주제가 <환상화를 찾아서>처럼.

‘<환상화를 찾아서>가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을 노래했다면, 내 곡은 신비감이 더해지도록.’

주인공의 최종 목표인 환상화를 찾았을 때 펼쳐지는 주제가.

미리 받은 주제가를 들어뒀던 나는 기존에 존재하던 화음에 멜로디를 덧붙였다.

통일성이 존재하도록.

하지만, 기존의 곡이 가진 이미지와 과도하게 겹쳐지지 않게.

아마 미우도 이것을 예견하고 나에게 미리 곡을 전달해준 것이겠지.

첫 번째 녹음을 마친 나는 곧바로 다음 녹음을 준비했다.

환상적인 자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덧 라이벌들이 따라잡았을 때의 감정으로.

홀로 여정을 떠난 주인공과 달리 라이벌들은 무리를 지어 주인공을 공격한다.

‘빠르면서도 긴박하게.’

시작부터 강렬한 선율이 음악실에서 흐른다.

높고 낮은음이 동시에 발현되는 스타카토.

짧게 끊어지는 음들이 마치 뛰어가는 발걸음처럼 요란하다.

보다 높은 곳에 닿은 주인공의 발걸음은 높은음으로.

그 아래에서 쫓아오는 적들의 발걸음은 낮은음으로.

묘한 박자에 누르는 뎀퍼 페달에 따라 저음들이 겹쳐지자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따라오듯 펼쳐진다.

‘때로는 발걸음을 죽여서.’

Calando.

점점 느리고 여리게.

점차 소리가 줄어든다.

도망치는 것은 빠르게 움직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

추격자들의 눈속임을 위해 은밀하게 몸을 숨길 때도 있어야 하는 법.

크고 작은 나무들로 이뤄진 숲에서 그런 경우는 더욱 많을 테지.

여린 발걸음을 나타내는 소리가 펼쳐지자 그 위를 지나가듯 낮은음들이 주행한다.

때로는 같은 방향으로, 때로는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는 음계.

혼란스러우면서도 긴박함을 줄 수 있도록 곡이 펼쳐진다.

이 또한 빠르고 경쾌한 부분과 느리고 잔잔한 부분에 간극을 두어 편집이 쉽게끔 만들어두었다.

콘티 속 주인공은 직접 맞서는 것보다 도망을 많이 쳤으니까.

하지만 내 곡에서도, 미우의 콘티 속에서도 주인공의 행동은 전혀 비겁해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주인공의 행동은 일침을 날린다.

경쟁이란 상대를 공격하고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 자신의 힘을 닦아서 올라가는 것이라고.

미우의 의중을 알고 있어서일까.

내가 만든 곡들은 대부분 강직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미우의 콘티를 보며 만들었던 곡들은 이전에 만든 곡들과 사뭇 달랐다.

‘표현이 예전보다 더욱 풍성해졌어.’

연주를 이어가면서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듯 뻗어 나간 선율들.

단순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달라졌다고 생각했건만.

직접 연주를 해보니 표현력은 물론, 곡의 깊이까지 달라져 있었다.

콘티에 미우의 필압이 고스란히 담기듯, 내 연주에는 나의 감각이 담겼다.

<염라>를 작곡할 때는 큰아버지의 사진과 생각들을 이야기처럼 담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번 OST 작업은 단순히 악보에 그 사상들을 담는 것이 아닌, 미우의 콘티처럼 그림을 그리듯 세세한 선율이 특징이었다.

마치 이전에는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음의 높낮이를 사용했다면, 이제는 높낮이를 활용해 분위기와 감성을 녹이는 방법을 깨우친 것 같았다.

‘드디어 끝났구나.’

녹음도 마쳤고, 연주도 충분했다.

이제 보내기 직전.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았다.

화룡점정.

두 곡의 이름을 정해주는 것.

‘음성녹음 001’, ‘음성녹음 002’라는 이름으로 보낼 순 없었으니까.

녹음된 곡을 듣고, 다시 듣고.

몇 분간 고민하던 나는 컴퓨터 자판에 손을 올렸다.

거창한 이름은 필요 없었다.

그저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을 간략하게 쓸 뿐.

<환상>, <추격>

말 그대로 환상을 보여주는 곡과 누군가에게 추격당할 때 펼쳐지는 곡.

더 많은 내용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미우나 다른 관객들이 만들어갈 테니까.

나는 그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내려놓을 뿐.

‘어서 보내 놔야지.’

