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불편한 것은 없으신가요?”
붉은 립스틱을 칠한 스튜디어스가 밝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내가 만족스러운 미소로 도리질을 하자 그녀는 열었던 문을 조심스레 닫고 복도로 걸어갔다.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자 하얀 구름이 잔뜩 보였다.
나는 지금 4만 피트 상공에 와있다.
‘퍼스트 클래스까지 끊어줄 줄이야.’
비행은 예정된 것이었다.
일주일 뒤가 콩쿨이었고, 그 전에 카타리네 스튜디오도 들러야 했으니까.
그러나 내 일정을 알게 된 미우가 곧바로 비행기 티켓을 보낸 것은 예상외였다.
편도 티켓만 수십만 원.
일본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우가 건넨 말은 명료했다.
“이안이 오지 않습니까.”
웃는 숨소리에 미우가 지을 눈웃음이 선했다.
내가 VIP라도 되는 것처럼.
미우는 내가 일본에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신난다는 듯 개구진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걱정을 아끼지 않으셨지.
“혼자 다녀오겠다고?”
이번 일본행은 혼자 가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부모님이어도 콩쿨 일정과 스튜디오 방문 일정 내내 오라 가라 시킬 순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항상 내 걱정을 사서 하는 분들이시니.
나 빼고 놀러 다녀오라고 하셔도 걱정 투로 제대로 노시지 못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 홀로 다녀오는 것이 편할 테지.
미우도 그에 맞춰 통역을 붙여주겠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매니저가 필요하겠지?-
익살스런 아버지의 말.
나도 모르게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여정에서 매니저의 중요성을 조금 깨달았기 때문.
자신감 있게 건너왔지만, 전혀 모르는 단어들이 즐비한 곳은 낯설었다.
내가 곡을 연습하는 동안 공항의 구조를 미리 파악한 사람이 있으면 조금 더 빨리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크게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기에.
나는 괜찮다는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한국 청년 박이안 환영합니다.
짐을 챙겨 나가자 작은 플래카드를 든 미우가 나를 반겼다.
미우의 명성에 맞춰 그의 주변에는 일부 팬들이 몰려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의 옆에 있던 붉은 안경테를 쓴 직원이 유려한 한국어로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안 씨. 대외협력팀의 와타나베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먼길 오느라 고생했다고 전하십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환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인걸요.”
와타나베가 내 말을 전하자
미우는 고개를 저으며 맑은 미소를 보였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양.
일본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우선 호텔로 가시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벤은 호텔로 향했다.
미우는 그동안 쌓인 할 말이 많은 듯 나를 향해 일본어를 연발했다.
그 모습에 와타나베가 곧장 통역을 이었다.
“곡을 받고 무척 기대되셨답니다. 스튜디오 직원분들도 이안 씨의 곡을 좋아하셨구요.”
곧장 미팅 날짜를 잡았던 게 이 때문이구나.
아마 미우를 비롯한 제작진 측에서도 내 곡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듯했다.
미우가 보낸 메일에는 몇 가지 감탄사도 붙어있었으니까.
게다가 기존의 곡을 잘 활용해주어서 음악감독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가자 차는 어느덧 호텔에 도착해있었다.
깎아지른 모양새로 솟구친 거대한 호텔은 마치 하나의 성 같았다.
일본 최초의 5성급 호텔.
팰리스 호텔의 저력이었다.
호텔의 모습에 한 번 놀란 나는 객실에 와서 한 번 더 놀랐다.
‘도쿄가 한눈에…’
최고층에 존재하는 프리미엄 스위트 룸.
‘방’이라는 개념으로 불리기엔 그 크기가 거대했다.
게다가 넓게 트인 창문 아래로 도쿄의 전경이 한눈에 보일 정도.
도쿄의 자랑, 스카이트리가 나를 환영하듯 올곧게 서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거실로 추정되는 공간에 놓인 피아노.
부모님과 함께 내로라하는 호텔을 가봤지만, 피아노가 비치된 호텔룸은 처음이었다.
피아노를 이곳저곳 살피는 내 모습에 미우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께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이안 씨가 편안하게 콩쿨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말이죠.”
미우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목.
애니메이션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세심한 배려가 엿보였다.
곧바로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렸다.
조율까지 완벽하게 되어 있는 모습에 나는 미우를 향해 감사 표시를 전했다.
“아리가토.”
감사하다는 일본어.
미우는 내 입에서 일본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도 기본적인 한국어를 알아둘 걸 그랬다며.
내가 출국할 때는 꼭 한국어로 인사말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방 한 켠에 캐리어를 놔두고 다가가자 와타나베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스튜디오로 가보실까요?”
***
미팅룸 한쪽 벽면은 그림으로 가득했다.
그동안 만든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들과 원화들이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마치 카타리네 스튜디오가 걸어온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혹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다면 선생님께서 드린다고 하시네요.”
그림들을 빤히 바라보는 내 모습이 적나라했나 보다.
미우가 나를 향해 괜찮다는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림을 바라보던 시선을 카타리네 직원들을 향해 돌렸다.
녹음 파일을 다시금 듣던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있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야마다 렌카.
그녀의 명성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카타리네 애니메이션의 곡을 창조시킨 장본인이자 일본에서도 잘 알려진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니까.
황홀경을 연주하면서도 담담한 렌카의 모습은 신대륙을 개척하는 전사와 같다고 표현되곤 했다.
짧게 자른 회발이 마치 투구처럼 보였다.
말을 아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아마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안 씨의 곡이 무척 좋다고 하시네요. 당장 사용해도 무방할 정도랍니다.”