인터넷에 들어가 메일함을 열어보니 그동안 읽지 않은 메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유튜브 컨텐츠를 제의하는 사람이나, 클래식 관련자의 협의 요청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 일본어.

나카무라 미우가 보내둔 메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꽤 많은 메일을 보내둔 상태였다.

아마 새로운 콘티들이 나올 때마다 새로 보낸 듯.

미우가 보낸 콘티들에 간절함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게다가 마지막 메일에는 한국어로 애써 번역한 편지까지 들어있었다.

영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계속해서 메일을 보냈는데.

혹 자유로운 창작에 누를 끼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개의치 말고 편안하게. 이안 씨가 생각한 그림을 들려주어요.

미우의 염려가 가득 적힌 이야기.

하지만, 미우가 덧붙인 콘티들에 나는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첫 콘티에서부터 일관되게 펼쳐진 이야기.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펼쳐진 곡은 어떤 콘티에 접목시켜도 이상함이 없었다.

게다가 <환상>은 선율이 더 진행될수록 밝아지고 빨라지는 곡.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마지막 콘티에는 주인공이 밝은 표정으로 자연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펼쳐지는 환상이 실제로 벌어지면 어떤 기분일까.

어렸을 때 미우의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했을 때와 같은 감정일까.

자작곡이 애니메이션 장면에 스며들 것이라는 기대감에 마우스를 누르는 손이 빨라졌다.

전송하시겠습니까?

Y/N

‘예.’

***

“선생님. 곡이 도착했다고요.”

미우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잠을 자지 못했지만,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밤중에 온 메일에 조심스레 안경을 썼던 미우였다.

평소 같았으면 다음 날 확인했을 터.

하지만 오랜 시간 거장으로 살아왔던 탓일까, 미묘한 직감이 왔다.

무척 좋은 소식이 왔을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환상>, <추격>

제목도 별도로 기입하지 않은 메일.

그 속에는 음원 파일 두 개가 들어있었다.

한국어로 된 단어를 번역해서 듣는 순간, 미우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 이상이로다.’

처음은 궁금증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탈하게 내딛듯 펼친 악상이 과연 자신의 콘티에는 어떻게 펼쳐질까.

생동감 넘치는 연주를 펼쳤던 인재가 어떤 곡을 만들었는지 매일 궁금했다.

기다리는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안의 곡은 미우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나카무라 미우. 노망(老妄)났나?”

미우 만큼이나 하얗게 센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말에 회의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회의실에 있던 일부 인원들도 그녀와 같은 눈빛으로 미우를 바라봤다.

야마다 렌카.

미우와 함께 카타리네 스튜디오를 설립한 장본인이자, 음악감독.

그동안 카타리네의 작품은 모두 그녀의 손에서 피어난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실력 하나는 업계 탑.

렌카의 제자가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섰지만, 대부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애매하게 돈 벌려고 왔다면 꺼져.”

수십 년간 친구로 지냈던 미우마저 진땀을 빼게 만들 정도의 날카로운 성정.

어쩌면 미우보다 더한 완벽주의자였다.

미우는 부족한 부분은 허허 웃으며 채우는 사람이었지만, 렌카는 악보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면 곧바로 찢어버리는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렌카. 듣고 이야기하지.”

하지만 오늘은 미우도 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엔 강한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미우가 손짓하자 안경을 고쳐 쓴 직원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이안이 펼쳐낸 곡조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선율에 처음에는 사람들이 ‘오’ 하며 긍정적인 표를 건넸다.

물론 렌카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하지만 곡이 전개되면 될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변해갔다.

렌카를 흘겨보면서.

“선생님이 연주하신 거 아녜요?”

렌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떴을 뿐.

<환상>과 <추격>이 모두 재생되자 회의실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박이다.

처음 터져 나온 감탄사였다.

“렌카 선생님이 작업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기존 곡을 이렇게 재해석할 줄이야…”

“만들어 둔 영상에 곧바로 입혀도 되겠는데요?”

“나도 주제가를 이렇게 활용할 줄은 몰랐네.”

연달아 펼쳐지는 감탄사에 미우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묘하게 견제의 시선을 던졌다.

반대편에서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는 렌카.

그녀의 모습에 다른 직원들도 서서히 몸을 움츠렸다.

어떤 말이 튀어나올까.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그녀는 팔짱을 푼 채 미우에게 물었다.

“누가 연주한 거라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한 렌카의 모습에 미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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