중간에 앉은 직원 하나가 말하자 와타나베가 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통역했다.
현직 작곡가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주제곡을 이런 방식으로 활용할 줄은 몰랐다는 듯 긍정적인 의사를 전했다.
와타나베의 번역은 물론, 일본어를 내뱉은 다른 직원들의 얼굴에서도 그러한 긍정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혹시 삽입곡의 사이 스케일을 달리한 것은 의도된 건지 물으시네요?”
직원이 사뭇 진지한 기색으로 던진 질문.
아마 내가 곡에 넣어둔 장치를 알아본 듯했다.
전체가 한 곡이면서도 그 부분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한 표현.
마치 클래식에서 악장을 나누는 것처럼 소리를 달리해뒀었지.
“네. 콘티에 긴박한 추격 장면이 있는가 하면, 주인공이 적들을 따돌리기 위해 숨어 있는 장면이 있더라고요. 그 두 가지를 모두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내 대답에 그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내가 말한 답에 크게 통감하는 듯 <추격>의 활용도가 매우 높을 것이라 지적했다.
이번 애니메이션엔 격한 추격씬도 나오지만, 주인공이 부상을 입고 숨는 장면도 나온다고.
선율이 강하지 않아 조용한 장면에 제시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어떤 부분은 벌써부터 활용법이 떠오른다는 듯 계획을 늘어놓기도 할 정도.
“그렇다면 녹음은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직원의 물음에 나는 잠깐 고민을 했다.
본선까지 앞으로 일주일.
결선까지 합치면 열흘 이상 정도가 걸리리라.
“콩쿨 일정에 따라 다시 협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콩쿨 참여 소식에 그들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음악에 대해 해박한 그들도 이번 콩쿨의 스케일에서 아는 듯했다.
게다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던 렌카도 이번에는 조금 움찔거렸다.
냉철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렌카.
왜일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묘한 기대감이 맺힌 것 같았다.
***
음악을 들으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렌카는 음악이야말로 가장 날것에 가까운 예술이라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반을 누르는 것에 성정이 드러나니까.
그리고 그 연주를 들으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안은 렌카의 그 고정관념을 두 번째로 깬 사람이었다.
‘처음엔 미쳤다고 생각했지.’
어느 날 한국의 이름 모를 피아니스트에게 곡을 맡기고 싶다는 미우의 말에 렌카는 윽박을 질렀다.
생동감 넘치는 연주는 얼어 죽을.
매번 감성이 넘치는 낭만주의 미우라서 할 수 있는 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미우가 다시 직접 한국에 가더니 기어이 곡을 주고 왔다고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곡이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다고 전했지.
‘예상 밖이긴 했어.’
처음엔 정말 노망인 줄 알았다.
함께 여든을 넘긴 나이에 정신 줄을 놓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녹음 파일을 듣는 순간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기존을 답습하는 것 같으면서도 더 나아가는 느낌을 주는 <환상>과 미묘한 코드 활용으로 전혀 다른 곡 같으면서도 주제곡과 통일성을 강조한 <추격>.
왜 미우가 생동감을 강조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안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고 싶을 정도로.
‘이번에 콩쿨에 나간다고…’
아시아 월드 피아노 콩쿨이 일본에서 열린다고 했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는 콩쿨이었다.
주제곡을 만든 사람이자 렌카의 제자도 이번 콩쿨에 나가기로 했으니까.
지금까지 카타리네 스튜디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에는 렌카의 선율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그녀가 창립 멤버여서가 아니었다.
미우는 일할 때만큼은 완벽함을 강조했던 사람이었고, 렌카는 그동안 그 완벽함에 유일하게 알맞은 사람이었다.
매번 오디션을 보고 주제곡을 선정했지만, 렌카가 만든 곡을 뛰어넘을 정도로 잘 맞는 곡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변이 일어났다.
“주제곡으로 다른 곡이 뽑혔다고?”
질투심 따위가 아니었다.
작품에서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내가 얼마나 대단한 곡을 맞이했길래 자신의 곡을 마다하고 신예의 곡을 골랐을까.
그것도 유약해 보이는 피아니스트의 곡을.
“안녕하세요!”
이시이 히마리.
처음 스튜디오에서 히마리를 만났을 때.
그녀를 본 렌카는 새로운 직원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얘가 정말 그 곡을 만들어냈다고?’
감정 변화가 좀처럼 없던 렌카마저도 흔들리게 만들 정도.
히마리의 손은 무척이나 가냘펐지만,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들어가는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화음의 세례는 장엄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었지.
연주를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렌카의 고정관념을 처음으로 깬 사람이 바로 히마리였다.
그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제자가 되지 않겠냐고 먼저 제의를 했지.
“너는 뭣 때문에 피아노를 잡았냐?”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요.”
陽葵.
햇볕의 해바라기라는 이름과 걸맞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지.
자신은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오선지에 담을 뿐이라고.
판단은 타인의 몫이지, 자신이 할 것이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수없이 콩쿨에 나가는 이유도 피아노를 수학하는 친구들과 음악으로 소통하고 싶어서라고 할 정도로 그녀의 내면은 무척 깨끗했다.
‘저 친구도 그런 모양새군.’
곡을 설명하는 이안의 표정.
렌카는 그의 얼굴에서 히마리와 같은 표정을 보았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악상이 아닌 극도로 자연스러움에서 묻어나오는 선율.
그렇기에 더욱 기대가 됐다.
‘꽃과 꽃이 싸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